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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NPC는 리셋이 싫다-220화 (219/282)

220. 보스 러시 (6)

프리데인 대륙 남쪽 끝에 자리 잡은 나라 그로츠.

그곳엔 마치 세상의 끝을 알리는 듯한 이정표처럼, 높고 거대한 등대가 빛을 비추며 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등대의 이름은 번개의 탑.

비판과 교정의 신 의심의 카르테스를 섬기는 사원인 동시에, 연합을 대표하는 학술기관.

또한 이 대륙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동시에, 가장 높은 건축물이란 기록을 보유한 곳이었다.

그리고 해가 저문 이 야심한 시각.

어둠을 틈타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등대가 보이는 언덕 위.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 중에서도 맨 앞에 서있던 자가 휙 돌아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형제들이여. 볼라크께선 황제 폐하의 몸에 임하시어, 우리 제국에 영광을 비추러 오셨다.”

“……아아…!”

“하지만 거듭되는 재앙에 우리의 영광이 의심받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눈앞에 세상에 의심을 퍼트리는 등대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크윽….”

솔직히 논리라고는 없는, 어떻게든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듯한 말.

하지만 그걸 듣고 있는 자들의 눈빛은 고양감으로 가득 차올랐고.

잔뜩 울분 섞인 눈들이 하나, 둘 등대를 향했다.

“그렇다. 우리는 오늘 이 탑을 허물어 이 땅에 진실함을 되찾고. 제국이 가장 영광스러운 나라임을 증명할 것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렇게, 연설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른 찰나.

돌연 이죽이는 목소리 하나가 찬물을 끼얹었다.

“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허?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다만? 어딜 봐도 수상해 보이는 건 네놈들이잖나.”

골목의 그림자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중년의 사내.

두꺼운 가죽 갑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야성미 넘치는 근육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그가.

도끼 한 자루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괴한들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운이 참 좋아. 이 광신도 새끼들이 때려잡기 좋게, 한데 모여주다니 말이야.”

“네 놈은 대체 뭐냐!”

“뭐야. 방금 못 들었나?”

괴한들의 물음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사내.

“나? 니들 머리통 깨부수는 사람.”

그 껄렁하게 비웃는 얼굴은. 영락없이 조이의 혈육이었다.

스릉-

그릴즈가 내보인 적대감에, 번개의 탑을 노려보던 광신도 무리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후웅-

그와 동시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허공을 울리며.

콰작!

마른 장작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뜨거운 액체를 뒤집어쓴 광신도 하나가 눈을 끔벅였다. 방금 그의 옆에 있던 동료는 날아온 도끼에 머리가 두 쪽이 되며, 그 반동으로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크윽! 이 불경한 녀석이!”

“아, 다음은 네 녀석 차례로 해달라고?”

“형제들이여! 놈은 멍청하게 스스로 무기를 손에서 놓았다! 지금이 기회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광신도들이 일제히 그릴즈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릴즈에겐 아직 무기가 남아있었다. 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전통적인 무기.

콰직!

그가 내지른 주먹에, 가장 앞서 달려오던 자의 머리가 거대한 해머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터져나갔다.

“어… 어어?”

“껄걸. 네놈들 머리통 깨부수는 데에, 굳이 내 도끼까지 쓸 필요는 없지.”

여전히 느긋하기 그지 없는 태도.

하지만 잔뜩 부풀어오른 근육과, 매섭기 그지없는 손속.

그릴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흉기 그 자체였다.

그제야 광신도들은 자신들을 노려보는 저 서늘한 눈빛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형제들이여! 지금 당장 심판을 위해 육신을 바칠지어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도망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아닌.

일제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광신도들.

“하아? 지랄들 한다, 아주.”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 치던 그릴즈가 가장 가까운 자의 턱을 걷어차며, 머리통을 깨부쉈지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

화르륵-

이미 그자를 포함한 광신도들의 몸이 금빛 불꽃에 휩싸인 이후였다.

“쯧.”

그 모습을 본 그릴즈는 짧게 혀를 한번 차며 손을 뻗었다.

잠시 뒤 되돌아오는 그의 도끼.

“이 녀석들. 어디서 이런 고얀 재주를 배워왔는지, 요즘 아주 곤란하게 됐다니깐.”

그릴즈는 영 찝찝한 얼굴로 도끼를 휘둘렀다.

어느새 도끼날 가득 휘감긴 하얀 기류가 목표를 향해 맹진했고.

콰앙!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내려꽂힌 도끼는 충격파를 뿜어내며, 황금빛 불꽃을 맹렬히 뿜어내던 심판의 정령을 단숨에 소멸시켰다.

“이것 보라고. 이놈들은 머리통 깨부수는 맛이 하나도 없잖아?”

심통난 듯 투덜대던 그릴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끼를 계속해서 휘둘러댔다.

하나, 둘.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지는 정령들.

화아악!

그때, 맹공을 펼치던 그릴즈를 갑작스럽게 덮쳐온 금빛 화염.

하지만 그는 그 찰나의 사이에 가죽 망토로 몸을 덮어, 화염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냈다.

“이 빌어먹을 것이! 하마터면 수염 탈 뻔했잖… 흐음.”

그릴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온 사방으로 그를 에워싼 심판의 정령들.

‘분명 내 공격이 녀석들에게 통하긴 했지만, 그것은 놈들도 마찬가지.’

욱신-

게다가 용암도마뱀의 망토도 그 열기를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는지. 슬쩍 내려다보던 왼쪽 어깨에서 피가 붉게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성가시군….’

그릴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놈들이 자기희생 기도로 심판의 정령을 불러내기 전에 최대한 많이 제거해뒀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자포자기가 그릴즈의 예상보다 조금 많이 빨랐다.

‘그래도 못 이길 정도는 아니지.’

그릴즈는 히죽 웃으며 팔 근육을 부풀려, 더욱 맹렬한 기세로 도끼를 휘둘러 댔다.

전사를 죽이지 못하는 위기는 전사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다 죽으면?

뭐, 어쩔 수 없지.

그조차 전사의 삶이자 운명인 것을.

금빛 불꽃과 백색 섬광이 끊임없이 격돌하는 가운데.

처음엔 열댓가량이었던 심판의 정령 숫자는 차근히 줄어들어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익어가는 그릴즈의 피부.

온갖 몬스터의 소재로 만든 장비로 무장한 그이긴 하나.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었다.

“큭…!”

화상이 점차 피부를 넘어 근육으로 침투하며, 그릴즈의 움직임에 한순간에 빈틈이 생긴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제히 달려드는 심판의 정령들.

채앵!

‘젠장…!’

그릴즈가 대경하여 도끼를 휘두르려는 찰나.

갑자기 생겨난 금빛 보호막이 녀석들의 화염을 손쉽게 막아냈다.

“이건….”

“딱 적당할 때 도착한 모양이네요.”

익숙하다면 익숙할 목소리.

그는 언짢은 얼굴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김없이.

열받을 만치 뻔뻔한 얼굴의 알트가 실실 웃으며 서 있었다. 그 뒤에 비친 인영은 금빛 눈의 엘프 환영.

“솔직하게 말씀해보세요. 이런 타이밍에 제 얼굴 보니 반가우시죠?”

“쯧. 조이 녀석은 어쩌다 저런 뺀질이한테 시집을 가선….”

그릴즈는 나타나자마자 깐죽대는 알트를 보다 혀를 차고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일단은 이쪽 일이 먼저였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 애송이가 오니 이 녀석들이 겁을 먹은 것같은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얘기는 이놈들부터 처리한 다음에 하세.”

“그럴까요? 그럼 빠르게 정리하도록 하죠.”

“그래, 그럼 내가 절반을…?”

빙그르르 미소를 지은 알트가 짧게 주문을 외우자.

그 순간에 푸른 스파크들이 이 일대에 퍼져나가며, 전격의 지대를 형성했고.

콰르르릉!

그 이후에는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마치 번개의 화신이라도 된 듯 전격을 휘감고서, 남아있던 심판의 정령을 베어나가는 알트.

그렇게 번개의 탑 앞에 알트와 그릴즈 단 두 사람만 남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2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넋을 놓고만 그릴즈.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애송… 알트는.

불과 몇 달 전에 보았던 그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 * *

밤의 고요가 다시 찾아온 거리.

“이거 마셔요!”

“고맙다. 꼬맹이.”

그릴즈는 한숨을 돌리며, 도라가 건네준 회복약을 쭉 들이켰다.

바로 약 기운이 돌며 화상들이 치유되기 시작하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슬쩍 살핀 알트의 눈에 이채가 비쳤다.

‘흉터가 엄청 늘었는걸.’

“그동안 진짜로 광신도들만 사냥하고 다니셨나 보네요.”

“사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네. 즐거운 산책이었지.”

“그런 것 치고 방금은 조금 고전하신 것 아니세요?”

“그런가? 자네가 잘못 봤겠지.”

시치미를 뚝 떼는 그릴즈의 모습에 알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여긴 웬일이지? 그레이힐에 새로 살림 차렸단 소식은 들었는데.”

“그 집에 자꾸 벌레가 꼬이는데. 청소 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죠.”

알트의 말을 듣던 그릴즈는 잠시 침묵했다.

아무리 그동안 제4여명회의 광신도 사냥에만 혈안이었다고 해도,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오래된 재앙들이 날뛴다고 들었지.”

“틀림없이 마음에 드는 사냥감이실 거예요.”

알트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릴즈를 데려가기 위한 전략? 설득?

‘그런 건 필요 없어.’

그가 가진 사냥꾼의 본능이, 강한 적을 두고 지나칠 리가 없으니까.

패배하든 승리하든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 건 그릴즈 일족의 특기이자 천형이었다.

‘안그랬다면 조이도 지금보다는 얌전… 크흠.’

“무언가 불쾌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자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그릴즈의 의심에 알트가 뻔뻔한 얼굴로 싱글싱글 웃었다.

“…드래곤도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좀비나 다름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증조부께서 쓰러트린 녀석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할 거예요.”

“그렇군.”

알트의 대답에 그릴즈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드래곤을 쓰러트리는 게 소망이었던 그에게, 최악 최흉의 드래곤과 싸울 기회가 생기는 건 일생일대의 기회.

“알겠네. 자네랑 함께 가지.”

“잘 생각하셨어요.”

근엄한 척 하지만 더없이 반짝이는 그릴즈의 눈.

알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길가의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그릴즈는 몸을 일으키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조이랑 그 꼬마 아가씨는?”

“아, 오늘은 데려오지 않았어요.”

“오늘은?”

무언가 이상한 대답에 그릴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그레이힐에서 여기까지 하루 만에 온 것처럼 말하지 않나.

그레이힐에서 그로츠까지는 직선거리로만 계산해도 수백 킬로가 넘어가고.

도로를 따라선 천 킬로 가까이 되는 거리.

그의 상식으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뭐, 저 녀석은 알트니까.’

나름대로 납득한 그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두르시죠. 아직 할루나가 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기서 미적댄다고 뭐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야간 이동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인가? 뭘 타고 갈 생각이지?”

“설명하자면 길어요. 일단은 함께 가시죠.”

알트가 재차 어리둥절해하는 그릴즈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백문이 불여일견.

문게이트의 존재는 입 아프게 설명해주는 것 보다, 그냥 보여주는 게 이해가 빠를 터였다.

‘사실 장인 어른의 반응이 좀 궁금하기도 하고.’

유독 알트 앞에서는 진중한 모습을 유지하려 드는 그릴즈.

그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트는 몹시 궁금했다.

* * *

알트가 그릴즈를 데리고 그로츠 인근의 문게이트로 향하는 사이.

그레이힐 방면의 문게이트가 달빛과 공명을 일으키며 진동했다.

잠시 후. 문게이트 유적지의 중심부에 일렁이는 포털이 형성되자.

그곳으로부터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하이 엘프 병사들이 차례로 걸어 나왔다.

곧이어.

순백의 드레스 위에 갑옷을 걸친 메이라 여왕이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했다.

마치 긴 창 같은 왕홀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대한 마법사이자 전쟁 군주다운 면모.

알트의 요청에 응하여 뉴필드 지방에 당도한 그녀의 눈썹이 순간 움찔거렸다.

동쪽 저 먼 곳을 바라본 메이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오니 저기서 풍겨오는 지독한 악취가 느껴지는구나. 그것도 더러운 심연의 냄새가.”

혐오감 가득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메이라.

“미낙스…. 나의 저주받은 선조여. 엘드리아 왕가의 명예를 걸고서, 가문의 수치인 그대를 영원토록 멸하리라…!”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증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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