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NPC는 리셋이 싫다-232화 (231/282)

232. 신탁 퀘스트 (4)

“그, 그, 그러니까, 그 서류는…!”

사색이 된 모건의 앞에서, 알트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영주가 재판권을 가진 예전이었다면, 모건의 억지에 조금은 휘둘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볼라크 교단에 재판권이 넘어간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총 서른여 건의 횡령과 배임이라… 내 살다 살다 이런 고발장은 처음 받아보는군.”

흰머리 섞인 짙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한 사제가, 기다란 서류 한 장을 내려다보다 미간을 좁혔다.

상황이 반전된 이유는 간단했다.

알트를 잡아끌고 간 모건 영주는 그를 내통죄로 고발하려 했지만.

사제는 정당한 절차와 증거를 요구했고.

‘그 틈에 내가 비리들을, 날짜에다 횡령 목록까지 깔끔하게 정리하여 제출했단 말씀.’

볼라크의 눈 덕분에.

식은 수프 떠먹는 것보다도 쉬웠던 고발장 쓰기.

물론, 아무리 영주라고 해도 군수물자에 손을 대는 건 쉽지 않다. 심지어 깃발권에 의거하여 군권을 빼앗긴 지금은 더더욱.

“허흠! 맹세코 사리사욕을 위해 군수품을 착복한 게 아니라. 그게 영지를 지원하려 한 좋은 뜻에서….”

“그래 맞소! 모건 영주! 저 탐욕스러운 자가 우릴 속여 이용한 게요!”

“그럼 그럼. 내가 제국에 충성을 바쳐온 지가 몇 년인데, 고작 푼돈에 긍지를 팔아넘기겠소? 다 저자의 잘못이오!”

“뭣이라? 날 팔아 자기들만 살겠단 거냐! 애초에 날 꼬드긴 게 네놈들이잖나!”

공범으로 지목된 고위 장교 셋과 대면한 모건이 얼굴을 잔뜩 붉혔다.

시장통 한복판보다도 더 시끄러운 말다툼.

그동안 하도 해 처먹은 탓에,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면 죄상이 낱낱이 밝혀질 터.

어떻게든 형량을 줄이기 위해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이들.

그 꼴이 참으로 볼만했다.

“에이잇! 내 고발은! 저, 저 가증스러운 녀석은 적들과 내통했단 말이오!”

“하아… 모건 영주. 이래서 자격 없는 자들에게 법봉을 쥐여줘선 아니 되는 거요.”

순간 알트와 모건의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삿대질하며 물귀신 작전에 들어갔지만.

볼라크의 사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다 깨알같이 볼라크 교단이 재판권을 갖는 현재의 제도를 옹호하며, 모건을 비난하는 발언까지.

“이익…! 사제 나부랭이가 감히 겁도 없이!”

“애초에 그대의 고발은 증거라곤 하나도 없이, 주장뿐이지 않소? 그런 억지는 모함이라고 부르는 행위요.”

“하지만 저놈은 분명 예전에 목공 길드에 불을…!”

“그 사건이라면 이미 재판까지 끝나지 않았소? 지금 본 신전의 판정 결과에 의문을 품는 것이오?”

“그, 그건….”

사제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결국 움찔거리며 다물어지는 모건의 입술.

‘쯧쯧.’

혀를 차던 알트는 눈앞의 서류를 슬쩍 훑어보았다.

사실 게임에서의 모건 영주는 이렇게까지 간 크게 횡령하지는 않았었다.

그가 이리 과감하게 움직였던 것은.

‘아무래도 목공 길드의 화재 덕분에 물자 기록을 조작하기 쉬웠을 테니까.’

실제로 불타지 않은 물건을 뒤로 빼돌리고, 불타버린 것으로 기록하면 끝.

그렇게 조작이 쉬워지니 점점 더 대범해질 수밖에 없었을 거다.

“…어라, 그럼 나 때문인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알트 성주?”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 한마디에, 사제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알트는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크흠, 제게 보급지원을 요청한 것도 본인이 저지른 죄를 무마하기 위함이었겠죠. 제국군이 약화되는 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습니까?”

“으그윽…!”

날카로운 지적에 모건의 입술 사이에서 이빨이 뿌드득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 고발하겠다고 난리를 피우시는 것도. 그 원인을 제게 돌리려는 목적 아닙니까?”

“네놈…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정체가 뭐냐고!”

“어라라? 제가 그렇게 속내까지 완벽하게 맞춰버렸나요?”

“그, 그건…!”

알트의 능청스러운 물음에 모건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 마음도 이해는 간다.

알 턱이 없는 자신의 비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데다, 이렇게 속마음까지 훤히 들여다보다니.

이젠 공포마저 섞인 그의 눈빛.

“어쨌거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데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하오, 알트 성주.”

“뭘요. 아, 혹시 나중에 저도 재판에 출석해야 합니까?”

“아아. 그거라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되실 거요. 어차피 자백은 대부분 얻어냈으니, 유죄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알트는 창밖을 흘끗 바라보며 현재 시각을 가늠해보았다.

윌리에겐 미리 말을 교환하고 성문 근처에서 기다리라고 얘기는 해뒀지만.

이제 서두르지 않으면 곧 성문이 닫혀버릴 거다.

“그런데 혹시 성주께선 일부러 이 일 때문에 리들에 오신 거요?”

“아뇨. 단지 레나드에 볼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군요”

“레나드? 거긴 지금 바릭 지방 반란군의 거점인데, 어째서 가시는 거요?”

알트를 바라보는 사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모건이 주장한 내통죄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던 모양.

하지만 굳이 마차를 타고 이동하려 했던 만큼, 변명거리는 미리 준비해 뒀었다.

“그레이힐의 성주가 아닌 마이너슨 상회의 상회장으로서 가는 겁니다.”

“흐음. 그렇소?”

“저희 상회가 바릭 지방의 주류 유통을 담당하도록 계약했었는데, 반란 때문에 피해를 봤으니까요. 정식으로 항의해서 보상을 받아내야죠.”

“확실히… 그 문제라면 발랴 국적인 성주께선, 충분히 항의하러 가실만하오.”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물론, 그 외에도 사제가 알트를 이렇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바쁘신 분을 계속 붙들고 있어 죄송하오만. 한 가지만 더 여쭤도 되겠소?”

“네, 말씀하시죠.”

“음. 그러니까… 알트 성주께선 혹시 볼라크님을 섬기고 계시는지?”

사제의 눈이 혼란을 담고 알트를 살폈다.

거의 걸어 다니는 성물처럼 볼라크의 신성력을 뿜어대는 상인이라니.

볼라크의 사제로선 당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알트는 공손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일렌의 목걸이에 판별의 눈까지 쓰고 있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거지.’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만. 가능하면 신앙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가르침을 따르려 노력하는 편이죠.”

사제는 멍하니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게 약간의 흠이긴 하지만, 볼라크 교단 안에서도 이리 신성력이 높은 이는 흔치 않은데.

‘마치 성자와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군….’

진심으로 탄복한 사제는, 알트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중간에 한차례 삐걱거림이 있긴 했었지만,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곧 출발한 알트 일행의 마차는 예정대로인 약 30시간의 강행군 끝에 레나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라? 여기 뭔가 달라지지 않았어?”

마차의 창문 밖으로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던 세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그동안 계절이 몇 번 바뀌긴 했지마는, 거리의 풍경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사람 쪽.

“그야 레나드는 지금 저항군의 본거지니까.”

“아, 그래서 군인들이 싹 바뀐 거구나!”

세린이 동그래진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보니 하나같이 가슴에다 록슬리 가문의 문장을 새겨둔 병사들.

곧 마차가 여관 앞에서 멈추어 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에서 후다닥 내린 세린과 조이가 몸을 쭉 펴며 신음했다.

“흐아아! 드디어 움직일 수 있겠다!”

“아으 진짜. 계속 마차에만 있는 것도 못 할 짓이야.”

두 사람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자, 관절에서 요란스럽게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들이 그러는 사이, 알트는 잠이 덜 깬 도라를 안고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보랏빛 별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저쪽이면 역시 오델의 사원이겠는걸….”

그렇게 신탁이 가리키는 장소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알트는 여관에 방을 잡아놓은 뒤, 일행들과 함께 오델의 사원으로 곧장 향했다.

“오오. 여긴 더럽게 큰데?”

“그쵸? 저는 처음에 사원들이 전부 이렇게 큰 줄 알았어요.”

오델의 사원은 여전히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크기에 어울리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이 사원을 드나드는 모습도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세린은 머뭇거리다 알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알트! 우린 여기에 뭐 하러 온 거야? 혹시 저번에 그 거대 슬라임 때문은 아니겠지…?”

“엥? 그 거대 슬라임. 그냥 과장해서 한 얘기 아니었어?”

“진짜로 있다니까요, 언니! 냄새도 완전 고약하다고요!”

세린은 생각만 해도 그때의 그 악취가 다시금 떠오르는지, 얼굴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슬라임이라, 그런 게 있긴 했지.’

고개를 갸웃한 알트는 고민에 잠겼다.

신탁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별을 이용해 나침반처럼 방향을 알려줄 뿐.

구체적으로 무엇 해야 할지 찾아내는 건 알트의 몫이었다.

“흐음. 그 슬라임이라면 일단 냉기 폭탄 포션을 보내놓긴 했었는데. 어지간하면 죽지 않았을까?”

“그런가? 솔직히 지금이라면 그런 거 없이도 잡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역시 냄새는 싫을 것 같아!”

“얼씨구. 요즘 좀 강해졌다고 우쭐하게 굴기는.”

알트는 의기양양한 얼굴의 세린을 보다가, 조이의 표정을 살폈다.

어쩐지 다시금 침울해진 것 같은 그녀의 표정.

하지만 이내 알트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그녀는 일부러 먼 산을 보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저 녀석 성격상. 지금 자기가 저러는 것도 자괴감이 더 들겠지.’

제자인 세린의 성장을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묘한 질투를 느끼게 된 그녀.

아마 조이는 그런 자신을 곱씹어 보면서 더욱 마음이 괴로워질 터였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랑 거리를 두려고 한 걸 테고….’

조이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역설적으로 조이라서 그리 결정했을 것이다.

진한 씁쓸함을 느끼며.

알트는 부디 이 문제를 해결해줄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를 빌며, 사원 안으로 향했다.

겨울은 유독 사원이 북적거리게 되는 계절이었다.

특히, 포도 농장의 농부들은 추운 날씨에도 일하느라 꽁꽁 얼어버린 몸을 녹이기 위해서라도 오델의 사원을 찾곤 했다.

가난한 농부들이 난방비를 아끼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중요한 이유 하나.

“아, 뭔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예배당으로 향하던 길에 세린은 무언가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향기를 맡고서 코를 킁킁댔다.

“겨울은 포도 재배에서 은근히 중요한 계절이거든.”

“흐에. 그럼 이런 날씨에도 밖에서 밭일하는 거야?”

“그래서 고생한 농부들을 위한 복지 차원으로, 사원에선 향신료와 과일을 넣고 끓인 음료를 무상으로 제공해줘. 물론 사원을 찾은 다른 신자에게도 마찬가지고.”

“으와아. 얘기만 들어도 맛있을 것 같아!”

흔히 뱅쇼라고 부르는 음료.

그 향기의 정체를 알게 된 세린은 괜히 입맛을 다시며, 예배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예배당에 도착하자, 알트의 말대로 예배가 없는 날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이 들려있었고.

보란 듯 예배당 뒤쪽에서 커다란 솥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세린이 군침을 삼키며 알트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알트. 나도 한 잔 얻어 마셔도 되는 걸까? 뭐랄까… 난 벨하라 님의 사도잖아?”

“자애를 관장하기도 하는 오델이잖아. 그런 건 별로 상관 안 할걸.”

“아싸!”

진심으로 기뻐한 세린이 뱅쇼가 담긴 솥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반면에 와인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순수 맥주파 조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예배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어?”

그러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

“야, 저 녀석. 그 녀석 아냐?”

한쪽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알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대며, 예배당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 녀석이라니 대체 누구….”

알트는 조이가 가리킨 인물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분위기가 어둡긴 했지만, 눈에 띄는 미형의 청년.

하지만 그 얼굴 보다 눈에 띄는 건, 한쪽만 뾰족한 귀.

“엥? 클라우스? 저 녀석이 왜…?”

그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만종의 기사 클라우스.

게다가 갑옷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손에는 검 대신 술병까지 든 처량한 모습에 알트의 눈도 조이처럼 휘둥그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