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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284화 (284/549)

284화 표류 (4)

이거, 실화냐?

몰래카메라 같은 거 아니고?

얼떨떨하다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감각에 사로잡힌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다만, 그럼에도 납득은 빨랐다.

‘타임 슬립.’

이거 하나면 내가 이 섬에서 눈을 뜬 후 생긴 모순들이 전부 다 설명이 된다.

따라서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래, 컴퓨터를 하다가 바바리안 몸에서 깨기도 하는 판에 시간 이동이 불가능하겠어?

생각 정리를 마친 나는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군.”

“어느 정도는.”

아멜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확신하게 된 건 이 녀석들을 만난 후라고 말했다.

나야 책에서 봤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놈들이라던가?

‘……어쩐지 이상하더라. 얘가 그렇게 다짜고짜 선빵을 때릴 애가 아닌데.’

일종의 시간 여행자 특전이다.

속내를 숨긴 새끼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뭔가 하기도 전에 머리틍올 박살 내는 것.

당한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겠지.

“유, 유명하다니, 대, 대체 무슨 소리오, 그게!”

뭐래, 설명할 시간 없어.

설명해 봤자 의미도 없고.

“너희 말고 다른 클랜원들도 이 섬에 있나? 맞다면 고개만 살짝 끄덕여라.”

나는 신속하게 심문 시간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몇 가지 궁금했던 점들을 해결한 뒤,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20년 전이라…….”

일단 시간대는 20년 전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뒤에 범행이 드러나고 처형당할 놈들을 만난 셈.

‘생각보다 골치 아픈 상황이네.’

심문을 통해 알아내길, 30명도 넘는 인원이 이 섬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경고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클랜 엘비스의 단장은 굉장히 위험한 탐험가라고.

“……우선 움직여야겠군.”

“그래야겠지.”

나는 아멜리아와 눈짓을 몇 번 주고받는 것으로 빠르게 의사소통을 끝냈다. 의외로 얘랑은 이런 부분에서는 제법 합이 좋았다.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 없었던 덕이다.

“일단 장비부터 벗기지.”

“아, 여기 이놈들은 내가 하겠다.”

우리는 능숙하게 놈들의 장비를 벗기고, 배낭을 빼앗았다.

그리고…….

푸욱.

전부 죽여버렸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살려서 보내주겠는가.

돌아가자마자 동료들과 함께 우리를 쫓기 시작할 게 분명한데.

‘애초에 죽어 마땅한 놈들이기도 하고.’

5년 뒤 범행이 드러나는 클랜의 문양.

배낭에서 명백한 약탈의 증거까지 나온 것은 물론, 심문을 하며 여러 내용을 들은 직후였기에 죄책감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다.

“시체는 어떻게 할 거지?”

“묻는 게 좋을 거 같군.”

“그럼 얼른 땅을 파야겠군.”

묻자는 아멜리아의 말에 나는 이견 없이 따랐다.

암, 이럴 땐 전문가 말을 따라야지.

“그럼 나는 저쪽에서 흔적을 지우고 있겠다.”

내가 시체 묻을 땅을 파는 동안, 아멜리아는 야영지로 돌아가 내가 피워 둔 모닥불과 열심히 땅을 파서 만든 풀잎 침대를 해체했다.

짧았던 내 원시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이제 문명인으로 돌아갈 차례.

“단검이군. 쓸 테냐?”

우리는 ‘나무 정령의 가호’를 벗어던지고서, 놈들을 죽이고 획득한 옷, 그리고 장비를 걸쳤다.

내가 쓰던 장비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이 정도면 그냥저냥 쓸 만하겠네.’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욕심일 것이다.

이후 시체를 파묻고 흙으로 덮는 과정을 끝마친 나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수통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나침반을 통해 방향을 확인했다.

‘후, 이제 좀 사람 사는 거 같네.’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

“봐둔 동굴이 있다. 그리로 가지.”

서서히 하늘이 퍼런빛을 내며 밝아지는 시각.

아멜리아를 따라 30분가량 이동한 나는 자그마한 동굴 하나와 마주했다. 미샤와 함께 섬 중심부로 향하던 때 발견한 곳이라던가?

“생각보다 안이 넓군.”

“……들어와 봤던 게 아닌가?”

“지나가면서 눈여겨봤을 뿐이다. 몸을 숨기기에 딱 좋을 거 같아서.”

아니, 근데 그걸 위치까지 기억한다고?

“대단한 기억력이군.”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하자, 아멜리아는 오랜 습관일 뿐이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 다 큰 어른이 칭찬 하나에 부끄러워하기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 그렇군.”

“바바리안, 그건 무슨 의미의 그렇군이지?”

그렇군이 그렇군이지 뭐.

아무튼, 잡담 타임은 여기까지다.

“그보다 슬슬 그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대체 그 돌은 뭐였지?”

나는 몇 번이나 반복했던 질문을 다시금 뱉었고, 마침내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기록의 파편석. 대현자 가브릴리우스의 유산이자, 오랜 시간 노아르크의 성주들이 보관해왔던 보물이다.”

그래, 그게 정식 명칭이었구나.

딱 봐도 이번 사태랑 연관이 있어 보이네.

“그럼 우리가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한 것도 다 그 기록의 파편석 때문이냐?”

“아마 그럴 거다.”

아멜리아는 순순히 긍정하며 말을 이었다.

‘기록의 파편석’은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전설이 있는 물건으로, 그 때문에 한평생 이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고.

“근데 그런 걸 왜 나랑 있을 때 쓴 거지?”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뭐?”

“애초에 어떻게 쓰는 것인지 방법조차 몰랐다. 나중에 도시로 돌아가면 그때 제대로 연구해 볼 계획이었지.”

아멜리아의 말에 따르면, 노아르크 성주조차도 사용법을 알지 못해 보관만 했다는 듯했다.

아우릴가비스가 ‘기록의 파편석’을 건네주며 했던 말대로, ‘시대의 부름을 받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니미럴.’

한숨을 쉬면 복이 달아난다지만, 자꾸 한숨이 나온다.

“그럼 너도 돌아갈 방법은 모른단 건가?”

“……그렇다.”

아멜리아는 면목없다는 듯 말했으나, 눈은 시종일관 반짝거렸다.

하긴, 이해 못할 건 없었다.

얘 입장에서는 평생 바라왔던 소망이 이뤄진 것 아닌가. 돌아갈 방법보다는 어떻게 해서 과거를 바꿀지가 주된 관심사일 터.

‘내가 이리로 왔으면 저쪽은 어떻게 된 거지? 그냥 멈춰 있는 상태인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다만 내가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무.

일단은 호기심이나 채우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어떤 의미지?”

“그렇게까지 해서 과거로 오려고 했던 사연이 뭔지가 궁금해서.”

“…….”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던가.

“…….”

“…….”

이후로는 어색한 정적이 한참 동안 흘렀다.

뜬금없이 시간 이동을 하게 된 나는 나대로, 얘는 얘대로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해가 뜨는군.”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날이 밝았고, 우리는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괜히 나가서 움직였다가 놈들과 마주쳐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판단.

후, 아까 죽인 애들이 배라도 갖고 있었으면 그걸 타고 섬을 탈출했을 텐데.

‘설마 섬 자체를 통제 중일 줄이야.’

심문 과정 중 알아낸 것인데, 파루네섬은 놈들 클랜의 영역이었다.

이곳을 베이스 삼아 근처 섬들을 돌아다니며 클랜이 없는 탐험가들만 골라 약탈한다던가?

애초에 다섯 명이서 섬을 돌아다니던 것도 클랜이 섬을 비운 사이에 들어온 탐험가가 있는지 수색하는 과정이었다고 하던데…….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만 버티면 된다는 거겠지.’

6층은 60일 차에 미궁이 폐쇄된다.

놀랍게도 오늘이 그날이다.

타임슬립까지 한 판에 새삼 놀랄 게 뭐 있는가도 싶긴 하지만.

‘애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거기는 미궁이 닫힐 때까지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텐데. 나 없이 잘 버티다가 나가겠지?’

문득 그곳에 두고 온 동료들이 걱정됐으나, 너무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 걔들보다는 일단 내 걱정부터 해야지.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미궁이 폐쇄됐을 때 다 원래대로 돌아오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때,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바바리안.”

“내 이름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인간.”

“…….”

“그래서 하려던 말은?”

“배낭에 있는 신분증 중 하나를 미리 골라두라고 말하려 했다.”

응?

‘아…….’

처음엔 뭔 소린가 싶었지만 금방 이해가 됐다.

지금 이대로 과거의 도시로 돌아가면 검문소도 제대로 넘지 못할 테니까. 이내 나는 배낭을 싹 뒤져 있는 신분증을 전부 한데 모았다.

마흔 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근데 이놈들은 왜 신분증을 이렇게 모아둔 거지? 자칫하면 약탈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텐데.”

“흔한 일이다. 신분증도 나름 돈이 되는 편이니.”

도시에서 신분이 없는 노아르크 출신들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신분을 원하는 자들은 널리고 널렸다던가?

‘하긴 어차피 배낭을 수색하면 약탈한 게 걸리는 건 매한가지니까. 신분증도 챙겨다가 파는 게 이득이긴 하겠네.’

이내 우리는 신분증들을 하나씩 살피며 쓸 수 있을 만한 걸 골랐다.

인간인 아멜리아와 달리 난 선택지가 없었다.

그 많은 신분증 중에 바바리안 신분증은 딱 하나였거든.

“아멜리아 베리웰즈라니, 좋은 걸 구했군?”

아멜리아는 동명의 신분증을 골랐다.

종족은 인간에 성별은 여성.

“나이는 스물하나군. 양심이 있는 건가?”

“……나, 나라고 좋아서 고른 게 아니다.”

어? 뭐야, 이 반응은.

“잠깐만, 아멜리아. 너는 대체 몇 살인 거냐?”

“……나한테 관심 갖지 마라. 비요른 얀델.”

아멜리아는 금방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차갑게 말을 잘랐다.

말 더듬는 모습은 처음이라 좀 놀려볼까 했건만.

“단지 이곳 생활이 길어지면 세금도 내야 하니까 최대한 적게 낼 수 있을 만한 걸 골랐을 뿐이다. 이름도 같으니 편할 테고.”

그래, 너는 이미 1년 넘게 이 시간대에 갇혀 있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거구나.

‘쩝.’

나는 입맛을 다시며 손에 쥔 신분증을 다시금 살펴보며 외워야 할 내용들을 재차 점검했다.

‘이름 니벨즈 엔체, 나이 스물하나. 탐험가 등급은 6.’

필수 정보는 이 정도였다.

다만 6등급이면 소유 정수도 몇 개 정도 길드에 등록되어 있을 테니, [거대화] 같은 건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는 게 현명할 듯하다.

“다 확인했으면 줘봐라.”

“응?”

“바바리안이라고 부르지 말라면서? 남들 앞에서 얀델이라 부를 순 없지 않나.”

아, 그것도 그렇네.

나는 앞으로 내가 한동안 쓰게 될 신분증을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건 또 뭘까.

“니벨즈 엔체……?”

아멜리아가 신분증을 쥔 채로 굳어버렸다.

마치 알고 있던 누군가의 이름이라도 되듯이.

***

“설마 아는 사람인가?”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냥 우연일 것이라며 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참, 얘도 진짜 복장 터지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럴 거면 아예 내색을 하지 말든가.’

아무튼, 이후로도 미궁이 폐쇄될 때까지 동굴에서 버티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면서 간간이 대화를 나눴는데, 그중에서 굉장히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다.

“돌아가는 방법은 내가 책임지고 찾아볼 테니, 되도록이면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마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 수도 있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니?”

“예전에 우연히 한 마법사에게 들은 말이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다면, 아주 사소한 변화 하나로 나라가 멸망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을 거라더군.”

아무래도 나비 효과를 말하는 거 같았다.

그 있지 않은가.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바다 건너 대륙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그거.

‘……잠깐만, 이 시대의 비요른이 죽으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20년 전이니 지금 이 시간대에도 비요른은 존재할 것이다.

이제 막 젖병을 우물우물거릴 나이겠지.

한데 만약 그 아이가 죽으면 내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어쩌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걸지도.’

일단 도시로 돌아가게 되면 당분간은 아멜리아의 조언대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하다.

“알겠다, 사고 같은 건 안 칠 테니 걱정 마라.”

“……믿지.”

전혀 신용하지 않는 눈빛으로 그리 말한 아멜리아는 이내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렀다.

섬 안에서 동료들이 실종되자 이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클랜원들 몇몇이 근처를 지나쳤지만, 아멜리아가 앞에 위장을 잘 해둔 덕분에 들키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00 : 00]

시계의 시침이 딸깍이며 움직였다.

미궁 폐쇄 시간이 되었다는 뜻.

솨아아아아아-!

이내 새하얀 빛이 내 몸을 보듬어 안았다.

즉시 눈앞이 흐릿하게 번졌고, 서서히 시간이 흐르며 색채가 돌아왔다. 멍하니 하늘부터 올려다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여기는 20년 전에도 우중충했구나.’

평소와 같은 라프도니아의 잿빛 하늘.

“이봐, 바로 숙소로 가진 않을 거지?”

“그럴 리가. 일단 가서 술부터 마시지.”

바글바글한 탐험가들로 시끌벅적한 차원 광장.

그래, 여기 원래 이런 느낌이었지.

최근에는 하도 일이 많아서 이렇게 평화로운 쪽이 더 어색하네.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20년 전 세상인 거구나.’

한동안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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