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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NPC는 리셋이 싫다-273화 (272/282)

273. 숨바꼭질 (2)

쉼 없이 황성 안을 종횡무진하던 알트는 정원을 둘러싼 회랑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를 향해 정면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거구의 황금 기사들.

그리고 포위하듯 회랑을 돌아 알트의 측면과 후방을 노려오는 황금의 짐승들까지.

“흐음. 저 녀석들. 역시 저기서만 나오는 것 같은데.”

스르릉-

알트는 검을 뽑아 들며 건너편 복도를 응시했다.

“분명 한산하기 그지없던 성내에 놈들이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저기 어딘가에 성역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단 거겠지. 안 그래?”

정원의 뚫린 천장 너머로, 알트는 보란 듯 태양을 향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마치 약오른 듯, 더욱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태양과 함께. 알트를 포위해오던 황금 짐승들도 요란스럽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그 포효를 신호탄 삼아, 일제히 돌진해오는 황금 기사들.

알트는 조용히 검을 쥔 채 기다렸다. 적들이 어림잡아 스무 걸음 안으로 접어든 직후.

차르르르륵-

알트의 품안에서 번뜩이는 푸른빛.

그 순간 얼음 폭탄이 터지듯, 알트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고드름이 발사됐다.

고드름은 비록 적들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맞은 자리가 급격히 얼어붙으며 녀석들의 움직임을 단단히 묶어냈다.

하지만 곧 사방에서 파열음이 울리자.

알트는 눈을 치켜뜬 채 흥미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금의 기사와 황금 짐승 모두 몸에서 고열이라도 내뿜는지, 진한 수증기를 일으키며 얼음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더욱 거세게 내리쬐는 햇빛 속.

그럼에도 알트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머금은 채 검을 휘둘렀다.

“좋아, 그럼 이것도 막아내는지 한 번 볼까?”

아주 조용하게, 서서히 주변으로 내려앉기 시작한 서리.

천천히 들어 올리는 그의 검끝을 따라, 마치 공간 그 자체가 얼어붙은 듯한 궤적이 생겨났다.

한낮의 햇빛 속.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릴 만큼 푸른 선이 대기를 진하게 수놓았다.

파앗!

그리고, 그 이후는 한순간이었다.

시간이 얼어붙은 듯 알트의 주변 모든 게 정지된 것처럼 느려졌고.

햇빛조차 그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오직 알트만이 그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였으니.

그에게만 수십 초로 늘어난 찰나는, 몰려드는 적을 쓰러트리기엔 더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퍼서석-

냉기의 원소와 하나가 된 알트가 베고 지나간 모든 자리가 얼어붙어 있었고.

꽝꽝 얼어붙은 녀석들은 이제 얕게 깔린 서리조차 녹이지 못할 터.

쿠웅, 쿵.

균형을 잃은 몇몇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처참하게 조각나 부스러졌다.

“성가시네. 가뜩이나 덩치도 커서 길막도 하는 게….”

하지만 그러한 쾌거에도 불구하고.

알트의 표정에는 점차 언짢은 기색이 강해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회랑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들.

놈들은 방금 알트가 베어 얼려버린 자기네 동료들도 무참히 부숴버리며 진격해오고 있었으니.

베고, 또 베어도.

도저히 지나갈 길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이 또한 모드린이 알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세운 작전이었다면, 꽤 효과를 보이고 있는 셈.

계속해서 밀려드는 거구의 황금 기사를 상대로 놈들을 비집고 반대편 복도로 향한다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

“뭐, 길이라는 게 하나만 있는 게 아니기 마련이지.”

알트는 다가오는 적들을 빠르게 베어 넘기며 정원의 뚫려있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원을 둘러싼 위층의 벽들은, 어디서든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커다란 창문이 빼곡히 나 있었다.

“저 녀석들 아무래도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은데.”

녀석들이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이미 한차례 황성 안을 휘저으며 돌아다녀 본 만큼, 적어도 이보다 아래층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했다.

파앗-

그렇게 판단을 내린 알트는 날렵한 몸짓으로 회랑의 벽면을 타고 넘어, 위층의 창문으로 향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리고 창문을 통해 본 위층 복도 안쪽에서,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던 적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위층에서도 황금 기사의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꼭대기 층 언저리이려나? 그러면 한번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보는 게 좋겠어.”

알트는 다시 한번 훌쩍 뛰어올라, 벽면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벽을 타고 넘으며 암살 대상에게 향하는 것이, 왠지 다른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굳이 지름길을 두고서 힘든 길로 돌아서 갈 필요가 없었다.

크르르-

크와아앙!

그리고 알트의 속셈을 알아차렸는지, 황금 짐승들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추격해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거기에다.

콰앙!

알트의 발 아래.

거대한 진동과 함께 커다란 구멍을 뚫고 뛰쳐나온 황금 기사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것은 한 녀석으로 끝나지 않았다.

쾅!

쿠웅!

황금 기사는 연속해서 몸통 박치기를 날리거나, 벽째로 베어버릴 기세로 대검과 도끼 등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알트의 속도가 너무 빨라, 번번이 빗나가긴 했지만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협.

커엉!

카르르릉!

그 덕에 알트를 쫓아 벽을 기어오르던 황금 짐승들도 녀석들의 공격에 휘말리기도 했지마는.

애초에 모드린에게 있어 그것들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을 터.

“역시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는 모양이네.”

하지만 그런 격렬하고도 난잡한 저항을 보며, 알트는 만족스레 웃으며 확신했다.

지금 가는 이 길의 끝에, 발악하는 모드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 * *

연합군의 각 부대를 지휘하는 대장들은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오웨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바로 쳐들어가자니. 저희 레인저들의 정찰 보고 못 들었습니까?”

“당연히 들었습니다. 총 네 개 병단이 근방에 진지까지 구축해놓은 상태고. 그 밖에도 다섯 병단이 접근해오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걸 아는 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까?”

던버스의 레인저 대장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머릿수로 따지면 대략 2, 3만 가량의 적들에게 포위되기 직전인데, 뒤통수 옆통수 다 비워두고 앞만 보겠다니. 이만하면 멧돼지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게다가 불과 한 시간 전에 한 차례 격전을 치른 상태 아닙니까?”

“그것도 무리한 강행군까지 해가면서 치른 전투라는 것도 잊지 마시죠.”

연합군 대장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오웨인의 판단이 무모하기 그지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암만 무리한 작전이래도 군말 없이 따라와 준 이들이었지만, 역시 이번 계획에는 선뜻 응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웨인은 전혀 실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수개월 동안 연합의 전사들과 한솥밥을 먹어온 사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은 이제 나름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여기까지 와놓고서, 다들 겁내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 한마디에 오웨인의 의견에 반대하던 대장들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지금 겁이라고 했습니까? 항상 가장 먼저 적진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는 던버스의 레인저는, 겁 따위 모릅니다.”

“핫! 용감함이라면 오히려 엠브라보다, 첼소어의 바다 사나이들이 한 수 위일걸요?”

역시 그것은 사내들의 도전 정신을 일깨우는 마법의 주문이었으니.

“자아, 이제 다들 쉴 만큼 쉬었겠지! 설마 벌써 잠자리에 든 착한 어린이라도 있나?”

“어이! 왜 이렇게 엉덩이가 무거워! 그새 살이라도 쪘나? 냉큼 일어나! 운동 시간이다!”

그렇게 오웨인의 도발에 보기 좋게 걸려든 대장들은, 쌓여있는 피로도 금방 잊은 채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 전투를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오웨인은 미소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뒤로 오즈월드가 터벅터벅 걸어와, 투박한 손을 오웨인의 어깨 위에 얹었다.

“저들을 다루는 법이 익숙해졌구먼.”

“아하핫…. 보고 계셨으면 좀 도와주시지 그랬습니까?”

확실히 오즈월드가 나섰다면 아까와 같은 논쟁은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오웨인의 원망섞인 쓴웃음에 오즈월드는 그저 호탕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크하하핫! 뭐 제대로 풀렸으니 된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확실히 무모한 생각이야. 혹시 자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그러고 보니 베이런 그 영감탱이가 배신한 걸 알았을 때, 어디론가 향했었지.”

오즈월드는 그의 턱수염을 쓸어내며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그때 오웨인이 뭔가를 하게 놔두긴 했지만, 정작 그 일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실은.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지원군? 암만 생각해도 오늘 밤 안에 올 만한 지원군이 없을 것 같은데…. 설마 제국 쪽에 뭐 숨겨둔 아군이라도 있었나?”

“아뇨 제국 쪽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이라면 아마 절대 늦지는 않을 겁니다.”

“그분?”

확신에 가득 찬 오웨인의 표정.

하지만 오즈월드는 전혀 예상이 가지 않는지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오웨인이 경칭을 사용하는 것을 보아 뭔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애초에 지원군을 데려올 만한 인물이라면 그 정도인 게 당연하지만.

“어쨌든 알트가 안에서 안심하고 행동하려면 저희의 도움은 불가결입니다.”

오웨인은 굳게 닫혀있는 화이트 캐슬의 성문을 응시했다.

세린과 조이 등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면, 아무리 은신의 귀재인 알트라고 할지라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건 어려울 터.

그렇다면 적어도 적을 성내의 적을 분산시키기라도 해야 했다.

뿌우우우-

이윽고 연합군의 진지 사이에서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두둥!

그리고 전장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진형을 갖춘 연합의 군대가 화이트 캐슬을 향해 점점 나아갔다.

.

.

.

한편 그 시각.

연합의 군대 바로 후방 쪽에 구축해놓은 제국군의 진지에 다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에 이제 막 잠이 들었던 병사들이, 욕지거리하며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이런 씨. 뭐야. 이제 막 잠들었는데….”

“미친 연합 놈들…. 저것들은 잠도 없나….”

분명 정찰 보고에 따르면, 불과 한 시간 전쯤에 연합은 모드린의 신병과 한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렇기에 오늘은 전투가 없으리라 예상하고서, 새벽을 기약하며 부대 전체가 취침에 들어갔던 것이거늘.

심지어 자기네들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공격을 개시할 거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무슨 일인가? 설마 연합 놈들이 우리 진지를 공격해왔나?”

“아뇨, 사령관님! 반대입니다! 그 미친놈들이 화이트 캐슬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아…. 이런 미치광이 새끼들….”

병단의 사령관도 이를 예상치 못한 건 마찬가지.

그는 졸린 얼굴로 마른세수하며,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애써 삼켜냈다.

그리고 이내 졸음 가득한 그의 눈빛은 독기로 가득해졌으니.

“좋아 오히려 잘됐다. 놈들이 스스로 사지로 기어들어 온 셈이다. 이건 우리가 이던 거나 마찬가지지.”

이윽고 비릿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지며, 사령관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원 전투 준비시켜. 혹시 모르니 인근 병단에도 급보를 날리고.”

“네, 알겠습니다!”

“흥. 멍청한 연합 놈들. 그놈들의 오만이 결국 자기들 무덤을 파는구나.”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는 사령관의 눈빛에 조금씩 금빛 안광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몰려드는 황금 기사와 황금 짐승의 무리를 베어 넘기며, 황성의 꼭대기 층으로 향하던 알트.

그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놈들이 몰려드는 숫자가 줄어든 것 같은데? 설마, 엉뚱한 곳으로 유인당했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알트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낮게 신음하며 적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놈들은 분명 위에서 아래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부오오오오오-

그리고 그때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굵직한 나팔 소리.

그제야 알트는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렸다.

“이거 아무래도 내 쪽에게서도 서둘러주어야겠는데.”

설마 이 시간에 공성전을 개시해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건 알트가 생각하기에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

“하지만 덕분에 나아가기가 수월해졌어!”

적들이 분산되며 몰려들던 기세가 수그러들자, 확실히 놈들의 사이사이에 빈틈이 보였다.

그리고 알트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콰르르릉!

일순간 번개가 내려치며, 알트는 그 번개와 하나가 되어 황금빛 적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알트는 그렇게 단박에 황성의 첨탑 꼭대기에 도달했고.

“여기 있었구나.”

그렇게 알트 앞에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포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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