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탐험 (2)
아루아 레이븐.
찰랑찰랑거리는 금발.
150이 조금 넘는 작은 신장.
거기에 빼빼 마른 체형까지 덧붙여져 얼핏 보면 꼬맹이 같기도 하지만…….
얘가 정색하면 그렇게 무서운 게 또 없다.
바로 지금처럼.
“얀델 씨는 알았어요?”
아, 어…….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솔직하게 대답하자 레이븐의 눈매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다만, 나는 바바리안답게 목덜미나 긁적였다.
이미 미궁에 들어왔는데, 지가 어쩔 거야?
“앞으로 길은 내가 찾겠다. 아브만, 넌 포탈이 어디 있는지만 계속 알려 줘라.”
“……그러지.”
레이븐의 눈빛에 쫄은 건 마찬가지였는지, 곰아저씨도 긴말 않고 핸들을 내게 넘겼다.
자, 그럼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하, 진짜…….”
표정을 보니 사기를 당했다는 걸 깨달은 듯하지만, 레이븐은 일단 한번 지켜나 보자는 심정으로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니 이번 탐사에서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
인도자가 길치여도 탐사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는 걸.
저 조그마한 입에서 쌍욕이 날아들기 전에.
“그럼 출발하지.”
곰아저씨를 나침반 삼아 빠르게 길을 찾는다.
뒤에서 레이븐의 못 미더운 시선이 피부로 전해졌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동서남북 방향만 알아도 2층까지 찾아갈 수 있는 게 바로 1층 아닌가.
‘갈래길에선 통로가 더 넓은 곳으로만 가도 반 이상은 간댔지.’
‘둔덕진 곳은 막다른 길일 가능성이 높으니 피하라 그랬고.’
‘외곽에서 부터는 무조건 수정이 덜 박힌 어두운 길 쪽으로.’
순수 노력파 길잡이 로트밀러와 함께하며 곁눈질로 습득한 여러 꿀팁들.
이를 활용하며 막다른 길 때문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등의 동선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인다.
그리고 그 결과.
“오, 생각보다 빨리 왔는뎅?”
생각보다 이른 시간 내에 최외곽부 암흑지대에 도달했다.
아,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훨씬 쉬웠다.
원래라면 나침반에 의지하기보다는 주변을 수색하며 포탈을 찾아야 했겠지만…….
“저쪽이다.”
우리에게는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포탈의 위치를 인지할 수 있는 인도자가 있다.
따라서 그냥 그 방향으로 따라가면 끝.
물론 포탈은 한참 전에 다른 탐험가에 의해 개방되어 있었다.
「2층 고블린 숲에 입장했습니다.」
2층에 도달한 이후로는 레이븐의 표정도 제법 누그러졌다.
“2층까지 12시간이라……. 나쁘지는 않네요.”
그래, 세이프인 거구나.
하긴, 애초에 탐사 계획 단계에서 1층 돌파를 13시간으로 잡았으니 따질 명목이 없을 터.
“어쩐지 인도자가 있는데 넉넉하게 잡더라니.”
당했다는 눈빛으로 나를 흘기던 레이븐이지만, 의외로 뒤끝은 없었다.
설마 얘, 결과만 좋으면 OK인 타입인가?
‘합리적이군.’
그런 의미에서, 2층에서도 미리 세워둔 일정이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비록 24시간 내에 주파한단 타이트한 계획을 세우기는 했지만…….
“아브만, 방향은?”
“저쪽이다.”
고블린 숲에는 포탈 비석이 8개 존재한다.
다만, 한 개가 개방되고 나면 남은 비석은 그냥 돌덩이로 변한다. 따라서 후발 팀들은 최외곽부를 크게 빙 돌면서 포탈을 수색하는 게 정석이었다.
아, 참고로 평균 2, 3일이 걸린다고 들었다.
팀에 인도자가 없다는 가정하에.
‘인도자가 있으면 하루로 충분하지. 굳이 빙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나침반을 꺼내 들 것도 없이 우리들은 포탈이 개방된 방향으로 직행했다.
“레이븐, 빛구체 마법을 늘릴 수 있나?”
“세 개 정도는 부담 없어요.”
전문 탐색꾼의 부재가 문제 될 일도 없었다.
덫이 숲 전체에 깔린 필드라는 것?
대낮처럼 온 사방을 밝게 비춰 버린 이상, 이는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뭐, 빛을 보고 고블린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긴 했지만…….
“그륵—!!”
이제 고블린은 수십 마리가 한 번에 덤벼도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을 지경이라 말이지.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겠다.”
오후 9시쯤 야영을 준비했다.
장소는 홉고블린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고블린 숲 외곽부.
“……원래 탐험가들은 이렇게 강행군을 하는 건가요?”
제대로 된 첫 탐사가 처음인 레이븐에게는 꽤 힘든 하루였을 터이나, 원래 생체 리듬은 체력 여유가 있는 첫날에 제대로 맞춰 줘야 하는 법.
“어지간하면 계속 이 시간에 야영을 할 거니, 내일부터는 조금 더 편할 거다.”
“……뭐, 진짜 탐험을 하는 느낌이라 흥미롭긴 하네요.”
“그만 떠들고 얼른 잠이나 자라. 내일도 계속 이동을 해야 하니.”
“네. 일이 생기면 깨워 주세요.”
관례대로 레이븐은 불침번에서 제외됐다.
알람 마법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1인분을 했다고 인정해 주는 것.
“저기, 비요른……. 아이나르 말인데, 이따가 혼자 세워 둬도 괜찮은 거냥?”
미샤가 자기 다음 순번인 아이나르를 보며 조심스레 걱정을 내비쳤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괜찮다. 졸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아이나르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선 믿을 만하다.
인간 불신이라는 특성도 있고, 바바리안 자체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걸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둘이 다닐 때도 불침번은 잘만 섰다.
그땐 불침번도 네 시간씩 서는 데다가, 잠도 얼마 못 자서 훨씬 더 피곤했을진데도.
“으음, 그렇구낭……. 내가 좀 선입견이 있었나 보다.”
레이븐을 제외한 넷이서 2시간씩 교대로 불침번을 선 8시간의 야영을 끝낸 뒤에는 이른 아침부터 탐사를 재개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기 전에 포탈을 발견했다.
「3층 순례자의 길에 입장했습니다.」
3층에 도착한 후로도 탐사는 순조로웠다.
전투는 실전 연습도 안 될 만큼 손쉬웠으며, 길 찾기도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곰아저씨도 1층이나 도시처럼 길이 없는 곳에서는 길을 잃지 않았으니까.
「캐릭터가 특수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필드 효과 - 마녀의 숲이 부여됩니다.」
내심 걱정했던 마녀의 숲도 마찬가지였다.
굴비처럼 몸을 밧줄로 이은 뒤 곰아저씨를 앞세우고서 따라가는 방법으로 쉽게 클리어가 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바로 지금.
“오오, 탑이다! 비요른! 정말 숲 한복판에 탑이 있었다!!”
“후후,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않냥? 미궁엔 신기한 것들이 많다고.”
“베헬—라아아아아아아!!”
“……그래, 왠지 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던 거지?”
우리는 4층 포탈 앞에 도달했다.
그것도 고작 8일차 오후가 되는 시각에.
‘이 정도면 로트밀러가 있을 때랑 거의 비슷한 속도네.’
그 사실이 흡족스러운 한편으로는, 왠지 씁쓸하기도 했다.
역시 노력으로는 재능을 이길 수 없는 건가?
“얀델 씨, 무슨 생각 해요?”
“아, 별거 아니다.”
“그, 그럼 얼른 들어가면 안 돼요? 숲 전체에 불길한 마력이 진동을 해서 속이 울렁거리는데.”
타고난 마력 감응도가 뛰어난 탓일까?
먹은 걸 토해내지만 않았다 뿐이지, 레이븐은 드왈키보다도 심하게 멀미를 했다.
그래서 나도 어서 편하게 해주고 싶지만…….
“조금 기다려라, 포탈 색이 바뀌어야 들어갈 수 있으니.”
“아, 맞다. 들어 봤어요. 다른 팀이 먼저 들어가 있을 수도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거랬죠?”
“안 그러면 약탈자로 오해받고 공격 당할 수도 있으니까.”
합리적인 이유를 대자 군말없이 인내하는 레이븐.
머지않아 포탈의 색이 변하였다.
“자, 그럼 어서 들어가지.”
이제 본격적인 등반을 해 볼 시간이다.
***
「4층 천공의 탑에 입장했습니다.」
***
천공의 탑.
매 스테이지마다 무작위 조합의 몬스터 무리가 출현하는 독특한 형식의 계층.
평소 수련의 탑이라 부르던 곳이니 만큼, 나는 이곳에서 제대로 합을 맞춰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전력 차면 의미가 없겠네.’
첫 전투를 치른 후 나는 깨달았다.
팀 반푼이와는 전투력 수준 자체가 다르다.
4층에서는 전력을 다해 합을 맞춰 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캐릭터가 [거대화]를 시전했습니다.」
[합일]에 의해 크기뿐만 아니라 성능까지 크게 증가한 초거대 메이스. 공격기인 [휘두르기]까지 합쳐지니, 7등급 몬스터가 정말이지 고블린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핵심은, 메인 딜러가 따로 있다는 것.
「아브만 우리크프리트가 [위험물질]을 시전했습니다.」
원샷 원킬을 넘어, 주변 일대를 쓸어버리는 5등급 궁수인 곰아저씨의 막강한 딜과 ‘철웅’이란 이름의 상급 탱커 소환수.
「아루아 레이븐이 6등급 공격 마법 [화염세례]를 시전했습니다.」
거기에 4대 속성 공격 마법은 물론, 백여 종 이상의 저주 및 보조 마법을 보유한 정통 마법사 레이븐의 미친 유틸성까지.
‘그래, 캐리할 수 있는 포지션이 팀에 세 명은 있어야지.’
팀의 완성도가 확 올라갔다.
6등급 이하라면 어떤 괴상한 조합으로 무리가 출현하든지 간에, 3분 내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공략이 가능할 수준.
‘우리 셋에 비해 부족할 뿐이지, 아이나르나 미샤도 한몫은 제대로 하고 있고……. 역시 지금 상태로도 5층은 무리가 없겠군.’
따라서 굳이 손발을 맞추며 연습하기보다는 천공의 탑을 오르는 것에만 주력했다.
다만, 생각처럼 속도는 붙지 않았다.
지극히 간단한 이유였다.
전투 속도 자체는 팀 반푼이와 비교가 불가할 정도지만…….
우리 팀에는 전문 탐색꾼이 없으니까.
‘다 좋은데, 지혜의 시련을 클리어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게 아쉽네.’
지혜의 시련은 일종의 지름길이다.
함정과 몬스터로 가득한 미로를 지나쳐야 하는 대신, 한 번에 5스테이지를 스킵하게 해 줬다.
뿐만 아니라, 용기의 계단과 달리 다음 계단을 택하기까지 4시간의 쿨타임도 없었는데…….
로트밀러는 클리어까지 약 1시간이 걸렸다.
지금 우리는 딱 그 다섯 배 정도가 소요됐고.
“비요른, 그냥 몬스터랑만 싸우면 안 되나?”
갑갑한 건 나도 아이나르와 마찬가지였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용기만 골라서 100 스테이지까지 도달하려면 16일이 넘게 걸리니까. 미궁 폐쇄 전까지 4층을 돌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군. 이만 쉬고, 내일 마저 올라가겠다.”
탑에 들어와 지혜의 시련을 한 번 깼을 뿐인데, 벌써 오후 10시가 넘은지라 야영을 준비했다.
물론, 평소의 야영과는 사뭇 날랐다.
불침번 순서를 정할 것도 없이 각자 원하는 자리에 침낭을 까는 것으로 끝.
“미궁인데 불침번을 안 서도 된다니!! 미샤, 나 지금 머리가 띵하다!!”
“후후, 무슨 느낌인지 알 거 같당.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쉽게 적응이 안 돼서 잠이 잘 안 왔—”
드르러러러러렁-!
“야, 사람이 말을 하는데……!”
아이나르는 침낭에 눕자마자 그대로 기절했고, 미샤는 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물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잘 준비를 시작했다.
“비요른, 왜 자꾸 이쪽을 힐긋힐긋 보냥?”
“안 봤는데.”
“자자, 어서 고개 돌려랑. 우린 동료 아니냐, 동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 없당?”
아니, 그러니까 안 봤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메이스에 묻은 피를 닦는 일에 집중했다.
다만,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을까?
“칫.”
나 보고 들으라는 듯 미샤가 입맛을 다신다.
우리 여관으로 이사를 오고서 생긴 변화다.
없던 일처럼 지내자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장난스레 그날의 일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뭐, 그렇다고 불만은 없지만.
‘……차라리 이런 게 나을지도.’
미샤는 내게 마음을 밝혔고, 나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아무리 없던 일로 하고자 해도 없던 일은 될 수 없다.
그래서 얘도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 거겠지.
매번 그 일을 의식하며 말조심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덜 어색하니까.
“그럼 나는 먼저 잔당.”
“그래.”
이내 미샤도 침낭에 들어가 눈을 붙였고, 옆을 확인해 보니 곰아저씨도 구석에 침낭을 펼쳐놓고 잘 준비를 하고 있다.
드르러러러러렁-!
장비를 정비하는 김에, 아이나르의 대검도 집어다가 대충 닦아 줬다.
그러고 있자니 레이븐이 슬며시 다가왔다.
“할 말이라도 있나?”
“네.”
“말해 봐라.”
“제가 계산을 해 봤는데, 오늘 같은 속도로는 5층에 도착해서도 얼마 못 있어요.”
……그걸 계산을 또 해 본 거구나.
쩝,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물론, 얘의 걱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여기서 낭비한 시간만큼 5층에서 활동 가능한 시간도 줄어들 터.
“그만큼 다른 팀에 비해 소득도 떨어지겠죠.”
“……이번이 첫 탐사 아니냐. 지금이야 전문 탐색꾼이 없어서 시간이 걸리지만, 점점 더 빨라질 거다.”
“그렇다면야.”
레이븐은 이를 끝으로 아무런 말도 않고 본인 침낭으로 돌아갔다.
내 말을 전부 납득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 계속해서 오늘처럼 지혜의 시련을 넘는 데 5시간씩 걸린다면 그때 다시 찾아올 터였다.
극단적인 해결법을 들고서.
‘……됐고, 이만 잠이나 자자.’
잘 닦은 대검을 아이나르의 옆에 내려놓고서 내 침낭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눈을 붙이고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씨, 가만히 듣기만 하세요.]
레이븐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잠에서 깼다.
‘전음’ 마법이었다.
다만, 굳이 마법까지 써가며 자던 나를 깨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몸을 씻다가 뭔가 싸해서 탐지 계열 마법을 써봤는데…….]
[여기, 우리 말고 한 명이 더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 사정은 실로 간단했다.
어떻게 이리도 침착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 지금 바로 제 뒤에 있거든요.]
자칫하면 우리 마법사가 뒈지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