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룸메이트 (4)
엠브라 왕성에선 출병을 앞두고서 군사 회의가 한창이었다.
원래 게임에선 주인공이 참여하는 자리는 아니었고, 세린은 새집에서 짐 정리할 시간도 필요해서 내버려 뒀지만.
그래도 현재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해두고 싶던 알트는 이번에는 정식으로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회의에는 연합의 다른 나라에서도 최소 지휘관급의 인물들이 참석해있었는데, 알트에게 제법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다만 참석이 조금 의외였던 건 일전에 브레머에서 만난 적 있던 스바로프.
저번 연합회의에선 불참했던 그였지만, 어쩐 일로 이번 군사 회의엔 직접 참여해 있었다.
다만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는데, 그 이유의 대부분은 어딜 가나 이런 자리에서 절대로 빠지는 법 없는 인물에게 있었다.
“아니 이봐 황금가면. 그러니까 누구는 군대가 남아돌아서 참전하는 거냐고? 임프리스는 대체 무슨 배짱으로 돈을 받아먹겠다는 거야?”
“물론 검은 깃 기사단은 대의를 위해 움직이리다! 허나. 용병대만큼은 황금의 원칙에 따라주셨으면 하는 바이오니, 부디 양해해주기를.”
“하여간 이 시커먼 놈들은! 이 동네에서 원칙은 무슨 원칙이야?”
스바로프와 아드리안의 투덕거림에 알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검은 깃 기사단은 지원해주겠지만 임프리스의 용병대까지 움직이게 하려면 돈을 내놓으라는 게 아드리안의 입장이지마는.
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군대를 내어준 연합의 다른 국가들의 빈축을 사기에 딱 좋긴 했다.
다만, 용병대 자체는 사설 단체이니만큼, 아드리안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긴 했다.
단지 군대가 필요할 때 용병대를 고용하여 활용하는 임프리스의 방식이 조금 독특할 뿐이지.
“이봐 붉은 이리. 저 지랄 때문에 이 자리에 지갑 좀 두둑한 녀석들만 부른 거야?”
“흠. 굳이 그럴 의도는 아니었네만. 어쩌다 보니 그리됐구먼.”
스바로프는 어째 비아냥거리는 태도였지만, 오즈월드도 어쩔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이렇듯 묘하게 날 선 분위기에 회의를 진행하던 오웨인도 난처해하는 얼굴로 알트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본 알트는 그저 웃을 뿐이었지마는.
“적어도 돈 걱정이라면 붙들어두세요, 스바로프, 임프리스의 용병대를 고용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첼소어에서 지불 할 테니까요.”
“흥! 하여간 우리 붉은 이리가 딸 시집은 잘 보냈다니깐.”
“그 대신 용병대의 지휘권을 저희가 가져가는 것엔 이견이 없으시겠죠?”
“그래 뭐. 간당간당하게 생명줄 붙들고 있는 첼소어에서 그 돈을 내준다면 댁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어째선지 첼소어를 대표하여 이번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오즈월드의 막내딸 이자벨이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녀가 온 이유가 짐작되기는 했다.
전쟁에는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드는 법이고, 이자벨이라면 첼소어의 자금을 움직일 영향력이 충분히 있으니까.
“그보다 애당초 저 망할 황금가면 녀석은 연합이란 단어의 뜻을 알고 있기나 한 거냐고!”
“당연히 알고 있다네. 하나의 이념으로 하나 되어 뭉치는 것. 그것이 연합이 가진 숭고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걸 아는 놈들이 자기들 좋을 대로만 구는 거냐고!”
스바로프는 아드리안의 대답을 도발로 받아들인 걸까.
결국 그는 자신의 앞에 있던 잔을 아드리안을 향해 집어 던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스릉
허리춤의 검을 뽑아 아드리안을 향해 겨누었다.
“스바로프 경. 이건 서로 싸우실 일이….”
“외부인은 빠져! 이건 우리들 문제니까!”
오웨인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금 알트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이자벨이 선물로 가져온 차의 향미를 즐기고 있었다.
“이보게 스바로프. 오웨인 이 친구는 내 손님이기도 하니 너무 무례하게 굴진 말았으면 하는데?”
게다가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이제 슬슬 오즈월드의 심지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물론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알트로선, 스바로프가 아드리안의 태도에 저렇게까지 열을 내는 것도 이해는 됐다.
브레머의 군대는 사실상 전력으로서는 크게 기대할 수준은 못 됐지만, 엠브라에서 오버델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담당하는 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브레머는 사실상 이번 전쟁에 있어 경제적 지원이 주가 되는 나라.
그런 상황에서 임프리스는 아예 돈을 벌어가고 있으니, 그 모습이 썩 좋게 보일 리가 없을 터.
“애초에 임프리스라면 이번에 터진 사태들을 미리 막을 수 있었던 거 아냐? 우린 하마터면 광산이 죄다 매몰될 뻔했다고!”
스바로프는 이번 회의와는 관련이 없는, 연합 진영 곳곳에서 파괴 공작들을 펼친 침묵의 경비대 이야기까지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막아내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대들의 운명이 그것을 바랐던 것일 터!”
“이 자식이 진짜 누굴 놀리나!”
발끈한 스바로프가 탁자를 박차고서 뛰어올라 아드리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투우사처럼 망토를 날리며 빙그르르 돌아 우아하게 검을 피해내더니. 어느새 뽑아든 그의 검이 스바로프의 턱밑에 닿아있었다.
“이런. 백여 년을 닦은 검술이 삼십 년에 뒤처지는 건 이 얼마나 구슬픈 일인가?”
“빌어먹을 광대 자식이! 낯짝을 구워 먹었더니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나! 뭐 운명? 네놈의 방만 때문에 하마터면 우리는 유일한 밥줄이 끊길 뻔했다고!”
“맹세하지. 만일 그러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이어졌을 걸세.”
“지랄한다! 망하고 난 뒤에 복수 해줘 봤자 누가 좋대?”
그렇게 스바로프는 검이 턱밑까지 들이밀어진 상황에서도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 상태에서 과감하게 검을 휘둘렀고.
아드리안은 약 올리듯 검 끝으로 스바로프의 뺨을 톡 때리는 동시에, 그의 검을 슬쩍 피해냈다.
“붉은 이리 댁도 그래! 명색에 연합의 맹주라는 양반이 언제까지 저 시커먼 자식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닐 거야? 알고 보니 이리가 아니라 그냥 개새끼였나?”
“이봐 스바로프. 한 몇백몇 살았더니 슬슬 사는 게 지겨워졌나 보지?”
게다가 이제는 겁 없이 오즈월드에게까지 싸움을 걸고 있으니. 오웨인은 아주 기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마는.
알트의 표정은 온건하기 그지없었다.
“회의가 슬슬 다른 길로 새는 것 같은데. 슬슬 얘기들 정리하시고, 본론으로 좀 들어가는 건 어때요?”
그런데 웬걸.
알트가 한마디 내뱉자, 조만간 참상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던 회의장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스바로프 그대는 이번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그림자 속에 숨은 위협들을 뿌리 뽑고 싶은 게로군?”
“그래. 우리 광산은 우리 유일한 밥벌이니까 좀 봐달라고. 게다가 이번 전투는 지역적으로 우리가 뭔가 얻기는 조금 애매하잖아? 그런 부분에서라도 이득을 좀 가져갔으면 싶거든.”
“그렇다면 약속하리다. 우리의 승전보와 함께, 그대의 숨은 근심 또한 사라질 것임을.”
“어차피 그 침묵의 경비대인가 하는 놈들은 이번에 제법 잡혔는데. 내놓는 김에 그 광신도 녀석들에 관한 정보도 좀 뱉어놓는 게 어때?”
갑자기 천연덕스럽게 거래를 주고받은 아드리안과 스바로프의 모습에, 이런 급반전된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한 오웨인은 멍하니 벙찐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사실 연합의 군사 회의에선 이런 분위기가 오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초반에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들의 불만이나 요구를 솔직하게 밝히고. 이후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가며 타협점을 찾아가는 게 연합의 방식.
“원래 가식 없이 나누는 진솔한 대화야말로, 연합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비결이죠.”
그러한 알트의 설명에 오웨인은 어이없어 넋 나간 표정이 됐으면서도, 이내 곧 무언가 고심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그럼 이제 다시 작전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찌 됐건, 험악해졌던 분위기가 한차례 정리되자 오웨인이 헛기침하며 회의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은 벽면에 걸어둔 거대한 지도로 향했다. 지도의 그림까지 직물로 짜인 태피스트리로 나름 사치스러운 물건.
현재 세우고 있는 작전의 최종 목적은 제국 최남단의 도시 라이홀드 공략.
라이홀드가 속한 뉴필드 지방은 제국을 대표하는 황금 사자 기사단의 본거지인 그레이힐이 위치한 지역이기도 했고.
드넓은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어, 밀알이 여문 이 시기에 빠르게 공략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라이홀드는 해안을 끼고서 첼소어와 불과 백여킬로 정도 떨어진 도시. 아무리 제국의 해군력이 약하다 해도 첼소어에겐 지상과 해상 모든 방향에서 위협이 되는 상대였다.
물론 알트에게 제일 중요한 건 첼소어 비단이 문제없이 생산되고 수출되는 일이긴 했지마는.
“앞서 한차례 말씀드렸지만, 이번 전투의 승패는 8할이 여기서 결정된다고 봐도 무관합니다.”
오웨인이 그렇게 말하며 지휘봉으로 가리킨 지점은, 뉴필드 지방과 연합의 경계를 이루는 강 유역.
현재 확인된 바로는 제국의 군대가 강 건너편에서 임시 요새를 구축해 주둔하며 다시금 첼소어 공략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적의 규모는 대략 3만으로 추정됩니다. 원래라면 우리 쪽 병력의 배가 넘으니 평원전투는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만.”
그렇다고 저 병력이 첼소어로 진군하게끔 놔둘 수도 없었으니, 이 몇 차례의 공성전으로 첼소어는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이들을 요격해내지 못하면 이 전쟁은 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여기서 승리만 한다면, 라이홀드를 함락시키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그래서 문제는 두 배나 되는 병력을 어떻게 이기냐는 거지.”
스바로프는 턱을 괴고서 심드렁한 눈빛으로 오웨인을 바라봤다. 그는 이런 당연한 얘기나 나누자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니었다.
오웨인도 마찬가지로 당연한 소리나 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었을 테고.
“전쟁은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해도 결국은 머리싸움입니다. 지휘관이 없으면 3만이든 10만이든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하겠죠.”
“그러니까 적장을 머리를 먼저 노리겠다? 말이야 쉽지만, 블랙 대거가 움직여줄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꼭 블랙 대거에만 우수한 암살자가 있는 게 아닙니다.”
오웨인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의 얘기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제법 흥미로워하며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알트는 괜히 여러모로 클라우스의 때가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학습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닐 텐데.
부디 또 어디서 수상한 사람과 접선을 시도하는 것만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 또 퀘스트 흐름이 살짝 바뀌었어.’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겪는 대규모 전투인 라이홀드 공성전.
그리고 그 첫 번째 페이즈라고 할 수 있는 트위드 강 전투는, 원래라면 주인공이 별동대를 데리고서 후방 침투를 하여 지휘관을 쓰러트린다는 흐름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예 사전에 지휘관을 암살하는 방향으로 잡히고 말았다.
“어찌 됐든 제발 우리 브레머의 군대가 개죽음당하는 일만 없게 해줬으면 좋겠어. 얼마 되지도 않는 거 힘들게 긁어모아 왔다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실력은 제가 보장합니까요.”
대체 어디서 실력 있는 암살자를 구해온 건지 오웨인은 그자를 향해 꽤나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알트는 물론, 회의에 참석한 인원들이 꽤나 흥미를 보이고 있을 때.
“제법 유능한 친구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한 일화만 해도….”
오웨인은 그렇게 자신이 추천하려는 암살자의 업적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암살단을 역으로 암습하여 쓰러트린 일화라거나, 제국의 주요 군사시설에 몰래 침투하여 정보를 빼 오는 동시에 파괴 공작까지 벌이는 등.
한두 군데 정도는 과장이 섞여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런 믿기 힘든 업적을 줄줄 읊어댔고.
‘가만! 이거 나잖아?!’
그제야 알트는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처구니없어하는 눈빛으로 오웨인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감과 신뢰감을 동시에 내비치는 오웨인의 눈빛.
거기서 무언가 눈치챘는지 아드리안은 할 말이 많은 듯한 시선을 알트에게 보내왔고. 이에 알트는 그에게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야.
오웨인이 자랑하는 알트 본인도, 블랙 대거 소속의 암살자이자.
빌레르의 열번째 사도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