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리더 (3)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은 두터운 뼈.
「아벳 네크라페토가 [뼈갑옷]을 시전했습니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뼈에 옮겨붙은 불은 금방 꺼졌으나, 통로에 남은 불길은 벽이 되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흐음, 도망칠 줄은 몰랐는데.”
따라갈까?
타오르는 불길 너머를 보며 고민하던 사내는 이내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방법.
그 두 번째가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단장님, 기사의 시체입니다.]
[역시 이곳에도 손을 써뒀다는 거군. 지금부터 다들 경계해라. 분명 근처에 적이 있을 거다.]
2층 포탈과 이어진 다른 통로에서 탐험가들이 때마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숫자는 약 20명.
같은 문양의 표식을 상의에 달고 있는 걸 보니 소규모 클랜인 듯한데…….
“쯧.”
사내가 불만스레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번 거사에서 맡은 임무는 2층 포탈을 타고 도망치는 자를 막는 것.
원래라면 용살자가 맡을 예정이던 임무였다.
“하여간 그 뱀눈깔 새끼는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아마 놈이 제때 몸만 회복했더라면, 자신은 예정대로 중심부에서 주특기인 대량 학살에 힘을 실을 수 있었을 터.
“뭐, 도망간 놈이야 저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역시 굳이 튄 놈을 쫓아가 죽일 이유는 없다.
생각만 해도 벌써 귀찮은 짓이니까.
나야 그냥 내 일만 하면 그만.
그런 마음으로 2층 포탈을 향해 이동하던 때였다.
지이이잉.
주머니에서 메시지 스톤이 진동했다.
[네크라페토, 그쪽 상황은? 목표 지점에는 잘 도착했나?]
“오, 부단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착은 한참 전에 했고, 지금은 쥐새끼 하나 도망가지 못하게 잘 틀어막은 상황입니다. 피시싯!”
당당히 말했건만, 대답은 한참의 간격을 두고서 돌아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답조차 아니었다.
[……뭐지, 그 말투는? 그 이상한 웃음소리는 또 뭐고?]
“이상한 웃음소리?”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던 사내였지만, 이내 말의 의미를 깨닫고서 피식 웃었다.
“아, 그냥 버릇이니까 부단장은 신경 쓰지 마.”
[버릇?]
“어, 가면을 썼을 때면 나오는 버릇.”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뭔가 이상이 생긴다면 즉시 연락해라.]
이를 끝으로 연락은 끊겼다.
사내는 보급품이랍시고 받은 해골 가면을 검지로 툭툭 쳐보았다.
불현듯 원탁의 회원들이 떠올랐다.
‘일단 여우랑 고블린은 무조건 들어왔을 텐데.’
과연 다음 집회 때 몇 명이나 멀쩡히 살아서 참석할까?
벌써 기대가 됐다.
***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다.
혹여나 놈이 쫓아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허억, 허억.’
그렇게 통로를 내달리고서 10분이 넘어가던 때였다.
“따돌린 건가…….”
곰아저씨가 중얼거렸다.
플래그 같은 대사라 일순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굳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긴 했으니까.
‘정확히는 따돌린 게 아니라, 놈이 쫓아오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숨 돌렸다는 건 분명한 사실.
“지금부터는 속도를 낮추지.”
“……더 도망가지 않고?”
“조심해야 할 건 그놈만이 아니니까.”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안개로 자욱한 수정동굴.
너무 속도를 올려 버리면, 예기치 못한 위험에 제때 대처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미 1층 전체가 지뢰 밭이라 봐도 무방—
“비요른, 역시 싸우는 게 옳지 않았나?”
응?
“그게 무슨 뜻이지, 아이나르?”
“시체 수집가라니. 네 이름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근데 그 기회를 두고 도망치다니!”
그래, 어쩐지 내내 조용히만 있더라니.
이게 마음에 안 들던 거였구나.
얘는 나를 무슨 고대의 영웅 바바리안처럼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명성을 얻을 기회는 무슨.
‘아무도 안 다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구만.’
네크로맨서의 진가는 아공간에서 시체를 꺼낼 때부터 발휘된다.
또한, 시체 수집가에게는 그 명성을 만들어 준 넘버스 아이템도 있다.
용살자의 용살검과 비슷한 느낌의 시그니처.
만약 놈이 그것까지 꺼냈다면 분명 우리 중 몇 명은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나르, 억지 부리지 마랑.”
내가 나설 것도 없이 미샤가 싸늘하게 일침 하자 아이나르가 움츠러들었다.
“나는 괜찮다……! 그래도 어른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걸 어린 전사들에게 뭐라 말을 한단 말이냐……!”
아, 이제 보니 그게 진짜 문제였구나.
아이나르는 성지에 가서 매번 나와 함께 있었던 탐사에 대해 얘기를 한다.
거의 신격화하는 듯한 내용이라 낯이 뜨거울 정도였으나, 부족 내 지지도를 올리는 거라 생각해서 그간 내버려두었다.
“그냥 대충 둘러대면 되는 거 아니냥.”
“그런! 전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읍! 계속 말대꾸할래?!”
미샤가 강하게 타이르자 아이나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축 가라앉은 어깨가 왠지 내 맘을 아프게 했다.
바바리안은 늘 당당한 게 매력일진대.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아이나르, 우린 지금 도망친 게 아니다.”
“응?”
“놈이 우리를 보고 도망친 거다.”
흔한 바바리안식 정신 승리.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놀리지 마라……. 나도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다!”
음, 그건 몰랐는데.
나는 정색한 표정으로 재차 말을 이었다.
“놀리는 게 아니다. 아이나르, 현명한 전사는 싸울 장소를 고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우리에게 유리한 전장에 서기 위해 뒤로 돌진했더니, 놈이 그걸 알고 도망친 거다.”
아이나르는 고뇌하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통한 모양. 이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아이나르가 다시 평소처럼 밝아졌다.
“얀델 씨는…….”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에요. 그냥… 리더는 역시 이런 사람이 해야 하는구나 싶어서.”
묘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내젓는 레이븐.
실의에 빠진 아이나르를 위로하는 내가 제법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그럼 계속 이동하지.”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다시 사방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통로를 나아갔다.
목적지는 1층의 중심부.
지금쯤 한창 피바람이 불고 있으리라 판단한 바로 그곳.
“차라리 다른 쪽 포탈을 뚫는 게 낫지 않나?”
“어차피 그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2층으로 향한단 선택지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고블린 숲으로 가는 길목에 시체 수집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았던가.
‘아마 포탈을 막으려는 거겠지.’
내 예상대로라면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다른 쪽 포탈에도 대기 중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야, 네 판단을 따르지. 얀델, 넌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으니까.”
그렇게 안개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서 얼마나 흘렀을까.
철컥, 철컥.
정면부에서 10명가량의 인물이 나타났다.
인기척을 느꼈을 땐 이미 서로가 시야 범위 내에 들어선 상황.
다행히 적은 아닌 듯했다.
“……기사군.”
전원이 기사 갑주를 입었을뿐더러, 갑옷마다 소속된 가문의 문양도 박혀 있다.
뭐, 이것도 맘 먹고 위장을 하려 한다면 못할 건 아니지만…….
“탐험가, 인식표가 보이도록 손목을 들어라.”
저 오만한 말투를 보니 역시 오리지날 같다.
따라서, 일단 지시대로 손목의 인식표를 보여 주며 물었다.
“인식표가 의미 있는 상황인가?”
내심 내가 가장 궁금해하고 있던 그 정보.
기사는 짧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우리 쪽 인식표를 갖고서 기습을 해온 자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도 꽤 피해를 봤지.”
“그렇군.”
“궁금증이 풀렸으면, 이제 무기를 내리고 벽에 붙어라.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이후 기사가 위압적으로 말했고, 나는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진짜 분위기가 살벌했거든.
여기까지 오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른 것인지, 기사들 전부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물어볼 건 더 물어봐야겠지만.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말해 줄 수 있나?”
“……수상한 질문이군.”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바로 2층으로 달렸던 상황이라 말이지. 안쪽에는 정보가 없다.”
“흐음.”
걸음을 멈춘 기사가 나를 응시한다.
내 말이 진짜인지를 판별하는 듯한 시선.
그 꺼림칙한 눈빛에 괜히 물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차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알테미온 학파 소속 마법사 아루아 레이븐입니다.”
레이븐이 본인 신분을 밝히며 앞으로 나섰다.
“저희 신분이 의심되는 거라면 마법을 써서 증명할 수—”
“그만, 더 다가오지 마라. 죽고 싶지 않다면.”
“아니, 저는—”
“노아르크에 마법사가 없을 거 같나?”
기사가 살기 어린 음성에 레이븐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
“…….”
어느샌가 장내에 감돌기 시작한 무거운 침묵.
“가르피젤 경, 그들이 노아르크 측 인물일 리는 없으니 그 부분은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후열에 있던 기사가 껴들며 상황이 반전됐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보장하지?”
“꽤 유명한 탐험가니까요.”
“흐음, 이자가?”
리더로 보이는 기사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아나?”
“알다마다.”
내 질문을 받은 기사가 투구 앞면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기억에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름이…….
“칼스 에리모어?”
“기억해 주다니, 이거 영광이군. 오랜만일세”
칼스 에리모어.
백작가에서 만났던 마르토앙 남작가의 기사다.
견습이긴 했지만 아무튼.
흔치 않은 탐험가 출신이라 나와도 제법 잘 어울렸었다.
그나저나 얘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래서 이자는 누구인가?”
“이름은 비요른 얀델, 도시에선 작은 발칸이란 이명으로 더 유명합니다.”
칼스와의 인연을 통해 내 신원이 증명되자, 나를 보는 기사의 눈빛도 바뀌었다.
“작은 발칸이라……. 나도 지나가며 들어 본 적 있다. 사교계에선 기사분쇄자란 웃긴 이름으로 불린다지?”
그의 시선은 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래도 적이란 의심만은 사라졌으니 이전보다야 훨씬 나아졌다고 볼 수 있을 터.
“그래서, 이제 상황이 어떤지 들을 수 있겠나?”
기사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미궁에 진입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노아르크 측 탐험가들이 공격을 해왔다는 것.
그중 인식표를 지닌 놈도 숨어 있어서 초기에 피해가 상당했다는 것.
안개가 생겨난 뒤로는 중심부의 암흑지대에 군집해 탐험가를 보호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단 것까지.
“중심부의 암흑지대라면, 그 기념비가 있는 그곳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곳으로 가라. 거기까지 도착할 수만 있다면 안전할 거다.”
듣던 중 다행인 소식.
나는 당장 떠나려는 녀석을 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너희는 혹시 포탈로 가는 건가?”
“……그걸 왜 궁금해하지?”
거, 까칠하긴.
“우리가 거기서 오는 길이라서 말이지.”
“흥미롭군.”
나는 관심을 보이는 기사에게 아는 정보를 말해 주었다.
그야 일단 같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개죽음을 당하게 둘 수는 없지.
“포탈 근처에 시체 수집가가 있다. 그러니 통로에 시체가 보인다면 경계해라. 그놈도 너희를 발견했단 뜻이니.”
의외로 기사는 내 말을 경청하더니 반문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에는 정보 하나하나가 귀중한 법이지. 시체 수집가라……. 말해 줘서 고맙다.”
놀랍게도 감사 인사까지 입에 담으며 내게 반지 하나를 건네는 기사.
“만약 기사가 너를 의심하면 이걸 보여 주고 내 얘기를 해라. 그럼 신원이 보증될 거다.”
“……이건 잘 쓰지.”
“그럼 이만, 시간이 없어서.”
냉큼 반지를 건네받자마자 기사는 무리를 이끌고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전처럼 얄밉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제 보니 도리를 아는 녀석이었으니까.
‘사이즈 조절 마법은 안 박혀 있나 보네.’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보려 노력하던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미샤에게 주었다.
“에? 나? 내가 끼라고?”
“내 손에는 맞지 않아서.”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징?”
이내 다소곳하게 왼쪽 손을 내게 내미는 미샤.
뭐지? 끼워달라는 건가?
“크흠…….”
나는 손등이 아래를 향하도록 손을 뒤집은 뒤 그 위에 반지를 올려 주었다.
“네가 껴라.”
“치, 부끄러워 하기는.”
……뭐래.
***
기사단을 만난 후로 우리는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외곽에서 벗어나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피 냄새가 진해졌다.
“여기에도…….”
“그만 보고 계속 움직여라.”
어디를 가든 몇 분 간격으로 보이는 시체.
거진 전부가 벌거벗은 상태였다.
이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겨가는 거구나.
뭐, 피차일반이니 뭐라 할 말은 없겠다마는.
“얀델! 기습이다!!”
이곳까지 오며 전투도 꽤 있었다.
이번 거로 한 아홉 번쯤 되려나?
한 번은 인식표를 확인한 후 뒤를 돌았을 때 불시에 덮쳐들었고, 나머지는 전부 마주치자마자 무기를 꺼내들고 덤벼왔다.
대부분 우리와 같은 5등급 수준이었지만…….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베헬—라아아아아아!!!”
평균을 놓고 보면 우리는 꽤 강한 편이니까.
슬슬 6층을 바라볼 정도로 성장한 데다가, 전문 탐색꾼을 두지 않았기에 전투력도 높은 편이다.
“비요른, 도망친 두 명은 어쩔 거냥?”
“냅둬라. 그럴 시간까지는 없으니, 장비만 어서 챙기고 다시 이동하겠다.”
이동 거리가 늘어날수록 아공간에 차곡차곡 쌓이는 장비들.
무한 PK 컨셉의 던전에 들어온 기분이다.
‘1층에서 이런 박진감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서서히 불안감이 커진다.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나아가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게 지속될까?
“비요른…….”
“걱정 마라.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애써 불안한 티를 내지 않으며 계속해서 팀을 이끌고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정지.”
여러 갈림 길로 나뉘는 교차로에서 우리는 낯선 탐험가 무리와 조우했다.
숫자는 무려 서른 명가량.
고된 전투를 끝내고 쉬는 듯하던 그들은 우릴 보자마자 경계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만약 얘네가 노아르크 쪽 무리라면 우리는 좆된 거나 다름없—
“어……! 아, 아저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