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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252화 (252/549)

252화 오픈월드 (1)

미세한 지진이었다.

테이블이 부르르 떨렸으나, 서 있던 컵이 넘어지는 일도 없었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테이블에 쌓인 칩이 무너진 정도.

“지진?”

예고 없이 찾아온 자연 현상에 놀라기도 잠시.

흔들림이 멎자 실내에 있던 귀족들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평소처럼 도박을 즐겼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이보게, 공자 어디를 가나!”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말이오. 이번 판은 그냥 죽지.”

사내는 쥐고 있던 카드를 뒤집어 내려놓고는 칩만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가면으로 정체를 감춘 채 즐길 수 있는 도박장이란 컨셉은 제법 재밌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지진은 아니었단 말이지.’

밤거리로 나온 이백호는 가장 먼저 보인 벤치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귀족들은 실내의 소음 때문에 듣지 못한 듯했으나 그는 분명히 느꼈다.

땅 아래에서 전해진 거대한 기운의 파동을.

‘마력이랑 신성력이 섞인 듯한 기운이었지.’

마법사는 아니지만 기감 스탯이 높고, 마력 관련 재능도 꽤 있는 편이었던 그였기에 잘못 느낀 것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수호 결계를 깨부순다 깨부순다 말만 많더니 진짜 깨부수고 쳐들어간 거구나.’

머지않아 이백호는 진실에 도달했다.

참 지독한 새끼들이 아닐 수 없었다.

미궁이 열리는 자정쯤을 결행 시기로 잡은 게 우연은 아닐 테니까.

‘빈집털이라…….’

지금은 왕가에서 떠났기에 자세한 사정까진 모른다. 다만 노아르크 쪽은 단단히 준비해서 미궁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쓸 수 있는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겠지.

설마 지들이 썼던 수법을 똑같지 돌려받을 거라 상상도 못한 채.

‘……이거 잘하면 아래 새끼들 전부 뒈지겠는데?’

이백호에게 있어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추후 정 선택지가 없으면 노아르크 놈들과 게임 클리어를 하는 것까지 생각 중이었으니까.

‘딱히 할 것도 없는데 내려가서 도와줄까?’

문득 그런 생각도 났지만, 이백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그건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쪽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면 왕궁 쪽도 텅 비었겠네?’

이내 이백호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

제1 왕실기사단장, 제롬 세인트레드.

왕가의 수호자이자, 빛의 기사라 불리우는 그의 미간에 때아닌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조금 전에 전달 받은 소식 때문이었다.

“왕궁이 공격받고 있다고……?”

처음엔 노아르크 측의 반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말이 안 된다.

미궁이 목적지인 척 병력을 소집했고, 출정 두 시간 전에서야 진짜 목표가 노아르크 본성임을 알릴 만큼 보안에 신경을 썼을뿐더러…….

애초에 수호 결계가 부서진 건 바로 전이다.

왕궁을 타격할 만큼의 전력이 빠져나갈 시간은 없었다는 뜻.

“회군 명령은 떨어졌나?”

“아직입니다.”

“그렇다면 계획에 변함은 없다. 출정을 계속 이어간다.”

제롬은 군을 이끌고 신속하게 하수도 아래로 이동했고, 시간이 흐르며 왕궁을 습격한 무리의 정체에 대해서도 소식이 전해졌다.

‘……설마 무리가 아니었을 줄이야.’

감히 왕궁을 습격한 자는 고작 한 명이었다.

최근 위험도 단계가 격상한 파멸학자의 단독 범행인가도 싶었으나, 그런 그의 예상조차도 빗나갔다.

“이백호.”

한때는 그 누구보다 촉망받는 탐험가였지만, 악령임이 밝혀지고서 그 참사를 낳은 존재.

물론 그 참사에 대해서 아는 자는 극소수다.

능력을 아깝게 여긴 왕가의 자비로 그 참사는 철저하게 은폐됐으며, 그놈 또한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됐으니까.

‘골치 아프군. 그놈이 대체 어떻게 알았지? 나까지 출정으로 자리를 비웠으리라는걸?’

그가 알기로 이백호는 현재 정보를 얻을 만한 수단이 없다. 예전에야 악령 집회에서 외부의 협력자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현재 그는 집회에서 추방당한 상태다.

이 또한 왕가에서 손을 쓴 일이었다.

GM이라 불리는 악령에게 은근슬쩍 이백호의 정체를 흘리고, 그럼에도 추방할 기미가 없자 그를 노아르크로 보내 척을 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냥 혼자 추측한 건가?’

제롬은 침음에 잠겼다.

수호 결계를 부순 여파로 지상에 지진이 발생했단 소식은 들었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지진을 통해 이 상황을 유추하는 것?

이 정도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실행에 옮기는 건 또 다른 영역의 문제.

만약 예측이 빗나간다면 도로 붙잡히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도박 같은 짓을 한다고?

‘……그자라면 그럴 수 있지.’

자존심이 상하지만 제롬은 납득하고 말았다.

이백호는 흡사 짐승과도 같은 자다.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적을 물어뜯고, 자신이 물어뜯길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필 장미기사단장 자리도 공석인 이때…….’

지상의 상황이 걱정됐으나, 아직 회군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왕가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

“도착했습니다.”

이내 지하 미로를 통과한 군대는 노아르크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도달했다.

고대의 마법이 수십 가지나 들어간 석문.

지난번 토벌 때는 이 문을 부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던가?

“다행히 아직 제대로 고치지 못한 모양이군. 시작하라.”

제롬의 명이 떨어지자, 마법사단은 바닥에 거대한 팔방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콰아아아아아앙-!

마법진이 강한 빛을 흩뿌리며 석문을 향해 순수한 마력의 파동을 쏘아냈다.

그리고…….

솨아아아아아.

먼지구름 너머로 지하 도시의 경관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자, 가자. 사악한 역도 무리를 토벌하고 이 도시에 안정과 평화를 되찾아 올 시간이다.”

제롬은 왕에게 하사받은 보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그 너머를 향해 발을 들이밀었다.

“라프도니아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그의 걸음엔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포탈이 닫힌 차원 광장.

다만 이후로도 한참이나 그곳을 서성였다.

혹시나 저 기사들에게서 쓸 만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쩝, 시간만 날렸네.’

기사들은 사소한 잡담조차도 나누지 않았으며 광장의 정리가 끝나는 즉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따라서 나도 이만하고 광장을 떠났다.

곧장 숙소로 가기보다는 주점이라도 들러 다른 탐험가들은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 볼 계획이었다.

‘기왕이면 곰아저씨네로 갈까?’

음, 역시 그게 좋겠다.

일단 탐험가들이 자주 오는 주점이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칸막이나 룸 형태도 아니라서 대화를 엿듣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이런 말을 앞에서 하면 분명 화내겠지만.

“오, 얀델.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미샤도 없이.”

“그냥 나온 김에 조금 심심해서. 오늘 꽤 바빠 보이는데 난 신경 쓰지 마라. 조용히 구석에서 마시다 갈 테니.”

“……그냥 불러주면 안 되겠나? 네 말이라면 아내도 분명 괜찮다고 해줄 텐데.”

주점에 도착해서 만난 곰아저씨는 농땡이를 피울 각을 보고는 내게 그런 요청을 해왔다.

거, 만삭인 아내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오늘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렇다면야. 안주랑 술은 적당히 내주면 되지?”

“아, 그럼 고맙지.”

이내 텅 빈 테이블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곰아저씨가 고기로만 구성된 술상을 차려줬다.

참고로 술은 이 집의 시그니처인 소금 벌꿀주.

‘처음엔 진짜 이상한 맛이었는데, 먹다 보면 묘하게 술술 들어간단 말이지.’

아무튼, 이곳에 온 본 목적은 이게 아니다.

술을 홀짝이며 귀를 열고 있자니 주변 탐험가, 혹은 일반 도시민들의 대화들이 들려왔다.

소문이 빠른 주점의 특성상 대부분의 화제는 왕가에서 꾸린 군대에 관한 얘기였다.

‘딱히 건질 만한 건 없네.’

왕가에서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렸다느니.

노아르크를 겁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느니.

정보의 소스가 본인의 뇌인 알맹이 빠진 정보들뿐.

뭐, 술집에서 원탁의 정보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기에 실망하진 않았다.

애초에 여론 조사 정도가 목적이었다.

‘요즘은 탐험가만이 아니라 도시민들도 왕가를 좋게 보지를 않네.’

이후로는 귀를 닫고 술이나 마시며 혼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좀 일이 한가해졌는지 곰아저씨가 다가와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얀델, 넌 어떻게 생각하냐?”

“군대 말인가?”

“그래, 이런 쪽으로는 네 감이 또 기가 막히지 않냐.”

나는 잠시 고민하다 군대가 지금 ‘빈집털이’ 중일지 모른단 내 추측을 말해 주었다.

그야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니까.

베테랑 탐험가인 곰아저씨의 의견은 어떨까 싶었다.

“……과연 아까 그 지진이 그래서였나.”

“믿는 건가?”

“오히려 그쪽이 훨씬 더 그럴듯하지 않나? 왕가에서 노아르크를 겁낸다는 헛소리 보다야.”

왕가의 보고에 한 번 들어선 적이 있어서인지 곰아저씨는 납득이 빨랐다. 왕가가 지닌 저력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단 걸 아는 것이다.

“……어쩌면 다음 번에는 미궁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내 곰아저씨는 이 냉전기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마무리될지 모른단 기대를 내비쳤다.

그리고 도시의 경제 문제도 걱정했다.

“얀델, 이렇게 되면 현금을 아껴둘 게 아니라 이번에 써야 되는 거 아닌가? 미궁이 안정되면 다시 물가도 원래대로 돌아올 텐데.”

그 말에 조금은 감동했다.

지킬 가정도 있는 베테랑 탐험가라 그런가?

아이나르나 미샤는 이런 쪽으로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던데.

“일단은 지켜봐라. 어차피 내일이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힐 테니.”

“그래, 내가 너무 조급했군.”

이후로는 이 주제에서 벗어나 곰아저씨와 대작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던 때였다.

댕-! 댕-! 댕-! 댕-!

바깥에서 경종이 울렸다.

1년 넘게 이 도시에서 지내며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지난번에 내 마차가 폭발하고 GM과 이백호가 난장을 부렸을 때도 경종은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게 울리다니?

처컥, 처컥, 처컥.

이내 서둘러 바깥으로 나오자 군화 소리를 내며 한곳으로 달려가는 치안청 소속 경비들이 보였다.

나는 아무나 붙잡고 사정에 대해 물었다.

민간인에게 말해 줄 수 없다던 경비였으나, 내 신분을 밝히자 순식간에 태도를 달리했다.

“내 이름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 왕가에서 준남작 작위를 하사한 정식 귀족이다. 그러니 어서 답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저희도 잘 모릅니다. 단지 카르논 쪽으로 지원을 가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동료들 얘기를 들어 보면 크게 화재가 났다는 거 같습니다.”

이 시기에 황도 카르논에서 대형 화재라…….

‘우연일 리는 없겠지.’

그럼 설마 노아르크 놈들이 쳐들어온 건가?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능하긴 한 일이다.

왕가의 빈집털이 계획을 미리 알아챘더라면, 이런 식의 엘리전도 전략으로 쓸 수 있을 테니.

‘하, 왕가 새끼들은 대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옆에 있던 곰아저씨가 툭 하고 말을 뱉었다.

“황도에서 화재라니,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듯한데…… 레이븐은 괜찮을지 모르겠군.”

응? 레이븐?

갑자기 걔는 또 왜.

‘아, 걔 지금 마법 배운다고 왕궁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지내고 있댔지.’

……니미럴.

지금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인지하자마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치밀어 오르는 불길한 예감.

이런 예감은 대부분 빗나가는 법이 없었기에 그 불안의 정도가 더했다.

“부디 단순 화재로 끝이었으면 좋겠—”

“아브만, 난 이만 가보겠다.”

“이 와중에 대체 어딜? 얀델, 내 말 들어라. 이런 때에는 그냥 집에 있는 게 최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곰아저씨가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걱정 마라. 금방 찾아서 데려올 테니.”

“그렇다면 나도 같이—”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아내랑 있어야지.”

곰아저씨에게는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 있으라고 말했다.

미샤 쪽도 내 걱정을 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 소식은 전해야지.

팀원끼리 다 모여 있는 게 안심되기도 하고.

“……조심해라.”

이후 곰아저씨와 헤어져 황도 카르논으로 향하는 군용마차 지붕에 올라탔다.

아래 타고 있던 병사들이 뭐라뭐라 난리를 쳤지만, 내 신분을 밝히니 다들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얀델 준남작님! 곧 카르논에 도착합니다!”

이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

한밤중임에도 하늘은 시뻘겋다.

깨끗하게 관리된 높은 성벽엔 검은 재들이 묻어 더럽혀져 있으며, 주변엔 안개라도 낀 것처럼 매캐한 연기가 가득하다.

또한.

저 뜨거운 불길 너머, 혹은 불길 바깥에서, 악을 쓰는 괴성과 비명이 겹쳐져 들려온다.

‘미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귀족들의 도시, 카르논이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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