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등가교환 (4)
메이지 길드의 함락 소식은 제국만이 아닌 연합의 사람들에게도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차라리 어떠한 군세에 무너졌다면 모를까, 거의 천재지변에 가까운 재앙이 동반된 이번 사건.
그런 굴지의 마법사 집단조차 막아내지 못한 재앙의 존재가 또 어디를 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온 대륙의 사람들에게 퍼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으음. 그렇다고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알트는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를 보다 작게 신음했다.
최근, 하루가 멀다고 그레이힐에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버린 탓이다.
보나마나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메이지 길드의 참변.
쓴웃음 짓는 알트의 뒤로 루안이 다가와 또 새로운 서류 더미를 한 뭉치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사람들 사이에선 알트 님이 관리하는 여기 그레이힐이 가장 안전한 도시로 여겨지게 된 모양입니다.”
“참 기묘한 일이네요.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언데드에 의해 시민이 몰살당한 도시가, 지금은 가장 안전한 도시라니.”
“도리어 알트 님이 그 언데드를 몰아내심으로써 능력을 증명하신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알트는 루안이 가져다준 새로운 서류 뭉치를 들여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그레이힐의 부흥은 좋은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잘 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도시 행정에 신경 쓰느라 다른 걸 신경 쓰지 못하게 되면 곤란하다.
“그나저나 자유도시 그레이힐이라니. 일단은 여전히 제국의 영지인데 참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네요.”
“알트님, 제국 얘기가 나온 김에 말입니다. 조만간 감찰관이 내려올 예정인 모양입니다.”
“아니, 벌써요? 아직 도시 기반 시설이라던가 손볼 게 많이 남아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여긴 이미 어지간한 도시들의 수준을 아득히 넘었습니다.”
실소를 머금은 루안의 대답에 알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불과 몇 주 전의 끔찍한 광경을 생각하면,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한 현재의 모습은 기적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알트의 눈에는 아직 손봐야 할 곳이 많이 남았지마는.
똑똑똑
노크 소리에 알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봤다.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것은 보기 드물게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한 아라네아였다.
알트의 사무실에 선객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어머, 가면 씨도 여기 계셨네?”
“혹시 방해된다면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딱히 알트와 은밀한 얘기를 속삭이려고 온 건 아니거든.”
아라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서류 뭉치를 팔랑거리며 보여줬다.
바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알트의 모습에도, 그녀는 매정하게도 책상에 쌓인 서류 더미의 높이를 조금 더 높여주었다.
“자, 이번 분기 회계장부를 간략하게 정리한 자료. 요즘 성주 노릇 하느라 바쁘시지만, 상회 일도 잊지 말아줘. 우리 상회장님.”
“…수고 많았어. 고마워.”
“하아, 정말이지. 발랴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어. 거기에 있었다면 재수 없는 할멈 보는 것만 빼면 다 괜찮았는데 말이야.”
아라네아는 그녀의 눈가를 마사지하듯 문지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애초에, 잘 지내던 아라네아까지 이곳으로 끌고 온 원흉이 바로 알트.
지금 당장 탈주하지 않고 돕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최대의 호의를 베풀고 있는 셈이었다.
다만 알트가 가장 솔선수범하며 제 몸을 갈아넣고 있기에 툴툴대는 것으로 넘어갈 뿐.
순간.
아라네아의 눈빛이 번뜩였다.
“잠깐만! 당신! 대체 뭘 읽고 있는 거야?”
“아…. 이런.”
재빠르게 서류 더미 아래에 깔려있던 고서적 한 권을 낚아채듯 빼간 그녀.
미간을 찌푸린 아라네아가 알트를 향해 일갈했다.
“역시나! 이거…. 네크로맨서 학파의 마법서잖아?”
“아하핫. 역시 아라네아야. 눈썰미가 좋은데?”
“웃으면서 얼버무리지 마! 정말이지 당신…. 이쪽은 손대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어?”
알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라네아의 창백한 청회색 피부가 불그스름해질 정도로 흥분하는 건, 칼리고스의 부활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나름 정통파 마법사인 그녀에게 있어서 사령술이란 금기 중의 금기.
하지만 이쪽도 이쪽의 사정이랄 게 있는 법이다.
“워워, 진정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그냥, 로시르에게 대항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당신이 잊혀진 옛 지식에 환장하는 걸 뻔히 아는데, 그런 핑계는 안 통해.”
“걱정 마. 해도 될 짓과 아닌 짓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고.”
아라네아가 지그시 노려보자, 알트는 서류를 읽는 척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사령술을 배우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오랫동안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저 책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된 건, 도라의 주머니 안에 잠들어있는 윌리를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으니까.
“하, 그래. 당신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애당초 말린다고 말 들을 사람도 아니고.”
제대로 된 알맹이 하나 없이, 뭉뚱그려 내놓은 해명이었지만.
아라네아는 체념한 듯 고개를 내저으며 고서를 알트에게 내밀었다.
“잘 생각해봐. 그 메이지 길드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그리고 로시르가 되살린 재앙들이 녀석들의 주 전력이니, 사령술의 연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야.”
“하지만 그놈은 여러모로 이상해. 사령술이란 게 그런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학문이 아니란 건, 알트 당신도 알고 있잖아.”
“뭐, 그건 로시르가 대단한 걸 수도 있겠지만….”
아라네아의 예리한 지적에 알트는 사령술의 지식이 담긴 고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도 그게 궁금해.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최근 시간 날 때마다 이 책을 몇 번이고 탐독했음에도, 보면 볼수록 꼬리에 꼬리를 문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양한 학파에 상당한 지식을 자랑하는 알트, 그조차도.
사령술에 대해 이해할수록 오히려 과거의 빌런들을 어떻게 되살려낸 건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기본적으로 네크로맨서 학파의 마법은 시체를 매개로 한 소환술에 가까워.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라면 모를까. 옛 재앙들처럼 오래된 죽음이라면 효율이 극히 떨어지기 마련이지.”
“흐음. 하지만 메이지 길드의 일을 보면… 재앙들의 전상기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갖고서 부활한 모양이던데?”
“그래서 내 생각엔, 옛 재앙을 되살려내는 데엔 사교도의 주술도 함께 들어간 것 같아.”
알트는 확신어린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렇다면 사령술의 지배자 로시르가 말락에게 고분고분 협조하는 이유도 이해된다.
녀석의 도움 없이는 그 옛 재앙들을 컨트롤할 수 없을 테니까.
“그, 그러면 당신 설마… 네크로맨서 학파의 마법에 이어서, 사교도의 주술까지 연구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런.’
알트가 잠시 고민에 잠긴 사이.
아라네아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휘휘 저은 알트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는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깔린 희망을 끄집어내겠답시고, 재앙의 뚜껑을 열어버리는 멍청이는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 마. 내가 고민하는 쪽은, 로시르와 말락을 어떻게 이간질할 건 지니까.”
“…그것참, 당신다워서 되려 안심되네.”
‘물론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런 알트의 속셈도 모른 체.
그제서야 아라네아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그의 사악하기 그지없는 계획에 일견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는데.
“그러면 다른 한쪽은?”
“다른? 아, 셀레나 말이구나.”
“그래. 듣자 하니 그 사랑에 눈멀어 타락한 영웅 씨도 그리 만만치 않은 상대라며?”
“확실히 그렇지. 그래도 밤이 아니라 낮에 상대한다면 어찌해볼 만하긴 한데.”
하지만 셀레나가 자신의 약점인 낮 시간대에 일부러 나타날 리가 없다는 게 문제.
아직 거기까지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에 빠지려던 순간.
등 뒤의 창문을 통해 바깥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그것도 탄식과 비명이 섞인 묘한 술렁거림.
“어머나. 밖에 무슨 일이래? 뭔가 소란스러운데.”
“뭐, 사람이 이만큼 늘어났으니까. 문제가 생길 때도 되긴 했지.”
알트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구경꾼처럼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가운데엔 무언가 서로 대치 중인 사람의 모습이 보였는데.
“어…?”
알트는 두 눈을 깜박이다 몇차례 눈을 비볐다.
“당신 왜 그래? 대체 뭘 봤길래?”
이에 곁으로 다가와 창밖을 내다 본 아라네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선은 세린과 조이의 모습이 보였고, 그녀들은 누군가와 마주하고서 강한 적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누구지? 저 두 사람이 왜 저렇게까지 날이 서 있는 거래?”
“그 사람이야….”
“응? 누구?”
“셀레나. 그 문제의 옛 영웅 말이야.”
그렇게 대답하는 알트의 얼굴에는 씁쓸함과 당혹감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 * *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 세 여자가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를 찢어버릴 기세로 노려보는 조이.
그리고 앙칼진 눈빛으로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는 세린.
하지만 반면에 셀레나는 그저 난처해 보이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저번의 일은 미안해요. 그땐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땐? 이봐 언니. 지금은 마치 달라졌다는 듯이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정말이에요. 당신들과 싸울 생각으로 여길 왔다면, 이 시간에 오지도 않았어요.”
셀레나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펴 보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기다 언뜻 보기에 그녀는 비무장 상태이기까지.
여러모로 싸우러 온 사람의 모습은 아니긴 했다.
“언니? 저 사람… 진짜로 저희랑 싸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하? 너 저 모기 년이 하는 말을 믿어? 우릴 한번 속이고 두 번은 안 속일 것 같아?”
세린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조이는 셀레나를 향한 적대심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간, 당장에라도 머리를 두 쪽을 내겠다는 듯 도끼를 쥔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가고 있었으니.
“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 그녀들의 뒤에서 들려오는 알트의 목소리.
그는 제법 다급히 달려왔는지 숨이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그동안 잘 계셨나요, 알트 씨.”
“솔직히 반갑다는 인사는 하기 힘들다는 건 아시죠?”
그렇게 도착한 알트 역시 셀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한때 영웅으로 불렸다 한들, 그녀가 한 행동들은 쉽사리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를 아는 셀레나는 서글픔이 묻어난 쓴웃음을 짓고서는 거리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인간들의 빠른 변화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이 도시를 재건하다니. 역시 당신은 기적을 불러오는 재주가 있나 보군요.”
“그렇다고 당신들이 학살한 수만 명의 사람을 되살릴 기적은 부리지 못하지만요.”
“그 일에 관해선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알트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검을 뽑아 들었다.
대체 셀레나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약점을 감수하고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낮인 지금이 그녀를 쓰러트릴 절호의 기회.
“당신도 저와 싸울 생각이신가요?”
“지금이 아니면 힘들 테니까요.”
“…그러면 적어도 제 얘기 정도는 들어주실래요?”
알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설마 밤이 오기까지 몇 시간 동안 얘기를 하며 시간을 끌겠다는 건 아닐 테고.
낮의 셀레나라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목을 칠 수 있으니, 얘기 정도는 못 들어줄 것도 없을 터.
무엇보다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한들, 그런 것에 휘둘릴 알트가 아니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음, 그건….”
셀레나는 곧장 입을 열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세린과 조이가 대치하고 있을 때부터 모여있던 구경꾼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일단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일단 따라오시죠.”
알트는 셀레나를 노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그제야 적개심을 살짝 거두며 옆으로 물러나는 세린과 조이.
셀레나는 그 와중에도 검을 거두지 않은 알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그를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