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죗값 (3)
어느샌가 갈레스의 경비병들이 알트 일행의 주변으로 모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겉보기엔 여성으로만 구성된 일행이다 보니, 대놓고서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도망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다리와 계단 등을 막아서며 적당히 거리를 둔 채 포위했다.
‘……흠.’
알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작정하면 저들을 뿌리치고 도망치는 일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그와 세린은 변신 물약으로 모습을 바꿨으니 뒤탈은 없을 것이고.
거기다 조이와 아라네아는 이 지역과 크게 연이 없으니, 수배되거나 해도 본인들이 크게 개의치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진짜 범인을 찾아내란 거죠?”
“뭐, 물론 다른 범인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경비병이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었지만.
알트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자로서는 겨우 캐트시 한 마리만 처리하면 손쉽게 끝날 일을 번거롭게 만드는 짓에 지나지 않겠지만.
진범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알트로선, 녀석을 참교육시킬 마음으로 가득했으니까.
“흥. 두고 보세요. 제가 친히 그 교활한 도둑놈을 잡아다 드릴 테니까요.”
“이봐, 아가씨. 괜히 시간이라도 어찌 끌어볼 속셈이라면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시간 낭비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알트는 자신을 향해 코웃음 치는 경비병을 지그시 노려보다 휙 돌아섰다.
‘시간은… 얼마 없군.’
변신 물약의 유효 시간도 있지마는, 문 게이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괜히 지체할 수는 없으니.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세 시간 정도.
“좋아. 그렇다면 아가씨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만. 그래도 고양이는 일단 이쪽에 넘겨.”
“하… 진짜.”
뒤를 돌아본 알트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조금이라도 타협할 생각 없는 경비병의 태도에 슬슬 그의 머리에 열이 올랐다.
도라도 잔뜩 겁을 먹고서 알트의 뒤에 꼭 숨어 달달 떨고 있는 그때.
“도라 걱정은 마. 내가 같이 있을게.”
아라네아가 다가와 도라의 머리를 쓰다듬자.
알트의 미간이 슬핏 풀렸다. 그녀가 같이 있어준다면, 도라를 경비병들과 함께 남겨놓더라도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미안. 부탁할게.”
“그래. 도라는 함부로 못 건드리게 책임지고 지킬 테니, 당신은 언제나처럼 기적을 보여주고 와줘.”
한편.
경비병들은 아라네아가 남겠다는 결정에 내심 안심하는 듯한 눈치였다.
‘멍청한 것들.’
물론 조이와 세린의 위협적인 외형에 비하면 아라네아는 그저 무해해 보이겠지마는.
실상은 저 힘센 여자들보다 훨씬 위험한 상대. 혹 도라를 위협하거나, 강제로 끌고가려 한다면. 아주 매운맛을 보게 될 터였다.
한숨을 내쉰 알트가 도라를 내려다보았다.
‘도라를 알아보고 보복하려 했다기보단… 역시 예전 버릇을 못 버린 거겠지.’
도라의 전주인은, 당연히 알트의 사업 계획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자신이 실직 위기였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을 터.
“얌전히 요리사 일에 만족하며 살 인간이었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그저, 캐트시를 보고는 예전에 쓰던 수법을 써먹어보려 했겠지만.
알트가 이 도시에 있고, 목표로 삼은 캐트시가 도라라는 것은 그에게 아주 큰 불행이 될 예정이었다.
“알트, 범인을 알아? 그럼 바로 족치러 가자!”
가까이 다가온 세린이 경비병의 눈치를 보며 소근거렸다.
하지만 알트는 고개를 바로저었다.
‘놈이 예전의 수법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녀석을 추궁해봤자 의미는 없어.’
분명 장물을 숨겨놓았을 테니까.
캐트시의 주머니는 타인이 열어보거나 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장물의 행방이 묘연하다면 캐트시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는 논리를 무기로 삼았으니.
도라의 전주인이 도둑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바로 그 장물의 은닉처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
솔직히 목격자일 그 사내가 전과자라는 사실을 경비병이 모를 리가 없는데, 그의 증언을 너무 쉽게 믿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니 알트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뜻인데.
“저기 혹시. 목격자에 대한 건 조금도 알려주실 수 없나요?”
“신원은 알려줄 수 없지만, 그의 증언 정도는 말해주지.”
“아뇨. 그보다 일단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증언인지가 궁금하거든요.”
알트의 질문에, 경비병이 멈칫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대규모 탈옥 사건을 막은 공로가 있는 신고 정신이 투철한 시민이니, 신뢰라면 문제없어.”
“아….”
믿기 어려운 말에 좀 더 캐물으려던 알트는 세린을 흘끗 쳐다봤다.
탄성을 내뱉은 걸 보니, 경비병의 대답을 듣고서 뭔가 기억나는 게 있는 모양인데.
일단은 그녀부터 털어보아야할 듯 싶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도둑이 든 집을 살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음. 시간이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도둑놈을 잡기 위해서라면 감독관님도 아량을 베풀어주시겠지.”
“그럼 안내를 부탁드릴게요.”
마지막으로 도라의 손을 한 번 꾹 잡아준 뒤.
알트와 세린, 조이 이 셋은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브라이햄 감독관의 집으로 향했다.
.
.
.
“그러고 보니, 세린이 너 아까 뭔가 아는 것처럼 굴던데.”
“응? 아아. 그게 있잖아….”
가까이 다가온 알트가 아까의 일에 대해 질문을 던져오자, 세린은 앞서가는 경비병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폈다.
그리고는 알트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게 실은 감옥에 있을 적에 매번 반복됐던 일 중 하나였거든. 그 동굴이랑 이어지는 구멍 때문에, 죄수들이 합심해서 탈출 계획을 세웠었어.”
“흠. 그런데 그걸 도라의 전주인이 간수에게 밀고했다?”
“으음. 배신자라고, 엄청 욕먹던 사람이 있긴 했어. 아마도 그게 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다른 죄수들이 벼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석방되어서 다들 난리 났었거든.”
“아아. 그래서 그렇게 일찍….”
“여튼 그 이후로 죄수들끼리 눈에 쌍심지 켜고 서로를 감시하고. 하…. 다시 생각해도 답답해서 숨 막힐 것 같아.”
세린의 얘기를 듣던 알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가. 죄수끼리의 상호감시를 유도할 선례를 만들어둔 거였네. 브라이햄 감독관은 정작 그렇게 써먹고 요리사를 바로 버린 모양이지만. …넌 그게 매번 반복되는 데도 같이 탈옥할 생각은 안해봤냐?”
“…크흠.”
고개를 팩 돌린 세린이 바로 조이의 옆에 찰싹 붙었다.
혀를 끌끌 차던 알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라의 전주인이 무전취식하고 있던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나.
간 크게 감독관의 집을 턴 것도 그것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감독관으로서는 죄수에게 사면을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은혜를 베푼 것이겠지마는.
‘그런 작자는, 그 뒤로 케어해주지 않았다며 앙심을 품을 만도 하지.’
“이봐 아가씨들. 여기가 브라이햄 감독관님 댁이다. 모쪼록 실례하지 않도록 조심해.”
세린에게서 광산 감옥에서 벌어졌던 일을 전해 듣는 사이, 어느덧 도착한 감독관의 집.
외관부터 둘러보니, 역시나 이 도시의 실세가 사는 곳답게 화려함을 자랑하는 저택이었다.
굳이 원한이 없다고 하더라도 도둑이라면 충분히 노리고도 남았을 그런 장소.
정문에 선 경비병이 문고리를 두드리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낮에 든 도둑 건 때문에 추가로 조사가 필요해서 들렸소만. 브라이햄 감독관님은 댁에 계시오?”
“아, 그렇군요. 주인어른이라면 마침 조금 전에 귀가하셨습니다.”
저택의 하인으로 보이는 노인은 곧바로 문을 열어 경비병과 알트 일행을 들여보내 주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도착하자, 꽤 사치스러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래도 브라이햄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걸 즐기는 부류의 인물인 모양인데.
“흐음. 별로 도둑이 든 집처럼은 안 보이네요.”
알트의 짧은 감상에, 일행을 안내해주던 늙은 하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죄송하지만, 저 아가씨는?”
“음. 그게 말이지.”
경비병은 하인에게 알트 일행이 함께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하인의 눈빛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가씨께선 그 고양이가 정말로 결백하다고 믿습니까?”
“네. 그리고 정말로 캐트시가 도둑이었다면, 저 물건들조차도 남아나지 않았을 텐데요?”
알트의 날카로운 지적에 하인과 경비병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그들도 캐트시의 주머니에 물건이 하염없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이 사건 현장은 캐트시가 범인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는데.
“그 얘기는 조금 비약적이네, 아가씨. 단순히 시간이 부족해서 값비싼 것 위주로만 챙길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야.”
슬쩍 분위기가 바뀌려는 순간.
한 중년 신사가 응접실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며 알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다.
“아, 주인어른. 그러니까 이분들은….”
“아까 밖에서 대강 들었으니 굳이 소개는 됐네.”
브라이햄은 설명하려는 하인의 말을 끊고는, 찬찬히 알트 일행을 관찰했다.
“그래서 아가씨들은, 그대들이 기르는 고양이가 결백하단 걸 증명하고 싶다고?”
“그래요. 게다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감독관께서도 내심 그걸 바라고 계실 것 같은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브라이햄의 질문에 알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진짜로 범인이 캐트시라면 도둑맞은 물건을 영영 못 찾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던 걸까.
그 말에 무뚝뚝하던 브라이햄의 표정이 일순 흐트러지며 감정적 동요를 보였다.
알트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그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도둑 맞은 물건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감히 짐작해보건대. 그저 값비싼 물건… 감독관님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물건이 없어진 듯하군요.”
“…제법 확신하는 것 같군.”
“도둑은 입구에서 가까운 응접실의 물건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니까요. 이토록 값나가는 물건이 많은데도요….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요?”
범인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으니까.
알트는 유능한 상인답게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이곳에 장식된 물건들을 재빠르게 견적을 매긴 지 오래였다.
이 방에 장식된 물건값만 합쳐도 이런 저택 한 채는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평범한 도둑이라면 이곳을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역시, 도둑이 든 장소는 감독관님의 방이 아닌가요?”
“그건 맞췄다만. 그게 도둑을 잡는 것과 관련이 있나?”
“있고 말고요. 도둑이 이 저택에서 침입하기 쉬운 장소를 내버려두고, 감독관님의 방이라는 어려운 곳을 고집한 데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알트는 확신을 담은 채 브라이햄을 바라보았다.
굳이, 특별히 보안에도 신경을 쓸 방에 침입한 것은.
‘어딜 봐도 수상하지.’
“그러니까 이 사건은 평범한 물욕에 더해. 개인적인 원한도 함께 느껴지는 것 같단 말이죠. 그런데 그게 난생처음 보는 캐트시에게 있다고 보시나요?”
알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브라이햄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브라이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을 괴리감.
다만,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린 분노로 잠시 판단력을 잃고서, 눈이 돌아간 것은 아닌지.
그가 직접 깨달을 수 있도록.
“…그래서 아가씨는 내게서 뭘 원하는 건가? 설마 이대로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풀어달라고 요구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요! 저는 약속대로 진범을 잡아서 저희 아이의 결백을 증명할 겁니다.”
묘한 얼굴의 브라이햄이 말을 꺼낸 순간.
알트의 환한 얼굴에, 그와 마주하던 감독관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다만… 잃어버리신 소중한 물건을 찾아드리는 대신. 범인의 신변을 제게 양도해주셨으면 할 뿐이죠.”
매끄러운 말투에, 공손한 태도.
하지만 알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며, 저 멀리 있는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