104. 검은 도시 (2)
조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책임지고 그 분노를 받아줄 각오가 되어있었건만.
반대의 취급, 아니 대접을 받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다.
“뭐야? 얘 왜 이래? 혹시 가고일은 싸움으로 서열 정하고 그러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야야. 일어나라고. 내가 혹시 뭔가 말을 오해하게 한 거야? 아님, 이게 가고일의 결투 자세?”
하지만 정작 에나도 조이의 반응을 이해 못 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설명이라도 덧붙여준다면 좋으련만, 이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일언반구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고일 소녀.
알트는 그런 모습을 보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에게도 가고일은 어느 정도 미지의 영역이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짐작 가는 점은 있었는데.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른 사실은, 가고일은 질서와 혼돈의 신 어느 쪽도 믿지 않는다는 것.
문명에 왕국까지 존재하는 만큼 그렇다고 그들에게 종교가 없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나, 인간과 적대하는 관계인 만큼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정황상 한가지 유추 가능한 점이 있었으니.
“아마 가고일은 드래곤을 신으로 모시고 있을 거야.”
생각해보면 드래곤과 가고일간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피막 날개에 꼬리까지 달린 가고일의 외형은, 자신들과 드래곤을 연관된 신화를 만들 근거로 충분했고.
브레머 지하 깊숙한 곳의 버려진 가고일 도시에 하필 드래곤이 봉인된 듯 잠들어 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다 세상에 가장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드래곤은, 바로 가고일 전쟁의 영웅 중 한 사람 토루가가 잡은 드래곤이었는데.
그조차도 침략해오는 가고일의 군세를 토벌하던 과정에서 마주친 것이니.
가고일 전쟁과 관련된 6편에서, 그들의 군대가 항상 드래곤 깃발을 들고나왔던 것까지 생각하면 매우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다.
“엥? 드래곤이 신이면. 오히려 우리 집안은 원수 집안 아냐?”
“우리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래 보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즉, 이런 얘기다.
그릴즈는 에나를 잡기 위해 포효와 같은 드래곤의 힘까지 써가며 호위들을 쓰러트렸을 테고.
그 힘을 본 에나는 그릴즈를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쯤으로 여긴 건 아닐까, 하는 추측.
그렇다면 당연히 그 딸인 조이 역시 마찬가지의 존재로 여기는 듯하고.
“야야! 나 드래곤도 아니고 신도 아냐!”
설명을 들은 조이가 절규하듯 외쳤지만.
다만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에나는 드래곤이란 단어도, 신이란 단어도 이해를 못 했는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그래도 어떻게든 가고일 언어까지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한 결과, 에나를 대강 이해시키는 데엔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조이를 숭배하는 듯한 태도가 사라진 건 아니었는데.
“음, 애초에 드래곤의 심장을 먹고 그 힘을 얻은 존재도 숭배의 대상에 들어가나 봐. 왕가의 시조가 그랬던 모양이거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아빠가 얘한테 한 짓은….”
“뭐, 대충 용서해줬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던가.”
결국 조이는 어쩐지 찔려오는 양심을 붙잡고, 이상하게 자기를 잘 따르는 에나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잠깐의 헤프닝이 지나간 뒤.
로나는 안경을 고쳐 쓰며 알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래서 알트. 이제 저 아이를 집에 데려다줄 생각이지?”
“네.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그리고 그 한마디에 로나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했다.
“교수님! 이제 에나는 집에 돌려보낼 테니, 그럼 저도 이제……!”
“어휴. 보자. 이제 새 교수 임용일까지 남은 날이….”
“……더욱 더 열과 성의를 다해, 교수님의 업무를 돕겠습니다!”
비록 로나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안경 너머로 눈물이 비치는 듯한 그런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알트는 거듭해서 잘못된 선택을 해버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숙연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루퍼스는 졸업한 제자를 불러들이기 위해, 탈리스커가 죽고 생겨난 공석을 이용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로나 씨는 에나가 가고일이라도 괜찮았나 봐요?”
“응? 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뭐 어때? 어차피 내 고향은 가고일 전쟁 때도 별로 영향이 없었는걸.”
“하긴. 뮬리라면 그렇겠네요.”
“게다가 우린 가고일보단 그 재수 없는 이빨쟁이들이 문제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지, 질색한 로나는 양 검지를 송곳니 쪽에 갖다 대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내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는 가고일 소녀를 돌아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에나는 고향까지 어떻게 데려가려고?”
“그러게요. 가고일이 밖을 돌아다니면 분명 난리 날 텐데.”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다.
일단 그녀를 변장시킨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평범한 옷 같은 걸로 가리기엔 저 날개와 꼬리가 커도 너무 크다.
‘에나가 여기 오버델에 온 과정은…….’
알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 방법은 채택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밀수단이 에나를 인도받은 후 그녀를 정중하게 모셨을 리가 만무하니까.
아마 상자 같은 곳에 구겨 넣은 다음 짐짝처럼 취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알트가 운반을 의뢰한다 쳐도, 중간에 빼돌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이들.
“아! 밤에 남들 몰래 너희 상회 배에다 밀항시키면 어때?”
“방향이 정 반대에요. 저희는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저희 배는 동안 쪽으로밖에 다니질 않는다고요.”
다만 확실히 이런 일은 육로보다 해로가 좋긴 하다.
외부의 눈에 띄지 않고 가장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니까.
하지만, 물론 이 또한 완벽한 방법이 아닌데.
우선 선원이 의외로 걸림돌이 될 거다.
자유로운 기질의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어지간한 선장들도 힘들어하는 일이기 마련.
안그래도 헤르만이 노골적으로 의심해온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중간에 들키거나 빌미를 주게 되면 그야말로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꼴이 된다.
그 외에도 행선지에 맞는 배를 구하는 것도 일이고.
이래저래 형편에 맞는 배편을 구하기가 쉬울 리 없…….
‘아니지. 있기야 있지.’
그 순간 알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배 한 척이 있었다.
그것도 조금 전 자신이 생각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그런 완벽한 배가.
* * *
알트는 기척을 숨기고서 시장 길을 걸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수한 마을 처녀.
이따금 주민들과 정답게 수다를 떨거나, 괜히 자기에게 추파를 던지는 청년을 약 올리는 등.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뒤를 계속해서 미행했다.
그러다 그녀는 홀로 굽어진 골목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를 미행하던 알트는 곧바로 그 뒤를 따라갔지만.
골목 안쪽은 텅 비어있기만 했다.
“지금 저와 뭐 하자는 겁니까?”
“술래잡기요? 이런 거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째 술래가 잡혀버렸지만요.”
어느새 알트의 등 뒤로 조용히 나타난 여인은 아까전 동네 주민들에게 보여준 정다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고.
지금은 나른한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세 번째 손가락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듣지 않겠습니다. 대충 당신이 뭘 부탁하려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오오. 듣지도 않고 흔쾌히 허락해주겠단 건가요?”
“그런 실없는 농담은 첫 번째 손가락께나 들려드리면 됩니다.”
여인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피로감에 가득 찬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버델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지간한 일은 다 알고 있었을 그녀였기에, 알트가 이곳에 온 목적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을 터.
귀찮아질 일은 처음부터 사양하겠다는 태도.
하지만 어쩌면 그녀도 모르는 게 하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구한 소녀가 가고일의 왕녀라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에 여인의 눈이 잠깐 커졌다.
만일 그것이 사실일 경우의 이는 생각한 이상으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말의 진의를 의심하듯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의 뺀질거리는 사내는 일단 빌레르, 그녀의 신께서 인정하신 사도.
“그거 확실한 사실입니까?”
“적어도 저는 거짓말을 한 바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
여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알트의 등 뒤에서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미약한 소리조차 나지 않는 가벼운 몸짓이었지만, 어쩐지 지쳐 보이는 얼굴.
“알겠습니다. 자세한 요구사항을 말씀해주세요.”
“지금 항구에 임프리스의 흑선이 정박해있는 것 같더군요. 그걸로 가고일 왕녀. 에나를 임프리스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사실 알트의 요구는 그렇게 무리한 것도 아니었지마는.
여인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이내 결심이 든 그녀는 다시 그 피곤해 보이는 눈을 뜨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적어도 한 분은 이 일을 기뻐하시겠군요.”
“으음, 그러게요.”
알트는 여인이 말한 한 분의 존재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적절한 수단을 얻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대모가 바라는 대로 임프리스로 돌아가는 그림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 * *
알트를 비롯한 게이머들 사이엔 작은 의문이 있었다.
어째서 빌레르를 상징하는 동물이 까마귀가 아니라 비둘기인가 하고,
그도 그럴 것이, 빌레르의 신앙을 국교로 삼고.
나라가 곧 빌레르의 신전이나 마찬가지인 그곳.
임프리스는 검은색 일색이었으니까.
알트가 에나를 밀항아닌 밀항을 시킨 배, 임프리스의 흑선도 이름처럼 온갖 것이 다 검었다.
돛도 선체도 모든 것이 칠흑같이 검은색.
심지어 선원들의 복장마저 하나같이 검은색 투성이었다.
“뭔가 죄다 새까매….”
심드렁한 얼굴의 조이와 달리, 세린은 선실 안을 둘러보다 몸을 파르르 떨었다.
온통 검은색인 이 배의 모습이 어째 유령선 같다는 느낌도 들어서였는데.
게다가 색깔보다도, 더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있었으니.
“있잖아. 알트.”
“응?”
“여기 선원분들…. 다 살아있는 사람 맞지?”
알트는 세린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게, 이 배의 선원들은 마치 알트 일행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마치 저들과 일행들이 한 장소에 있으면서도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살아있는 사람 맞으니까 괜히 가서 말 걸거나 하지 마. 저들은 그냥 훈련받은 대로 행동하는 거니까.”
“으응. 알았어.”
그럼에도 여전히 찜찜해 보이는 세린의 얼굴.
알트가 이 배를 고른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저 선원들이었다.
물론 저들은 블랙 대거의 암살자도 아닌, 정말로 평범한 공무용 선박의 선원에 불과한 이들이었다.
그저 그들의 국적이 임프리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런 다소 기이해 보일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니.
‘대체 연합 진영에 어쩌다 이런 나라가 생긴 건지. 봐도 봐도 기이하다니까….’
얼굴에 베일을 쓴 빌레르의 모습처럼.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데 익숙한 그림자 같은 사람들의 나라.
그것이 알트가 느낀 임프리스라는 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