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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NPC는 리셋이 싫다-209화 (208/282)

209. 공무원 (2)

그레이힐 성을 방문한 감찰관은 양 눈썹이 서로 붙을 만치 미간을 좁힌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가죽 표지로 갈무리를 해놓은 서류 더미가 잔뜩 쌓여있었다.

그 내용들은 제법 여러 가지였다.

우선은 이전 시민들의 유산에 관한 처분 기록이 이번 감찰의 핵심.

마땅한 상속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는 국고 환수가 원칙이다.

“흐으음….”

다만 로시르의 습격으로 발생한 재산 피해가 상당했던 만큼, 그걸 악용해 횡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

그렇기에 그 투명성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도시 복구사업에 들어간 예산과 계획표였다.

그것은 곧 도시가 얼마나 물리적으로 파괴되어 있었는지의 좋은 지표였으니까.

“이건… 조금 경이로운 수준이군요. 이렇게까지 모든 걸 정확하게 기록해두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직업병이라서 말이죠.”

서류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감찰관이 넋 나간 표정으로 알트를 바라봤다.

이 자료들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파괴와 복구가 아니었다.

이 눈앞의 상인은 복구를 넘어 도시의 상당 부분을 업그레이드했는데, 흠조차 잡기 어려울 만큼 그런 부분에 대한 기록까지도 철저하게 남겨놓은 것이다.

다시 고개를 떨군 감찰관은 잇새로 감탄어린 신음을 흘렸다.

도시의 복구와 새로운 인프라의 확충.

앞으로 세수의 근원이 될 이주민들의 호구조사.

그리고 이 모든 정책을 증명하고 지지하는 방대하고 정확한 자료들까지.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로, 감찰관이 보기에 아주 아름답고 예술적인 보고서였다.

“사람이든 돈이든 물자든. 들어오고 나가는 건 전부 정확하게 기록해둬야 안심이 되더군요.”

“하핫… 하긴. 그렇게 큰 상회를 운영하시는데, 평소 이런 일엔 철저하시겠죠.”

감찰관은 아직 모든 서류를 다 살펴보지 않았음에도, 결국 읽고 있던 서류철을 도중에 덮어버렸다.

담담한 얼굴 사이로 살짝 새어 나와버린 작은 한숨.

알트는 만족스런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걸로 뭔가 꼬투리 잡는 것은 포기한 모양이다.

“으음. 아무래도 오늘 안에 이걸 다 살피는 건 무리겠지요. 그래도 중요한 건 다 본 것 같습니다.”

“하긴. 어차피 도시의 인구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으니까요.”

“말씀대로 그런 부분은 지금 봐봤자 의미 없겠지요. 그밖에 다른 데선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두어 시간의 사투 끝에 감찰관이 패배를 선언하자. 알트는 싱긋 웃었다.

‘그렇다고 방심하기엔 일러.’

그의 눈빛에선 아직 집념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알트는 긴장을 놓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덮어놓은 서류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감찰관은 약간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측근분들이 좀… 너무 연합 쪽 인물에 치중되어 계신 게 아닙니까? 하다못해 발랴의 분들이라면 모를까….”

‘역시 이걸 걸고 넘어지냐.’

알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감찰관이 내민 최후의 패.

허나 그렇다고 제국의 승냥이 떼들을 끌어다 중용할 수도 없으니. 아라네아를 비롯하여, 굳이 그들이 감찰관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배치해 두었거늘.

알트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네요. 제국법상 고용인은 고용주의 국적으로 취급하는 게 관례다 보니,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었어요.”

“아, 오해 마십시오! 물론 당장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나중을 생각하셔서라도….”

“그렇죠. 나중에라도 제국인도 기용해두는 편이 좋겠네요.”

“흠흠. 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겁니다.”

감찰관이 밝아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곧 취업을 명분으로 그레이힐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올 첩자들을 떠올리며 알트는 내심 혀를 찼다.

‘이거 아쉬운걸.’

아마 이럴 때 핀델을 데리고 있었으면 얘기가 조금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을까 싶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변명거리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건 또 아니었다.

“다만 아라네아는 엄연히 저희 상회의 부회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골렘의 제작자라서요. 실버 울프 클랜의 조이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고요.”

“복잡한 사정 말입니까?”

“일단 이혼한 전 부인이다 보니, 평범한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가 아니긴 하죠. 아하하….”

“어, 으음. 그것 참 고생이겠습니다.”

알트는 대놓고 우물쭈물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고.

감찰관은 뭔가 머쓱해진 분위기에 괜히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군요.”

“아, 내일도 감찰 활동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예. 아무래도 이래저래 예외적인 게 많은 도시다 보니, 살펴봐야 할 점이 여러 가지인 듯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감찰관의 눈동자 속에서 묘한 이글거림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책잡을 만한 것을 찾아내겠단 그런 굳은 의지.

‘진짜 끈질기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에겐 상대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며칠이고 이 도시에서 머물며, 얼마나 뜯어본들 소용없는 짓일 거다.

알트는 그렇게 허술한 상대가 아니니까.

‘이제 남은 건 그쪽이려나….’

이제 감찰관은 대강 마무리했지만.

알트는 호위를 명목으로 따라온 그의 일행들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속셈을 알기 어려운 건 오히려 그자들이다.

물론 함부로 섣부르게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아직 남아있는 변수가 신경 쓰였던 그는, 말없이 창밖을 힐끗 쳐다봤다.

* * *

그레이힐에서도 이 여관은 조금 특별한 장소였다.

물론 1층이 식당 겸 주점이라던가 하는 특징은 어딜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었지만.

그곳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첫 번째 요소는 바로 간판이었다.

바로 마이너슨 상회의 인장을 새겨넣었다는 점.

즉, 이곳은 알트의 상회가 직접 운영하는 최초의 여관이었다.

‘제국 쪽이 성가시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야.’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

알트가 그레이힐을 이토록 신경 쓰는 이유는, 단지 이곳에서 벌어진 비극 때문만이 아니라.

이곳은 지리적으로 프리데인 대륙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육로의 허리와도 같은 지점.

이렇듯 원래도 내륙 무역의 중요한 허브로서 기능하던 도시였던 만큼.

‘한마디로 내륙 지방의 물류까지 장악할 수 있는 곳이란 거지!’

이후에 무사히 엔딩을 보기만 하면.

그레이힐을 수중에 넣은 알트는 승승장구를 넘어 온 대륙의 물류를 휘두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

지금은 이 여관이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알트의 눈과 귀가 되는 것이었다.

“…자네들이 보기엔 어때 보이던가.”

“딱히 경비병을 둔 것도 아니고. 조금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그냥 저질러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간간이 보이던 기사들…. 어쩐지 사람으로는 안 보인단 말이죠.”

여관 1층의 한 구석진 테이블.

그 자리엔 제국군의 제복을 입은 세 사내가 앉아,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찌 됐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알트 마이너슨의 약점을 알아내는 것이라는 것만 기억해두게.”

“사실 약점이라고 할 게 따로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상인 나부랭이 아닙니까?”

“불만이면 헤르만 각하께 직접 따지도록 하게. 그분이 직접 내린 특명이니까.”

상관으로 보이는 중년 군인이 낮은 목소리로 뺀질뺀질하게 생긴 젊은 군인을 다그쳤다.

이들의 표면적인 임무는 감찰관의 호위였지만, 진짜 임무는 알트에 대한 조사.

물론 조사란 게 따로 필요한가 싶을 만큼, 많은 게 알려진 알트지만.

정작 헤르만의 입장에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한둘이 아니었던 만큼 이건 당연한 지시였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갤러웨이가 함락됐는데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건지….”

일순간.

테이블의 분위기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침묵의 경비대 본부가 있는 갤러웨이.

군인의 옷을 입었다지만, 이런 비밀스런 첩보 임무를 받은 이들이 과연 어디 출신이었겠는가.

“침묵은 꺼졌네. 그 시절은 이제 잊도록 하게. 어차피 우리가 조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얼굴을 찌푸린 중년 군인이 그들에게 조언했다.

그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타협하듯 받아들인 것 같았지만, 젊은 군인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지기만 했다.

“그러면 적진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전우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상부에 건의해서 구출할 작전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네. 애초에 그들에겐….”

“하지만 저희 형님이… 침묵의 작전으로 오버델에 파견되어있단 말입니다.”

중년 군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리고. 젊은 군인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가 그토록 연합 쪽에서 첩보 활동 중인 요원을 신경 쓰는 이유가 다 있었다.

하지만 자고로 군인이라면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군.”

중년 군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이야기를 본론의 주제로 되돌렸다.

“어쨌든 우선 알트 마이너슨의 주변 인물부터 뒷조사하게. 현재로서 확인된 인물은 폭풍의 마녀 아라네아. 실버 울프 클랜의 조이. 그리고 벨하라의 사도 세린. 이 셋이네.”

“저. 그 고양이는 어떡합니까? 늘 데리고 다니는 모양이던데.”

“확실히 아낀다곤 들었지만. 지금은 단계에서 그 미물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우선은 그 세 사람에 대해 확실히 알아봐 두게.”

그렇게 다른 테이블에선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임무 브리핑을 마치고.

그들은 잔을 한차례 부딪힌 뒤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겉보기엔 진중한 이야길 나누는 절도있는 제국군일 뿐이었지만.

‘과연. 알트님의 우려대로군.’

그들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조사해야 할 인물 중 아주 중요한 하나가 빠져있다는 사실과.

지금 그 인물이 그들의 바로 곁에서 얘기를 전부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구석진 기둥 뒤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루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 * *

한편, 연합 진영 어딘가의 도시.

땅거미가 내려앉는 어둑한 시간이 되자, 수상한 그림자들이 구석진 헛간에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모인 자들은 어째 하나같이 표정들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야말로 나라 잃은 얼굴이란 표현이 딱 어울릴듯했는데.

“갤러웨이가 무너졌다.”

둥글게 모여선 이들 가운데, 진중한 느낌의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연합에서 첩보 활동 중이던 침묵의 경비대 요원들.

불과 며칠 전 그들의 본부가 연합군의 손에 점령당하면서, 소위 말하는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오랜 임무가 종료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제군들. 그동안 타지에서 고생들 많았다.”

“대장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자네들도.”

“고생들 하셨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옆의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는 등 서로를 다독여줬다.

개중에는 그동안의 고생이 한꺼번에 떠올라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자도 있었다.

“그간 임무 중에 힘든 일은 많았겠지만. 역시 가장 괴로운 건 전우들이 잡혀가는데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던 무력감이었을 거다.”

그 가운데 담담히 말을 이어가는 지휘관.

근래는 이들에게 가장 힘겨운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상부와 연락을 주고받기 어려워 각자 고립된 상태로 지내야 했었고.

거기다 자꾸 어디서 정보라도 새는지, 임무 중에 사라지는 요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오늘부로 우리의 작전은 종료되었다.”

그렇게 기나길고 힘겨운 첩보 임무가 끝났음을 알리자, 요원들의 표정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건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잠깐의 희망이었으니.

“그럼. 비상 지령에 따라 최후의 침묵 작전을 시작한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최대한 많은 적의 숨통을 끊고, 이 땅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상.”

둘러선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애초에 이 땅에 보내졌을 때부터 소모품으로 쓰일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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