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여왕의 유산 (4)
목에 걸린 보석 꽃을 내려다보는 에나의 시선은 어째 서글픈 눈빛이었다.
그녀가 여왕의 배에서 나왔을 때. 그저 남들과 다른 붉은 알껍데기에 감싸여 태어났을 뿐. 특별함을 안고서 태어났지만, 결국 평범조차 되지 못한 게 그녀였으니.
알이라고 해도 그저 석회질로 단단하게 굳은 태반일 뿐이라. 출산 직후 껍질을 벗기고 나오지 않으면 질식해버리기 마련.
물론 스스로 깨고 나오는 게 대부분이지마는, 에나가 태어났을 땐 그 귀중한 붉은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그 속에서 숨 막혀 죽을 뻔했으니.
그렇게 다른 이의 손에 의해 껍데기를 깨고 나온 그때부터,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껴야 했는지도 몰랐다.
에나는 딱딱한 돌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이라 해도 사실 다른 가고일에겐 평범한 출입구에 불과한 문. 하지만 그녀가 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유일했다.
어찌 보면 감옥이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여기서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그저 죽음이 기다릴 뿐인 그런 불공평한 감옥.
그렇게 이곳에서 갇혀 살다가.
붉은 알을 낳게 될 그 날까지, 쉼 없이 교미와 출산을 반복하게 될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
그렇게 온갖 상념에 잠겨 아래를 내려다보던 에나는, 멀리 저 아래 모여있는 세 사람. 고작 며칠에 지나지 않는 날들이었지만, 그녀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주었던 그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그들이 이 인사를 알아차릴 리가 없지마는.
그리고 그때.
세 사람의 고개가 그녀가 있는 탑 위로 향하더니.
그들 셋 모두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듯 했고.
그 모습을 본 에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 걸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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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라푼젤이 생각 나….”
아래쪽에서 에나가 갇힌 탑을 올려다보던 세린이 중얼거렸다. 물론 에나에겐 그렇게 긴 머리카락은 없지만.
“라푼젤? 왠지 맥주랑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인데.”
“엣. 그러니까 저희 고향에 내려오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공주님이에요! 탑에 갇혀서 왕자님이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런….”
“공주가 취급이 뭐 그따위야? 이상한 동네네. 안 그래?”
세린의 라푼젤에 대한 설명에 조이는 코웃음 치더니, 알트에게 자기 감상에 동의를 구했지만.
그렇게 말해도, 알트는 같은 곳 출신으로서 그저 웃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뭐, 여기도 결국 그런 느낌이긴 하잖아.”
“아아. 그래서 뭐 어쩔 생각이야? 이런 이상한 가면도 씌워놓고.”
조이는 자신의 눈가를 가려놓은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툴툴댔다.
마부인 루안이 쓰고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가면. 자세히 살펴보면 왠지 비둘기를 형상화 한 듯한 그것. 혹시 모를 배신자를 대비하기 위해 한두개 정도만 빌릴 생각으로 물어봤을 뿐인데, 루안은 생각보다 많은 여분을 들고 있었다.
역시 컨셉에 미친 아드리안의 부하답다고 해야 할지.
“여기엔 제국쪽과 직접 밀거래를 하던 녀석이 있으니. 가능하면 내가 누군지 들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 도라도 저렇게 숨어있는 거고?”
조이는 구석 깊숙한 곳에서 쫑긋거리는 귀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저기 있었구나….”
세린은 그제야 도라가 어디에 있었는지 눈치채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야?”
“일단 루안이 알아 온 정보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루안? 그게 누군데?”
“아드리안 저하가 붙여준 마부 말이야.”
“아아. 그 눈치 없는 놈….”
조이는 며칠 전 야영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그 이후로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다.
“어쨌든 그와울이란 녀석. 왜 에나가 사라진 지 반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얌전히 있었나 했는데.”
무려 가고일 왕가의 공주, 에나가 납치되도록 모략을 꾸몄는데도.
반년만이 아니라.
게임에서도, 그리고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서도. 몇 번을 회귀해도 가고일이 지상을 침공하거나 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지하에서 그와울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좌를 차지하는 일 정도는 일어날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버님 때문에 계획이 생각보다 초반부터 어그러져 있었던 것 같아.”
“엥? 우리 아빠가?”
“아무도 그분이 보석 꽃을 챙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나 봐. 뭐, 정확히는….”
알트는 고개를 슬쩍 들어 탑 위를 올려다봤다.
“에나가 줬던 모양이지만.”
날지 못할 만큼 허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차라리 여왕의 후계자로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무래도 그녀에게 그 목걸이는 족쇄였던 모양이다.
“그와울은 원래 그 목걸이를 전달받아서. 에나가 인간에게 습격당한 증거로 내세울 계획이었던 것 같아.”
에나가 사라진 뒤에 그녀를 아예 찾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단지 그 수색대를 지휘한 게 그와울이었을 뿐.
거기서 놈이 제국과 한 거래가 어그러져 버렸다.
“그런데 그걸 우리 아빠가 들고 있었으니….”
“뭐 어떻게 뺏어 올 수도 없고. 그래서 그와울과 밀거래하던 스텐의 관리는 배째라를 시전한 모양이야.”
보석 꽃은 없어졌다. 그러니 니가 알아서 가고일의 왕좌를 뺏고, 지상과 전쟁을 벌여라. 그런 식으로 나와버린 모양.
덕분에 그 말을 전하던 통역사가 머리통을 잡혀 뽑힘으로, 그자가 그와울과 소통할 방법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루안이 이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블랙 대거의 암살자이자, 아드리안이 총애하는 수하 다운 유능함.
“아마 헤르만의 계획은… 제국과 연합의 전쟁이 시작되면, 연합 서부 쪽에선 가고일이 지상과 전쟁을 선포하는 그림을 그렸을 거야.”
동부는 제국이 휩쓸고, 서부는 가고일에 의해 초토화. 그게 헤르만이 그린 그림이었겠지마는. 역시 언제나 계획의 변수는 사람에게서 생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번 통수 먹은 그와울 입장에선 굳이 무리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지상과 전쟁을 선포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래서 그와울은 어부지리를 노리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걸 택한 것. 의외로 인내심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 인내는.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다 자멸하는 그때. 대륙의 남부만이 아닌 북부까지 모든 하늘을 가고일이 지배하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왕녀가 돌아왔고. 자기가 왕좌를 차지할 명분을 얻기 힘들어졌으니.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올 테지.”
“앗! 그럼 에나를 저대로 놔둬도 괜찮아? 괜히 위험해질 것 같은데!”
세린은 탑 위에 홀로 남은 에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봤다. 만일 그와울이 그녀를 죽이려 들어도 도망칠 곳이 없으니.
“그래서 오히려 등을 좀 떠밀어주려고.”
알트는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어쩐지 리자드맨의 손과 발을 그대로 잘라다 만든 느낌의 장갑과 장화를 꺼내들었다.
* * *
그와울은 문 앞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봤다. 발광 이끼의 빛에 기대어 살아가는 깜깜한 지하세계.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달과 태양이 비추는 창공이 아닌. 이런 좁은 굴에서 벌레처럼 날아다녀야 하는 비참한 현실.
그는 이런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때때로 당연하다는 듯 하늘을 만끽하고 있을 인간들이 무척이나 증오스러웠을 정도.
[그 인간 놈들….]
반푼이 왕녀 에나를 데리고서 돌아온 인간들을 떠올린 그와울은 이를 갈았다.
어딜 가든 인간이 문제였다. 100년 전 수많은 동포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자신의 계획이 계속 어긋나는 것도. 이 전부 인간이 문제.
콰앙!
분을 못 이긴 그가 주먹으로 문가를 후려쳤고. 덕분에 문이 조금 더 넓어졌다.
[인간 녀석들… 지상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머리통을 으깨어주마.]
하지만 곧.
그와울은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왕이 있는 도시에서, 왕녀의 은인인 그들을 살해해서 좋을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녀석들이 도시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갔을 때. 지금 그의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담아, 고기죽으로 만들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누그러트렸다.
[떨어져야 한다…]
헌데.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
그와울은 난생 처음으로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어떤 놈이냐!]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주먹을 뻗으며, 몸을 돌렸지만. 그곳은 그저 허공일 뿐이었다.
[환청인가. 신경이 곤두선 탓에 피곤해진 모양이군.]
찬찬히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이곳엔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구도 없다.
그렇게 확신했을 터이지만.
[그것은 숙명…]
다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그와울은 난생 처음 겪는 종류의 스산한 위협을 느끼고서, 벽에 기대어 둔 거대하고 둔탁한 검을 움켜쥐고서 다시금 주변을 두리번댔다.
[감히 어떤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라!]
허공에다 검을 한차례 휘둘렀지만. 공기를 찢는 파열음만 들릴 뿐. 검 끝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날지 못하는 새는…]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허나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으니.
[둥지에서 떨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
말하는 바가 무언가 의미심장했다.
허나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날지 못하는 새와 둥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왕녀! 지금 왕녀를 얘기하는 것인가?]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나 그에겐 목소리의 대답은 크게 중요치 않았으니.
[그러니 떨어져야 한다…]
그제야 그와울은 직감했다. 이것은 선조들의 목소리라고.
아직도 알껍데기에서 웅크리고 있던 어리석은 그를 다그치는 영혼의 목소리라고.
[둥지가 무너지게 전에…]
그들이 말하고 있다.
이제 알에서 깨어 나와 진정한 왕으로서 날개를 펴라고.
몰락해 가는 왕국을 구원하라고.
어느샌가 다시 고요해진 방안.
그와울은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고.
자신의 숙명을 깨우친 그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 * *
에나는 딱딱한 돌침대에 누워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이런 잠자리가 가고일의 전통이긴 하지마는, 역시 알트 일행과 함께하는 동안 누렸던 그 폭신한 잠자리가 조금 그리워지려는 참이었다.
[자고 있느냐.]
퍼득이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에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쩐 일로 자신의 방에 방문한 여왕의 모습에, 그녀는 살짝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아뇨. 그저 생각이 많아 잠시 누워 있었어요.]
[그래. 그간 오랫동안 고생을 했을 터이니, 걱정되어 찾아봤다.]
에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이 가고일도 걱정이란 걸 하긴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죄송합니다. 마마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그 얘기는 이제 됐다. 어차피 허황된 이야기나 다름없던 것이거늘.]
에나는 말없이 목에 걸린 보석 꽃을 만지작댔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그러한 말에, 가슴이 메어졌다.
하지만 그걸 원망할 자격이나 있을까.
그녀 자신도. 그녀의 호위들이 드래곤의 포효를 날려대는 사내의 손에 찢어 발겨질 때도. 두려움과 함께 마음 어디선가 안심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자신의 굴레였던 이 보석 꽃을 그에게 기꺼이 바치지 않았나.
물론 그 이후에 기다린 그녀의 운명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것이지마는.
[그렇지요. 애초에 모든 게 허황된 것이었습니다.]
또다시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에나의 방으로 한 사내가 날아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그와울. 부른 적은 없다만.]
여왕은 불쾌한 듯이 그 사내. 그와울을 노려보았다.
게다가 감히 왕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무장한 채라니.
[당신의 부름에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할 줄 알게 된 것이냐. 나가거라.]
[유감이지만. 이제 그대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겠소.]
그리고는 겁 없이 걸을 들이미는 그와울의 모습에, 여왕은 에나의 앞을 막아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미쳤구나… 여봐라! 뭣들 하느냐! 이자를 당장 잡아들이지 않고!]
여왕의 노성에 밖에서 대기하던 호위병들이 일제히 안으로 들어섰고. 그들은 둔탁한 창날을 겨누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느냐?]
반역자인 그와울이 아닌, 여왕을 향해서.
[그대에겐 충성을 맹세하고 싶었으나… 날지 못하는 여왕에게까진 충성하고 싶진 않소.]
[그와울…! 감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의 여왕의 근육이 점점 부풀어 올랐고, 그녀의 몸이 활처럼 퉁겨지듯 그와울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후웅!
그와울이 휘두른 둔탁한 대검.
비록 그가 날 옆으로 후려쳤을 뿐이나, 이미 그 자체로도 수십 킬로나 나가는 거대한 쇳덩이였고.
[쿠헉!]
[아악! 어머니!]
그것에 맞은 여왕은 옆구리가 꺾인 채 피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왕은 비틀거리며 기어가, 그와울의 발목을 붙들려고 했으나.
뻐억!
그마저도 녀석에게 걷어차여 바닥을 무참히 뒹구는 것으로 끝이 나야 했다.
[에나 왕녀. 자격이 없는 여왕의 후계자…]
[아, 아아….]
[너는 왕국을 무너지게 할 뿐인 존재다.]
에나는 자신을 향해 시커먼 손을 뻗어오는 그와울을 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저항할 만큼 힘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자비로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크흑!]
그와울은 에나의 목을 움켜쥐고서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발을 버둥거리며 힘겹게 날갯짓했지만, 그저 소용없는 발버둥이었고. 그와울은 그런 그녀를 들고 문가로 향했다.
[그대의 자격을. 한번 증명해봐라.]
발판이 없는 허공을 향해 들어올려진 에나.
그녀의 목을 움켜쥔 그와울의 손가락이 풀려버렸고.
[안돼! 에나아!]
여왕의 절규와 함께, 날지 못하는 왕녀의 몸뚱이는 그대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