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협상 (3)
도심 속을 빠르게 걷고 있다.
가볍게 흉갑만 걸친 도시 모드가 아니라, 방패에 메이스까지 꺼내든 상태로.
“아니, 잠시만요! 기다려 보시라니까요?”
뒤에서는 어반스 영애가 거의 뛰듯이 따라오며 나를 말리는 중이다.
“뭘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지금 그렇게 하는 건 얀델 씨한테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
“제, 제가 해결할게요. 물론 얀델 씨의 도움이 있어야겠지만……. 얀델 씨가 힘을 빌려주고, 저는 머리를 쓰는 거죠. 어때요? 우리 꽤 잘 맞는 조합 아니에요?”
뭐래, 자꾸.
재잘거리는 말은 대충 무시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긴다. 투명 인간 취급을 받은 어반스 영애가 내 앞을 막는다든가 팔을 잡는다든가 하는 강수를 뒀지만…….
아니, 그게 되겠냐고.
“아, 진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질질 끌려가게 된 어반스 영애가 신경질적으로 들고 다니던 양산을 바닥에 던졌다.
다만 한순간의 화풀이였을까?
3초 안에 다시 양산을 집어 들더니, 다시금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저기, 그…… 미, 미안해요.”
“……?”
“얀델 씨한테 불똥이 튄 거, 저 때문일지도 몰라요. 제가 접근하지 않았으면 아버지도 그냥 내버려 두셨을 수도 있겠죠.”
“알고 있다니 그래도 염치는 있군.”
솔직한 사과에 나도 처음으로 답을 해 주었다.
물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잖아?
애초에 그렇게 진심인 거 같지도 않고.
“아니, 사과도 했는데!!”
오히려 속도를 올리자 딱 봐도 곱게 자랐을 어반스 영애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열심히 뒤를 따랐다.
아직 설득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
“후욱, 후욱, 후우……!”
거친 숨결을 토해내면서도 어반스 영애는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바로잡을 기회를 주세요. 제가 말해도 양심 없는 말인 건 알지만요. 아, 아버지 자리를 제가 물려받게 되면, 몇 배로 갚을 테니까……!”
슬슬 체력적 한계였을까?
점점 어반스 영애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속도를 살짝 낮췄다.
물론 얘를 도와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건 아니고…….
‘지역장과 만날 때 얘가 옆에 있는 편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네.’
다시 생각해 보니, 얘의 리액션을 이용해 내 결백을 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너무 느리게 가면 옆에서 시끄럽게 굴게 분명했기에, 일정 거리를 벌리고서 그 상태가 유지되게끔 속도를 조절했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탐험가 길드 제7 구역 중앙지부.]
도시의 각 구역마다 자리한 본점.
지나가다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여타 지부들에 비해 훨씬 더 크다. 본점에서만 가능한 업무가 있다 보니 탐험가들도 많이 보였고.
나는 잠시 문 앞에 서서 고민했다.
‘이걸 부숴, 말아?’
다만 내 모습이 망설임으로 느껴졌을까?
거의 땀으로 목욕을 한 꼴이 된 어반스 영애가 재빨리 말을 붙인다.
“그래요. 아직이라면 늦지 않았으니…….”
뭐래.
“좋아, 결정했다.”
“네?”
“부수기로.”
역시 이쪽이 마음에 든다.
***
콰아앙!
온 힘을 다해 닫혀 있는 문을 발로 찬다.
막나가는 바바리안의 모습을 보여 줘야 저쪽도 생각을 고쳐먹을 거 아니야.
아, 얘를 건드렸다간 정말 좆될 수도 있겠구나.
‘어차피 얘기가 잘 끝나면 수리비를 달라고도 못 할 테고.’
그게 아니어도 수리비쯤은 낼 재력이 된다.
한데 본점이라고 문에도 좋은 나무를 썼을까?
생각처럼 시원하게 박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꺄악!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
어반스 영애가 뭐라 하든 말든.
문을 관통한 다리를 도로 빼고서 침착하게 메이스를 쥐었다.
그리고 문짝을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
콰직! 콰직! 콰직!
바람이 솔솔 통하고 내부 공기가 좀 더 순환이 잘 되는 형태로 진화한 개방형 정문.
그 너머로 직원과 탐험가들의 시선이 보인다.
“……강도?”
“아니, 강도라면 은행에 가지 여기를 왜…….”
합리적인 의심을 뱉는 자부터 시작해, 마냥 멍하니 넋을 놓은 자. 단순히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자. 끝으로, 약삭빠른 탐험가답게 이 상황을 기회로 여기는 자까지.
“아가씨, 저거 해결해 주면 공적치 좀 주나?”
“네? 네! 그런 내규가 반년 전쯤에 만들어졌던 거로 기억해요!”
“잘 됐군.”
여직원 옆에 서 있던 대머리 아저씨가, 몸을 풀듯 팔을 돌리며 내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도 이런 놈이 있었다.
그러니까, 반년 전 내가 자유의 바바리안이 되었을 그때.
‘……설마 5등급 탐험가가 바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본점이라 방문자 수준도 높은 건가?’
빡빡이 아저씨는 자랑스럽게 허리에 걸고 있는 증명패는 5등급 탐험가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꿇릴 이유는 없겠지만.
오히려 내 전투력을 측정하기 딱 좋은 상대란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나는 너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비켜라.”
이 세계에 얼마 안 되는 현대인으로서, 일단 대화를 시도했다.
굳이 탐험가와 싸울 이유는 없다는 판단.
그러나 빡빡이 아저씨는 공적치를 얻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어이, 바바리안. 뭔가 길드에 불만이 있어서 이러는 모양인데, 그럴 거면 정식으로 절차를 받고 항의를 했어야지?”
“항의?”
“아, 절차가 뭔지도 모르나? 야만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야만인이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바리안들조차 스스로를 야만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우리뿐이다.
근데 그 간단한 이치도 모르다니!
“……넌, 머리에 문제가 있군. 아마 대머리가 된 것도 그래서겠지.”
“뭐? 이 새끼가……!”
역시 탈모 때문에 머리를 밀었는지, 빡빡이가 분개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던 차였다.
“그, 그만들 하세요!!”
어반스 영애가 나와 빡빡이 사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민간인을 다치게 둘 순 없는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빡빡이.
“비키시오. 저자는 감히 길드에서 난동을 부린 범죄자라오. 아가씨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함부로 저자의 편을 들었다간—”
빡빡이가 어반스 영애를 보며 위협적으로 콧김을 뿜어내던 그때였다.
“……어반스 아가씨?”
한 직원이 그녀의 신분을 알아보며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뭐? 어반스? 그럼 지역장의 딸?”
“그런 여자가 왜 저런 야만인을…….”
신분을 알아채고서 뭔가 잘못됐다 여겼는지, 일단 뒤로 쓰윽 물러나는 빡빡이 아저씨.
5등급이라 그런가?
역시 판단이 빠르다.
“아버지는 위층에 계시나요?”
“네? 네! 그렇습니다마는…….”
“함께 올라가도록 할게요. 그래도 괜찮죠? 여기는……. 알아서 잘 수습해 주세요.”
“예! 물론입니다!”
어반스 영애의 신분 덕분에 1층의 소란은 어찌 잘 무마하고서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삐걱, 삐걱.
중장비를 걸친 바바리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목재 계단.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방금은 왜 도와준 거지?”
“어차피 생각을 바꾸진 않으실 거잖아요.”
어, 그건 그런데…….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된다.
아군으로 포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왜 나를 도와주려 한 걸까?
“제 제안이 얀델 씨에게도 결과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원하지 않으신다니, 이게 맞겠죠. 괜히 저희 집안일 때문에 피해를 보게 해서 죄송해요. 들어가서도 아버지께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음, 이번에는 아까보단 진정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군.”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에? 이게 끝?”
그럼 뭐, 내가 마음이라도 돌릴 줄 알았나?
“네 야망은 네 손으로 이뤄라.”
귀찮은 일은 딱 사양이다.
아버지에게 자유를 박탈당한 딸이란 포지션도 솔직히 공감이 안 가고.
진정 독립을 바랐다면 전부 포기했으면 됐다.
지역장 딸이란 신분에서 오는 권리도, 의무도 전부 다.
“아가씨?”
이내 지역장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그 앞을 막아선 가드가 보인다.
“옆에 있는 그자는 누구입니까?”
“아버지를 찾아오신 손님분이세요.”
가드가 업무적으로 물었고, 어반스 영애는 일단 얼버무렸다.
똑똑, 문을 노크한 가드가 지역장에게 사정을 알리자 머지않아 승낙의 말이 돌아왔다.
“들어오라 하라.”
“무기는 갖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이내 나는 가드의 지시를 따르듯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콰직!
내 힘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
개방형으로 진화한 집무실의 문짝.
그 너머로 들어서니 탁상에 앉은 지역장이 펜을 쥔 채로 굳어 나와 어반스 영애를 번갈아 응시한다.
“이 무슨……!”
잠깐의 정적을 끝마치며 가드가 몸을 움직였고 그때 지역장의 입이 열렸다.
“그만, 자네는 나가보게.”
“하지만…….”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걸세.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자는 아니니까.”
“예, 그럼.”
평소 교육을 잘 시켰는지, 그 한마디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가는 가드.
물론, 문을 닫을 필요는 없었다.
그야 이제는 없어졌으니까.
“후…….”
복도에서 서성이며 얼타던 가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 지역장이 탁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따라서 나도 정면부에 착석했다.
푸지이익.
중갑 무장 바바리안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푹 꺼지는 소파.
바바리안답게 사과는 하지 않았다.
“소파가 낡았군.”
지역장의 이마에 혈관이 새파랗게 돋아났다.
그러나 소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판단했을까?
“……됐고, 용건이나 말해보게. 내 딸과 손을 붙잡고 찾아와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저, 아버지 그게…….”
“너한테 묻지 않았다.”
그 한마디에 어반스 영애가 돌처럼 굳었다.
대담하게 패륜 계획을 세우면서도 아버지는 또 무섭긴 했던 모양.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너네 집안일은 둘이서 알아서 해결해라.”
내가 오늘 이곳까지 찾은 첫 번째 이유였다.
“그 말은, 딸을 배신하겠다는 건가?”
“배신이고 뭐고, 손을 잡은 적도 없었다.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테고.”
지역장은 진의를 가리기라도 하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다.
판단은 얘의 몫일 테니까.
“그럼 딸과 함께 온 이유는?”
“자꾸 와서 귀찮게 굴기에 그냥 너한테 직접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따라오더군. 고블린처럼 쫄래쫄래.”
“그, 그건 얀델 씨가 사고 치기 전에 어떻게든 막으려고……!”
고블린이라는 단어에 어반스 영애가 발끈하며 입을 열었고, 예상대로 그 리액션이 도움이 됐다.
“그렇군. 자네 말은 믿겠네.”
오해를 풀겠단 첫 번째 목적은 해결이 된 셈.
“한데 그게 목적이라면 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건가?”
이내 지역장이 박살난 문을 보며 물었다.
“내 감정과는 관계없네. 부서진 저 문을 보며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나?”
글쎄, 직원과의 소통을 중시하며 감출 일이 없는 청렴결백한 대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하려는 말이 뭔지는 알겠다.
내가 자기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거겠지.
“당장 자네를 체포해 구금해도 어느 한 명 뭐라 말하지 못할 걸세.”
틀린 얘기는 아닌데, 무섭진 않다.
어차피 못 할 걸 아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막 나가는 거고.
“한번 체포해 봐라. 네가 한 짓도 전부 세상에 밝혀질 테니.”
“……그 탐색꾼 친구를 믿는 건가?”
“그럴 리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로트밀러를 이 사건에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카드도 있고.
“예전에 탈옥했을 때 네가 마법사를 회유하려 했던 영상의 복사본이 있다.”
“알테미온 학파의 그 아가씨가 내게 거짓말을 했군.”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고 했지, 사본을 만들지 않겠단 말은 안 했던 거 같은데?”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고서 말을 덧붙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우리 팀 마법사로 합류했지.”
쉽게 말해, 레이븐을 회유할 생각은 버리란 뜻.
지역장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이제 나는 처음 만났을 때의 좆밥 바바리안이 아니다.
“바바리안족의 후계자를 누명 씌워 죽이려 한 지역장이라니. 내년에 선거가 있을 거라던데, 물어뜯기 딱 좋은 구설수겠군.”
“……후계자?”
“아직 정보가 느리군. 얼마 전에 그렇게 됐다.”
지역장이 입을 꾹 다물더니, 약간의 텀을 두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뭔가?”
완전한 항복 선언.
슬슬 이곳에 방문한 두 번째 이유로 넘어갈 차례였다.
지역장은 로트밀러를 이용해 나를 해치려 들었다. 원래라면 머리통을 부숴도 세 번은 부술 만한 대죄.
물론 죗값을 받아내기 위해선 나역시 수없이 귀찮은 일들을 겪어야 하며, 이후로는 지역장과 완전히 원수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경고로 끝낸다.
용살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니까.
하지만…….
“또 다른 오해가 생기든, 아니면 그냥 내가 싫어서든 상관없다. 만약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한다면…….”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 대화는 안 해.”
살기를 개방하며 지역장을 노려보자, 녀석이 흠칫 굳는다. 고스트 버스터즈에서만큼 극적인 반응은 없지만, 이 정도면 경고 정도로는 충분히 와닿았을 터.
“…….”
용건을 끝마치자마자 미련 없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지역장이 툭 뱉듯이 물었다.
“대답은 듣지 않는 건가?”
글쎄, 대답을 들어 봤자 의미가 있을까?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지지지지직!
나와 지역장 사이에 있던 탁자 끝을 양손으로 잡고 팔 힘만으로 접어 버렸다.
“탁자도 많이 낡았군.”
오늘의 협상은 이걸로 끝이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럼 이만 난 가보겠다. 배가 고파서.”
이놈이 잃는 건 문짝이나 탁자 따위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