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240화 (240/549)

240화 송곳 (5)

책 내음이 은은하게 감도는 서재.

“그곳은 어땠습니까?”

사내의 물음에 금발 머리의 여성, 소울퀸즈는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곳이던데요.”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시체 수집가가 일개 회원으로 있으며, 그런 자조차 전혀 맥을 못 추는 장소라니? 커뮤니티 내에 이런 채팅방이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건 이런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시겠죠?”

소울퀸즈는 그를 놀리듯 웃었고, 사내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야 그녀를 ‘원탁의 감시자’로 잠입시킨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어쩌면 원탁의 감시자가 우리 눈을 피하기 위해 만든 그들의 모임 같은 걸 수도 있겠군요.]

왕가에서 보낸 스파이.

혹은 이계의 플레이어.

두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내는 그녀를 그곳으로 보냈다.

하면, 그 결과는 어떨까.

소울퀸즈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러브 님의 촉이 이번에도 맞은 거 같네요.”

“어느 쪽으로 말입니까?”

“역시 원탁의 감시자는 이계의 플레이어가 만든 곳인 듯해요.”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소울퀸즈는 천천히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던 수사자.

시체 수집가라는 정체가 들통난 광대.

왕가 측으로 추정되는 사슴뿔과, 평범하기에 더욱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고블린.

“음, 여우 님은 잘 모르겠네요. 말이 없는 편은 아닌 거 같은데, 이번엔 딱히 대화를 나눠 보지 못해서.”

그럼에도 여우는 주의할 만한 여자였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마지막에 수사자에게 대화를 청했으니까.

만약 그게 일종의 ‘접선’인 거라면?

“수사자라는 회원이 의심되는 거군요.”

“네, 만약 이계의 플레이어가 그들 중에 섞여 있는 거라면 그 남자 말고는 없어요.”

이후 사내는 근거를 물었고, 소울퀸즈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시체 수집가인 그를 살기만으로 정신 오염 직전까지 몰고 갔어요. 딱 한계치에서 살기를 거두는 걸 보면 그러고서도 한참 여유가 있던 거 같더라고요.”

이것만으로도 명백하다.

보통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백 년도 전에 이 세계에 떨어져 생존해 온 또 다른 차원의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심지어, 근거는 이것만이 아니다.

두 번째 바퀴에서 수사자는 말했다.

[고스트 버스터즈를 만든 건 다른 세계의 악령이다.]

커뮤니티를 만든 게 GM이 아니라는 자신의 말에, 극소수밖에 알지 못하는 정보를 장난처럼 꺼냈다.

마치 이쪽의 정체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때 그녀는 확신했다.

[그래, 역시 그랬던 거군요.]

안 그래도 위험해 보이던 이 남자는 역시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처음부터 시체 수집가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했지요?”

“네, 참고로 회원들은 수사자가 자기들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것참 수상하군요.”

커뮤니티 내의 보안은 절대적이다.

관리자 권한을 넘겨받아 지금의 고스터 버스터즈를 만들어 낸 그조차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

“그는 어떻게 그들의 정체를 알았을 거라 생각하세요?”

“글쎄요, 만약 정말로 알고 있던 거라면 가능성은 둘이군요.”

소울퀸즈의 질문에 사내는 총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내놓았다.

“하나, 수사자가 이 아공간을 창조한 이계의 대마법사에 준하거나 그런 존재를 동료로 두고 있을 경우.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수사자가 원탁의 감시자를 만든 그자와 한패일 경우, 맞죠?”

“예, 맞습니다. 일단 지금 회원들은 전부 그 ‘마스터’라는 자가 모은 것이니, 귀뜸을 받았다면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제 정체를 알고 있는 건 말이 안 돼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한번 미끼를 던져 보세요. 정말로 그 남자가 소울퀸즈 님의 정체를 아는 건지, 아닌지.”

“그럴게요.”

“아무튼, 그럼 이제 마스터에 관한 정보가 중요해지는군요. 혹시 알아낸 게 있습니까?”

“마스터는 아직 못 만나 봤어요. 하지만 그때 이상한 접속 기록이 있던 날, 이곳을 방문했다는 건 집회가 끝나고서 고블린 님한테 들을 수 있었죠.”

“그럼 그날 커뮤니티에 몰래 들어왔던 자가 닉네임 ‘0720’가 맞단 뜻이군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죠.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는데, 아직 고블린 님도 저를 경계하는 거 같아서…….”

이후로도 둘은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비단 ‘원탁의 감시자’에 관한 이야기만을 주제로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있었던 사건.

너무도 많이 죽어 나간 플레이어.

앞으로 신규 회원 영입을 늘리려면 어떤 방식이 가장 효율적일지.

그리고…….

“이백호 님은 어쩌실 거예요? 러브 님을 찾겠다고 마탑을 뒤집고 다니는 중이잖아요. 지금에야 러브 님도 여러 용의자 중 한 명일 뿐이지만, 언제까지고 정체를 숨기긴 어려울 거 같은데…….”

최근에 있었던 가장 골치 아픈 사건까지.

“백호 씨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일단 정황상 왕가와 적대 관계가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신중해야 하니까요.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네, 그 부분은 러브 님께 맡길게요.”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차였다.

“엘프눈나, 그 사람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죠?”

“게시글이 다 지워져서 복구하는 데 조금 많은 시간이 걸릴 거 같아요. 그래도 GP는 꽤 많더라고요.”

“백호 씨한테 받은 겁니까?”

“아뇨, 거의 전부 첫날에 벌었어요. 몇 가지 고급 정보들을 팔아서요.”

이어 소울퀸즈는 게임을 어느 정도 했으면 알 수 있는 그런 정보였으며, 그가 남긴 게시글과 댓글은 전부 삭제되어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부연해 설명했다.

“흐음, 그렇군요…….”

사내는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팔걸이를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가 ‘엘프눈나’의 뒤를 캔 이유는 하나였다.

‘비요른 얀델’과 ‘엘프눈나’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판단했으니까.

비요른 얀델.

역대급의 성장 속도를 보여 준 바바리안.

그는 특이하게도 성인식 때 방패를 택했다.

엘프눈나.

커뮤니티 내에서 게임 내 정보를 팔아 GP를 쉽게 획득했다.

또한, 이백호가 형으로 따르는 ‘한국인’이다.

이는 사내에게 몹시나 중요한 점이었다.

만약 둘이 동일 인물이라면,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분’일 가능성이—.

‘…잠깐만.’

불현듯 뇌리에 스친 생각에 사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소울퀸즈 님.”

“네, 말씀하세요.”

“아까 그 수사자, 동양인이라고 했던가요?”

“네, 가면은 그렇다 쳐도 피부색은 숨길 수가 없으니까요.”

서구권 게임답게 플레이어 중 아시아계 비율은 굉장히 적다.

이백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을 기다리며 채팅방을 열었지만, 동향 사람을 만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동향 사람이 ‘엘프눈나’.

‘비요른 얀델’과 동일 인물로 의심받는 중인 바로 그였다.

“수사자가 확실하게 언급한 건 광대의 정체 하나, 맞습니까?”

사내가 자세를 고쳐 잡고 물었다.

“어, 이번이 첫 방문이라 확답하긴 그렇지만 분위기상 그랬던 거 같아요.”

“그렇단 말이지요…….”

사내가 말꼬리를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게, ‘비요른 얀델’은 가장 최근에 ‘시체 수집가’와 전투를 펼쳤으니까.

정말로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물론 ‘엘프눈나’와 동일인인지도 알아 내지 못했기에 아직은 터무니없는 비약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비요른 얀델의 작위 수여식이 언제죠?”

“사흘 뒤인 거로 기억해요.”

“사흘 뒤라…….”

이내 사내는 결정을 내렸다.

“오랜만에 외출을 하겠군요.”

백날 고민만 할 바에야 직접 만나나 보자고.

***

“야, 일어나랑, 일어나! 일어나라고오!”

커뮤니티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미샤의 등짝 스매시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에 살기까지 쓰고 왔더니 정말 피곤해 뒈질 거 같았지만…….

“어제 뭐 했기에 이렇게 아침부터 비실거리는 거냥!”

커뮤니티에 다녀온 다음에는 무리해서라도 제때 일어나는 편이 좋다.

이곳에 대해 아는 자가 있다면, 이날에만 늦잠을 자는 내 모습조차 수상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제 날 보는 시선도 많아지기도 했고.

‘빌어먹을 암살자 새끼도 올 거랬지…….’

어제는 지쳐서 그냥 쓰러졌지만, 앞으로는 밤잠도 제대로 못 잘 거 같다.

하, 진짜 짜증 나게.

‘왜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지금 몸 상태로는 평소처럼 싸울 수도 없을 텐데.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얼른 세수만 하고 1층으로 내려가 다 함께 식사를 했다.

조금은 낯선 광경이었다.

그야 평소의 아침 식사에 새로운 인물이 한 명 더 늘었으니까.

“이, 일어나셨어요?”

“그럼 일어나지.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아라. 음식 식겠다.”

“네, 네!”

어딘가 긴장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아 깨작깨작 밥을 먹는 에르웬.

“…….”

평소와 달리 어색한 침묵이 식탁 위에 감돌기 시작한다. 다행히 그 공기를 느낀 미샤가 먼저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떠냥? 내 음식은?”

“마,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랑. 이따가 저녁에 해 줄 테니까. 아, 그리고 못 먹는 재료가 있으면 이따가 알려 주고.”

늘 그렇듯 세심한 부분까지 먼저 챙겨 주는 미샤.

“당근! 나는 당근을 못 먹는다!”

아이나르가 이때다 싶어 껴들었다가 등짝을 맞았다.

후, 그게 되겠냐고.

나도 열 번은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우린 맨날 고기만 먹으니 이런 거라도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던가?

‘마음은 고마운데 말이지…….’

쩝, 바바리안에겐 바바리안의 삶이 있는 것일진대.

“서,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식사가 끝난 후에 아이나르는 늘 그랬듯 외출해 성지로 떠났고, 남은 셋끼리 시간을 가졌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서열 정리가 완벽하게 끝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에르웬, 이제 여기 와서 앉아 봐랑. 우리도 얘기 좀 해 봐야지.”

“네, 네!”

“이런 걸 묻는 게 조금 이를지도 모르겠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냥? 일단 우리 팀은 이미 꽉 찼는데.”

“그건…….”

에르웬이 말꼬리를 흐리며 내 눈치를 본다.

클랜 관련 얘기를 해도 되냐는 거겠지.

뭐, 하면 안 될 이유는 없지만…….

당장 긴 얘기를 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일러도 너무 이르다, 미샤. 어차피 우리도 다음 달에 미궁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아니냐.”

“그건… 그렇긴 하지.”

솔직히 말하면, 이번 사태가 끝나는 게 아닌 이상 미궁 탐사는 잠시 스탑하는 게 현명하다.

당장 금전적인 문제는 없으니까.

‘…도시라고 안전한 건 아니라는 게 제일 짜증 나는 부분이지만.’

용살자.

시체 수집가.

노아르크의 암살자.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왕가의 행보까지.

하루빨리 강해져야 할 이유들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는 추이를 지켜보는 게 낫겠지.’

나는 애써 조급함을 지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부분은 나중에 레이븐을 만나서 제대로 얘기를 나눠 보든가 해야겠네.’

아무튼, 이후로도 셋이서 다과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기가 잔뜩 죽은 표정으로 불편해하던 에르웬이었으나, 미샤가 다정하게 대해 주자 의외로 금방 안정을 찾았다.

‘그래도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언니에 대한 마음 정리는 어느 정도 끝내고 온 모양이네.’

덕분에 나도 한결 부담을 내려놨다.

앞으로 살아가며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에르웬은 제힘으로 일어섰다.

그러니 분명,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응? 동생이 있다고?”

“네, 아직 어려서 성지에서 지내고 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되면… 제가 어떻게든 챙겨야 하겠죠. 언니가 저한테 해 준 것처럼…….”

“냐핫, 너무 걱정 마랑. 아직 많이 남았지 않냐? 그때면 너도 훨씬 더 여유가 있어질 거당.”

“그럴까요……?”

의외로 훈훈한 대화를 나눠 가던 에르웬과 미샤. 다만 에르웬이 느닷없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그때 사과를 제대로 안 드렸죠? 죄, 죄송해요, 그때는 제가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사과는 무슨. 됐당. 차라리 그 일 덕분에 잘된 것도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라니?

둘이 만나서 사과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그, 근데 언니는 괜찮으신 거예요……?”

“안 괜찮을 건 뭐냥? 나도 그때랑은 생각이 좀 많이 달라져서… 애초에 나한테 그런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 말하며 나를 흘기는 미샤.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현관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가지.”

얼른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평소였다면 벌떡 문부터 열었을 테지만, 어제 암살자가 올지도 모른단 정보를 들었던 상황.

일단 누구냐고 정체부터 물었다.

“제2 왕실 기사단의 평기사 레이먼 케플로라고 합니다.”

준남작 작위를 받을 예정이라 그런지 공손한 말투로 신분을 밝히는 기사.

외시경을 통해 확인해 보니 갑주도 제대로인 데다가 뒤에 다른 기사들도 우르르 몰려와 있다.

‘이 정도면 거짓말은 아닌 거 같고.’

짚이는 부분도 있었기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한 채로 그들이 찾아온 용건을 확인했다.

오래간만에 희소식이었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지시라면?”

“혹여나 있을지도 모를 불온한 자들로부터 얀델 님을 보호하라는 지시입니다.”

그래, 사슴뿔이 움직인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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