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여왕의 유산 (3)
처음부터 생각해보면 그랬다. 일행들과 함께 있는 동안의 에나는, 단 한 번도 날아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고.
그녀의 움직임을 잘 살피면 지상 보행이 얼마나 익숙한지도 깨달을 수도 있었을 터.
“그, 그래! 날지 못하면 어때! 다른 걸 잘하면 되잖아!”
세린은 억지 부리듯 에나를 위로했지만, 그 말이 본인에겐 와닿지 않을 거다. 물론 자기를 생각하는 마음은 느낄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그게 공감이 되는 건 아닐 테니.
하지만 알트는 그 옆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가고일에게 날지 못한다는 건…. 여왕으로선 치명적인 결함이야. 백성과 같은 곳에 설 수 없는 여왕은 자격이 없어.”
차라리 힘이 약한 거라면 모를까.
가고일의 건축방식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에게 비행 능력이란 중요한 자부심이거늘.
알트는 그제야 에나가 실종됐어도 여왕이 찾지 않은 이유가 이해됐다. 이미 그녀에 대해 체념한 지 오래였으니.
딸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더라도.
정말 누군가의 모략에 속았던 것이었다해도.
설령, 에나가 죽을 위기를 겪는다 한들.
그녀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살아있다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차라리 여왕은 에나가 죽지 않았다면, 적어도 자식에게 자유라도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안… 계속 숨겨서….”
알트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에나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에게 보여준 호의와 같은 그 모든 감정이, 순전히 자신이 가고일의 왕녀라는 사실에서 비롯됐다고만 생각한 걸까.
그랬기에 자신이 계륵 같은 불량품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버림받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서 공용어도 필사적으로 배웠겠지.
‘그런가…. 이미 다 알고 있었나?’
그저 잠자코 있고, 모르는 척하는 식으로 계속 외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여왕이 어떤 심정에서든 자신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혹은 누군가의 배신을.
알트는 떠올렸다.
어쩌면 탈리스커의 약에 몸이 뒤틀리고 부풀었을 때,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했던 것이. 그저 육체의 고통 하나 때문만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괜찮아. 여기 있는 누구 하나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허나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불완전한 몸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그 기분을. 알트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해 봐. 니가 진짜로 원하는 걸 말이야.”
알트는 에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 소녀가 뭘 바라고, 뭘 해주기를 원하는지. 그저 여기 올 때까지,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해줬지만.
비록 오답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렇다고 딱히 정답도 아니었다.
반대로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지금 저 어쩔 줄 모르는 맹한 얼굴이 다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그저 허망한 바람만을 바라본 채.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품고서 살아가는 방법 말곤, 아무것도 몰랐을 테니.
전생의 알트 또한 이미 경험했던 삶이었다.
“그래도 역시….”
에나는 대답하길 머뭇거렸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망설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떨어지기 위한 잠시의 기다림 뒤.
“집에 갈래.”
“좋아, 알겠어.”
사실상 그녀의 목표에 달라지는 점은 없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러면 네가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청소를 먼저 해야겠는걸.”
알트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소리를 작게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져있던 퍼즐 조각들이 끝내 제자리를 찾아가며. 대충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 * *
“그렇군. 왕녀께선 날지 못하셨나?”
워단은 딱히 놀라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오히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이제야 답이 나오게 된 걸지도 몰랐다.
“대충 눈치고는 있었나 봐?”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말했다시피 왕녀께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스스로의 힘으론 궁에서 나올 수 없었을 테니 당연했군.”
허나 여상한 워단의 태도와 다르게.
알트의 눈에는 얼핏 우울함이 스쳐지나갔다.
에나가 어떤 식으로 자라나고, 어떤 식으로 생활했을지 생각해보면. 조금 암담했을 것 같다.
육체적 한계로 인해 제한된 생활. 그 느낌은 자신도 잘 알고 있으니까.
계단 없는 가고일의 건물에서. 그 안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
남들 앞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감추는 것도 일이라고 친다면 모르겠지마는. 그게 아니라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진짜로 여왕께서 왕녀님을?”
“아니. 아무래도 그 부분은 생각과 조금 다른 것 같아.”
처음에는 누가 왕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느냐에만 초점을 잡았지만. 에나가 날 수 없는 몸이란 걸 알고 나니,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왕도 에나도 울티마 스크롤이란 최후의 수단에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아냈으니. 막말로 웬 거지가 나타나서 얘기를 꺼냈었어도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역시 이런 경우 누가 가장 이득을 보는가를 따지는 게 제일. 그런 의미에서 여왕은 오히려 중립적인 인물에 가까웠다.
정말로 에나를 처리하고 싶었다면.
외부에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라, 끝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확인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에나가 왕녀로 태어난 이상, 설사 허수아비 여왕이라도 됐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다음 세대의 여왕에 모든 기대를 걸고. 그 새로운 왕녀를 낳기 위한 것이 유일한 존재의의인 반쪽짜리 여왕으로 말이다.
결국, 누군가 에나가 확실하게 없어지는 것을 바라는 자가 있었고. 거기에 덧붙여 제국과 손을 잡을만한 자.
그렇다면 제국과 손을 잡아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단지 에나를 제거하려는 목적이라면, 제국의 도움 따위 필요 없을 터인데.
‘가고일의 배신자와 제국, 둘 모두가 원하는 결과…. 그거라면 역시.’
애초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와 있었다. 에나의 존재를 찾아냈을 때. 또 그녀가 왕녀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알트의 얼굴에 단호한 결심이 서렸다.
그러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도록 신경 써왔던 만큼.
다시금 이 땅에 가고일과 인간의 피가 물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기 워단. 혹시 네 생각 좀 물어도 될까?”
“음?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
알트는 눈앞에 있는 가고일을 흘끗 둘러봤다.
솔직히 자신도 키는 좀 큰 편이라 자부하지만, 그런 인간의 키 따위 우습다고 여기는 듯한 거구.
하지만 그가 유독 큰 게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정도가 평균이 아닐까 싶다.
“네가 생각하기에 현재 가고일 중에서 가장 강한 전사는 누구라고 생각해?”
“음? 어째서 그런 걸 묻는가?”
“그야 만일… 차기 여왕이 사라진다면. 그자가 왕이 될 수 있지 않겠어?”
가고일 여왕의 시초가 누구던가.
드래곤의 심장을 먹고 그 힘을 얻은 자 아니었던가.
게다가 드래곤이란 어떤 존재인가. 동족끼리 마주하면 피가 끓어오르고. 어느 한쪽의 서열이 정해지기 전까지 싸움을 계속하는 폭력의 짐승.
결국 그러한 자리를 대신할 걸맞은 존재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당대의 전사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와울?”
“바로 나오는 걸 보면 유명한가 봐? 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여왕의 측근 중 하나인데. 녀석을 따르는 젊은 녀석들도 많아. 확실히 자네가 말한 조건에 부합해.”
역시나 얘기를 들을수록 제국과 손잡은 배신자의 냄새가 폴폴 풍겼다. 이미 자기만의 세력도 갖췄으며, 그런 동시에 기존 세력과 밀접한 관계까지.
다만 그런 자를 상대로 무턱대고 공격한다면 여러모로 역풍을 맞기가 십상이다.
그렇다면 역시. 상대 쪽에서 이빨을 먼저 드러내게 만드는 게 가장 최선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마침 그걸 위한 일을 가장 잘해줄 것 같은 사람이 있긴 하지마는. 부탁을 들어줄지는 의문이긴 하다.
그래도 뭐든 일단 부딪혀보는 게 상책이기 마련.
알트는 구석에서 혼자 꼿꼿이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도 역시 알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더니 이내 팔장을 풀고, 똑바로 서서 그를 기다렸다.
“저, 루안. 뭐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십시오.”
“사람 좀 찾아주셨으면 하는데요. 뭐 데려올 필요까지는 없고, 정보수집이랄까. 얘기만 대신 듣고 와주셔도 돼요.”
그 말을 들은 루안은 물끄러미 알트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걸 왜 나한테 시키냐는 그런 눈빛이 조금은 섞여 있는 듯하지만.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찾아봐 드리면 될까요?”
“뭐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알트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서두를 필요는 없다.
모든 준비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움직여도 늦지 않을 테니.
* * *
잃어버린 왕녀의 귀환.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인가 싶지마는. 아이러니하게도 백성들은 사라진 줄도 몰랐던 왕녀.
그래도 왕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물론 자신을 구해준 영웅들과 함께.
하지만 그녀의 귀환을 기뻐하는 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캐도 돌아왔구나.]
[죄송합니다, 여왕 마마. 울티마 스크롤은 끝내 구하지 못했어요….]
여왕 앞에 선 에나는 평소보다도 더 왜소해 보였다.
작고 왜소하기 짝이 없는 저 가녀린 가고일 소녀가. 대체 어떻게 위풍당당한 풍채를 가진 가고일 여왕의 배 속에서 태어난 건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진실이었지만.
[그보다, …인간과 함께 왔구나.]
[네. 저를 구해준 인간이에요,]
가고일 여왕은 에나가 데려온 인간을 보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이란 종족을 딱히 증오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딱 잘라 말하자면 껄끄럽다는 것에 가까운 느낌.
다만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끔 하는 것이 있었으니. 저들이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이라는 물건.
물론 저들의 얼굴이야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마련이지만.
하지만 가면이라고 함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음을 의미하였기에. 그 부분이 그녀의 심기를 긁어댔다.
하지만 어쨌거나 일단 저들은 오랫동안 사라졌었던 왕녀를 구해온 은인. 그러니 지금은 먼저 공로를 치하함이 옳았다.
[워단. 저들에게 내 말을 대신 전해라.]
여왕의 부름에 저들과 동행해온 워단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며 걸어나 왔다.
[인간들에게 내 딸을 구한 대가로 무얼 바라는지 물어보거라.]
그렇게 인간의 통역사로서 자리에 함께해온 워단은.
가면 쓴 인간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여왕의 질문을 대신 전달했다.
이윽고 저들끼리 속삭이듯 얘길 하던 인간들은, 다시 그 답을 워단에게 전달했는데.
[황송하오나. 저들이 말하길….]
워단은 황송한 듯 조심스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저 왕녀께서 무사히 여왕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왕의 표정은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거늘 그것을 소망인 듯 얘기하는 저들의 저의가 의뭉스럽기 그지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방금의 소망이 그녀를 주박처럼 옭아매는, 그러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불편했던 걸까.
여왕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나를 힐끗 노려봤지만.
[알겠다. 내 약속하마.]
비록 짧지만 많은 말이 함축된 듯한 느낌의 대답을 전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여왕이 먼저 자리에서 떠나고 다른 가신들도 차례로 물러나는 사이.
어째선지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자가 있었는데.
원래도 듬직한 가고일이건만, 유난히 눈에 띄는 풍채를 가진 자가 매서운 시선으로 왕녀와 그 영웅들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