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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138화 (138/549)

138화 각성 (1)

용살자, 리갈 바고스.

부족장 역할을 하는 일족의 태고룡을 살해 후 용의 저주를 받은 용인족龍人族.

사건 이후 자취를 감췄으나 약 10년 전, 홀로 요정족의 성지에 테러를 감행하며 오르큘리스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개시한 씹새끼.

주무기는 용살검이란 별명이 붙은 아크제 장검 한 자루이며, 여태 확인된 정수는 총 여섯이라고 하는데…….

‘5등급 셋에 4등급 둘, 3등급 하나.’

알려진 정수만 보면 전형적인 깡스탯 검사에 가깝다.

스킬 전부가 스스로를 강화하는 형태이기에 장비만 받쳐 주면 상성이랄 게 없는 클래스.

뭐, 10년 전 정보이니 어느 정도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

범죄자 새끼가 어떻게 정수를 지우겠어?

‘그러니까 이 물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거겠고.’

참고로 가장 걱정했던 용언. 즉, 용인족만의 고유 스킬은 ‘용의 저주’로 인해 봉인된 상태라고 한다.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솔직히 용인족인 걸 알고 존나 쫄았거든.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일세.”

“그렇군, 고맙다. 크게 도움이 됐다.”

로트밀러를 통해 적의 정보를 숙지한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 물론 목적지를 향해 뛰면서.

타다다닷-!

일단 용살자, 리갈 바고스.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었다.

아마 ‘균형의 수호자’가 아니었으면, 보석이고 뭐고 인지도 하기 전에 목이 베어져 나갔을 터.

타다다닷-!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며 시간을 확인한다.

[08 : 57]

놈과 마주친 이후로 세 시간가량이 흐른 시각.

즉, 이제 9시간 뒤면 술래잡기가 시작된다.

물론, 놈이 약속을 제대로 지켜 준다는 가정하에 얘기지만 아무튼.

‘열두 시간이라…….’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전사의 맹세에 곁들여진 내 당당한 태도.

이에 놈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혹은 밑져 봐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거래에 응해 주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반지만 아니면 쿨하게 하루를 기다려줬을지도 모르는데.’

24시간과 12시간은 너무나도 다르다.

준비물은 준비물대로 챙기고 말미의 휴식도 취할 수 있었을 만한 시간.

‘후, 뭐 하나 쉽게 가는 게 없군.’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의지를 다잡는다.

고블린 덫, 싸이코패스년, 핏빛 성채, 마녀의 숲, 계층 군주 등등등.

절망적이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잡념을 지우고,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그 자리에 아로새긴다.

살아남는다.

가능하다면, 모두 다 함께.

반드시.

“비요른, 도착했네.”

상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로트밀러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샌가 앞에는 막다른 길이 자리했다.

보스방이 있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11시 방향의 모서리 지점.

쉽게 말해, 두 번째 중간 보스가 있는 장소.

딸깍, 드르르르륵.

로트밀러가 기계장치를 조작하자 벽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공간을 드러낸다.

화르륵.

발을 들이밀자 횃불이 켜지며 밝아진 석실.

‘바포메트’가 나왔던 7시 모서리와의 차이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으으, 차라리 그때 거기가 더 나은 거 같당.”

염소 머리 대신 눈알이 뽑힌 시체 더미가 산처럼 쌓인 석실.

나는 악취를 뚫고 나아가 마법진 위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미궁의 악마가 피를 감지합니다.」

오케이, 일단 하나는 얻었고.

***

「아르고스를 처치했습니다. EXP +5」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

라르카즈의 미로에는 중간 보스방 외에도 많은 숨겨진 공간이 존재한다.

보상은 제각기 다르다.

일회성 소모품이 숨겨져 있을 수도, 희귀한 몬스터가 출현할 수도 있다.

뭐, 내게 필요한 것은 따로 있지만.

‘이번에도 꽝인가.’

‘아르고스’를 처치한 우리들은 그 주변을 수색하며 숨겨진 방들을 찾는 데 주력했다.

다른 중간 보스를 잡으러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을뿐더러…….

내 계획을 위해서는 ‘그 방’을 찾아내야 한다.

‘후, 그래도 나름 잘 찾아내고 있기는 한데.’

로트밀러를 앞세우고서 작정하고 숨겨진 방을 찾으니, 두 시간에 한 번꼴로 발견이 됐다.

용살자 파티가 입장하며 확 올라간 육감 스탯 덕분이었다. 이전까지는 지나치면서도 무심코 지나갔을 그것을, 로트밀러는 귀신같이 찾아냈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방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단 거겠지만.

[05 : 30]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놈과 약속한 12시간이 끝나갈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잠깐, 멈춰 보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로트밀러가 일행을 멈춰 세우더니, 주변의 벽을 탐색해 숨겨진 방을 찾아냈다.

스르르륵.

몬스터도, 숨겨진 보물도 없는 서너 평짜리의 석실.

내부만 확인한 나는 도로 석실을 닫았다.

‘찾았군.’

마침내 계획의 첫 번째 준비물이 전부 모였다.

따라서 나는 일행을 멈춰 세우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다들 잠시 쉬고 있어라.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쉬라니? 이 방이 대체 뭐기에…….”

“살아나가면 전부 설명해 주겠다. 그러니 일단 내 말을 따라라.”

“……알겠네.”

내 단호한 음성에 난쟁이놈도 의문을 버렸다.

아니, 의문을 버렸다기보다는 당장은 날 믿고 캐묻지 않기로 한 것에 가깝겠지.

“후…….”

피곤에 찌들어 있던 동료들이 눈을 붙임과 동시에 나는 숨을 길게 토해냈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쳐도, 로트밀러에게 둘러댈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온다.

핏방울을 마법진 위에 떨어뜨려 중간 보스를 소환한 것부터 시작해 지금 이 순간까지. 책에서 봤다고 하기엔 납득되지 않을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아무튼,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숨을 한 번 더 길게 들이마시며 미래에 대한 고민을 지운다.

둘러대는 거야 어떻게든 될 거다.

그래,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기로 하며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중심부에 포탈이 있을 것 같다면서? 거기는 가지 않는 건가?]

포탈로 향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12시간 동안 거기에 놈이 있을 테니까.

괜히 갔다가 도망친다고 생각해 버리면, 기껏 얻은 12시간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터.

그 시간에 준비를 하는 쪽이 옳다 판단했다.

하지만…….

‘놈도 슬슬 우리를 찾으러 출발했겠지.’

이제 약속한 12시간이 끝났다.

다행히 일차 준비는 제때 끝났고, 덕분에 놈이 도착할 때까지 일말의 휴식이라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암울하다.

‘성공률은 10% 미만.’

냉정히 점쳐 본 가능성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놈이 가진 정수 중에 알려진 것은 고작 여섯 개뿐이다. 베일에 싸인 두세 개의 정수가 변수로 남아 있으며, 카루이의 대사제라는 가장 큰 걸림돌도 변함없다.

그렇기에…….

꽈악.

찬란하디만치 붉은 보석을 꺼내 손에 쥐었다.

꿀꺽 삼키며 인질로 삼기는 했지만, 안전이 확인되자마자 [거대화]를 사용해 토해낸 그것.

라르카즈 미로의 최종 보상이자, 용살자란 이명을 지닌 최악의 범죄자가 간절히 바라며 찾아 헤매 왔을 바로 그 아이템.

‘절제된 소망.’

가능하다면 지금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템은 4등급 수호자 정수에 발라야지만 최대 효율이 나오니까.

그러나 어차피 죽으면 쓰지도 못할 물건.

‘역시 쓰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치달을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물건은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다.

“…….”

폭풍전야와도 같은 이 고요 속의 시간은, 머지않아 끝이 찾아올 터.

할 수 있는 준비는 미리 해두는 편이 좋다.

그때 가서는 쓰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을 테니까.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콰직-!

찬란한 적광을 뿜어내며 쪼개지는 보석.

이내 정신을 차렸을 때.

「캐릭터가 ‘절제된 소망’을 사용하였습니다.」

「캐릭터가 균형의 방으로 이동합니다.」

나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

화르륵-!

불꽃 하나가 떠오르며 공간을 밝힌다.

한 걸음을 내디디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터벅.

천공의 탑을 연상시키는 석실.

허공에 떠오른 불길이 파르스름하게 일렁이며 가장자리의 석문 세 개를 비추고 있다.

‘신기하네.’

실제로는 이런 식이었구나.

게임에선 키보드를 조작해 뭘 고를지 선택만 하면 끝이었는데.

「교체를 원하는 정수를 선택하십시오.」

나는 각 석문에 그려진 고유의 벽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채색까지 된 건 아니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터벅.

썩어 문드러진 팔과 다리들이 오밀조밀 뭉쳐 움직이는 끔찍한 괴물.

‘이게 시체골렘이겠고.’

시뻘건 보석으로 붉은 안광이 표현된, 뾰족한 송곳니와 날카로운 손톱을 지닌 사람 형태의 무언가.

‘이건 뱀파이어.’

거대한 깃발을 바탕으로,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근육질의 전사.

‘이게 오크 히어로겠지.’

각 문은 내가 지금까지 흡수한 세 개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었다. 어떠한 안내 문구도 없지만, 뭘 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원하는 문을 열어젖히면 해당 정수가 교체되는 방식이겠지.

‘절제된 소망’은 그런 아이템이니까.

4등급 이하의 정수를 동급의 무작위 정수로 바꿔 주는 가챠형 아이템.

터벅.

나는 고민없이 문 하나를 향해 나아갔다.

그야 뭘 고를지 이미 정해 뒀거든.

‘오크 히어로.’

물론, 이건 아니다.

5등급이긴 하지만, 내 최종 조합에도 속한 코어 정수이니까.

‘시체골렘.’

고통내성은 의외로 쓸 만했지만, 사실 능력만 보면 내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중에 정수가 다 차면 그때 지우려고 아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패스.

‘절제된 소망’을 7등급 정수에 바르다니,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한단 말인가.

‘뱀파이어.’

이내 그 몬스터의 형상이 그려진 석문 앞에 선 나는 그 앞으로 손을 뻗었다.

탱커와 어울리는 스킬셋과 능력치.

게다가 균열 수호자를 잡고 얻은 물건인지라 스킬 세 개가 전부 붙은 희귀 정수.

‘절제된 소망’에도 숨겨진 요소가 존재하니까.

「뱀파이어의 정수를 선택했습니다.」

「수호자의 정수입니다.」

「선택 가능한 정수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수호자의 정수를 제물로 바칠 시, 고를 수 있는 정수의 등급이 상승한다.

쉽게 말해, 4등급 수호자의 정수를 바치면 3등급 정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한 셈.

‘아마 그 새끼가 이 케이스겠지. 이 물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들어온 걸 보면.’

나도 게임을 할 때 그랬다.

등급은 높지만 내 캐릭터에는 맞지 않는 수호자 정수를 먹었을 때, 라르카즈의 미로를 찾아 가챠를 노렸다.

한데 5등급 수호자. 그것도 내게 쓸 만한 정수로 이 아이템을 쓰게 될 줄이야.

“후우…….”

애써 미련을 지우며 열린 문 너머로 나아갔다.

몇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일자형 통로가 끝났고, 불꽃이 타오르며 세 개의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륵!

균형이 컨셉인 아이템답게 세 개의 석문에는 육체, 정신, 이능 타입의 몬스터가 하나씩 그려져 있었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뭘까 이건.

「현재 그 누구도 보유하지 않은 정수입니다.」

「균형의 수호자가 희소성을 인정하며, 가치에 맞는 선택지를 새롭게 제시합니다.」

벽화를 면면이 살펴보던 나는 그대로 굳었다.

일단 첫 번째 선택지는 이것이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붉은 보석이 담긴 함을 쥐고 있는 해골 마법사.

4등급 몬스터, 리치.

[영혼의 함]이라는 패시브 스킬과 파괴적인 액티브 스킬을 여럿 소유한 전형적인 ‘이능계’ 몬스터.

여기까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문 위에 박힌 보석이 납득되지 않을 뿐.

‘……무지개색?’

앞서 시체골렘은 흑색의 보석이, 오크 히어로는 녹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게 정수의 색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한데 무지개색이라니?

수호자 정수였던 뱀파이어의 문 위에 박힌 보석과 똑같은 색 아닌가.

‘그럼 진짜 수호자의 정수가 떴다고?’

나는 신속하게 나머지 문도 확인해 보았다.

4등급 몬스터, 영혼의 거신병.

근력이나 민첩 같은 스탯이 전무한 대신, 정신 계열의 스탯이 몰빵된 영체류 몬스터.

마찬가지로 보석의 색은 수호자를 의미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운’이라 넘어갈 수도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수호자 정수가 선택지로 뜬 적도 있기는 하니까.

하지만…….

‘이게 우연일 리는 없겠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지.

육체 타입의 몬스터를 확인한 나는 인정해 버렸다.

이는 결코 ‘운’ 같은 게 아니다. 단지, 아직 이 게임에도 내가 모르는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을 뿐.

화르륵-!

일렁이는 불꽃에 비친 보석은 적색이었다.

즉, 수호자의 정수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터벅.

나는 홀린 사람처럼 문을 향해 걸어갔다.

믿기지 않지만, 문에 그려진 벽화는 단 하나만을 의미했다.

터벅.

3등급 몬스터.

그것도 단독 활동을 하는 보스급 몬스터.

쉽게 말해, 3, 4등급 탐험가로 이뤄진 레이드를 펼쳐야 처치가 가능한 몬스터.

육탄 능력만큼은 지상계 몬스터 중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던, 바로 그 몬스터.

‘오우거.’

나는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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