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329화 (329/549)

329화 우로보로스 (4)

반역자, 리카르도 뤼헨프라하.

이놈과의 전투는 여러모로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귀한 정수의 스킬이나 높은 스탯, 오러 같은 ‘스펙’이 아니라 ‘무기 숙련도’가 전투에서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으니까.

휘익-!

대충 휘두르는 것 같은 검조차 전부 의도가 숨겨져 있으며, 자연스레 다음 수를 위한 안배로 작용한다.

단순히 싸움을 잘한다는 영역을 벗어난 레벨.

물론 그렇다고 절망적인 상황이라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시간만 끌 수 있다면, 나의 승리.

따라서 작정하고 시간을 끌며 놈의 검술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이제 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야 감각과 반사 신경에 의존해서 그때그때 다급하게 놈의 검을 피하고 막았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보인다. 녀석이 이 수를 활용해 다음 수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가.

휘익-!

팔목을 노리는 건 견제가 목적.

뒤로 피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걸 노린 거겠지. 그럼 목이 비어버리니까.’

어찌 보면 체크메이트라고도 볼 수 있었다.

[불언령]이 정상 작동한다는 가정하에는 말이다.

스르륵.

[거대화]를 풀자 신체가 줄어들며 녀석의 검이 내 팔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데 이것까지 예상해서 그은 검이었을까?

휘익-!

놈의 검이 뱀처럼 궤적을 틀며 내 허벅지를 노려온다.

타닷.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다만 녀석은 검을 휘두르며 이 장면까지 보았는지, 잠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금 검의 궤적을 틀었다.

정신을 잃은 아멜리아를 향해.

‘이런 씹…….’

신속하게 [초월]과 [폭풍의 눈]을 연계해 놈을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로써 아멜리아는 안전해졌다.

하지만…….

솨아아아아아아-!

이런 경우도 머릿속에 있었다는 듯 놈은 바람을 타고 끌려오며 절묘하게 검을 휘둘렀다.

뭐, 어떻게든 잘 모면하긴 했지만…….

‘이 새끼 대가리는 무슨 슈퍼컴퓨터인가?’

겪으면 겪을수록 놀아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얼추 다 읽히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문명이기에 농락당했던 현대 바둑 기사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지경.

‘어떻게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배울 수만 있으면 크게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말이지.’

눈요기로 배울 수준의 무술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수준 높은 검사와 생사결을 펼치는 일은 흔치 않기에, 최대한 배우는 마음으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슬슬 노인네 쪽도 마무리가 됐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차.

“으읏…….”

아멜리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의식이 돌아온 건 아니지만, 부상이 일정 수준 이상 회복됐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오케이, 아멜리아만 깨어나면 2:1로 조질 수 있을 테고…….’

아마 놈이 나와 전투 중에도 기회만 나면 아멜리아를 노렸던 것도 이게 이유였을 것이다.

빛의 기사 때만 봐도 알 수 있듯, 굉장한 검술과 달리 무인의 자존심 같은 건 없는 놈이었으니까.

불리한 상황이 된다면, 이놈은 튄다.

망설임은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그래, 바로 지금처럼.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어차피 튈 거라면 아멜리아가 깨어나기 전인 지금이 적기라 판단했을까?

타닷.

놈이 후일을 도모한다는 전형적인 대사를 치며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고,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티는 안 냈지만, MP가 거의 바닥났거든.

검을 막을 때마다 힘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휘두르기]를 쓰고, [초월]과 [도약], [폭풍의 눈]을 전투 내내 난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음, 그럼 이쪽은 끝났고…….’

이내 나는 아멜리아에게로 다가갔다.

호흡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고, 잘려나간 팔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 같—

“허허.”

그때 인기척도 없이 뒤에서 소리가 났다.

이에 황급히 등을 돌리니.

“정말 혼자서 그 녀석을 물리쳤군?”

기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아우릴 가비스가 있었다.

***

“어르신께서 도와주셨다면 훨씬 더 편했을 텐데요.”

“저 친구와는 아직 만나고 싶지 않아서 말일세.”

“그렇습니까…….”

어차피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게 뻔했기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아우릴 가비스의 좌측에는 염력이라도 쓴 것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물체가 있었다.

아니, 물체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의식을 잃은 상태의 응멜리아였다.

얘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저쪽도 변수 없이 일이 잘 마무리된 듯싶지만…….

‘확인은 해야겠지.’

나는 다시금 아우릴 가비스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그래서… 그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잘 됐네. 자네가 당부한 대로 마지막에 내 이름도 말해줬고.”

“라우라는?”

“흐음, 갑자기 말이 조금 짧아진 거 같은데…….”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햅니다. 오해.”

내 말에 노인네는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더니, 딱히 중요한 건 아니라 여겼는지 피식 웃어넘겼다.

“아무튼, 이 여아의 언니도 마찬가지일세. 자네가 부탁한 대로 약을 먹이고 몸도 모두 치료해서 지상에 올려보냈네.”

일처리 하나는 확실한 노인네란 생각이 들었다.

이후 얘기도 들어보니 지상에 올라가자 가장 먼저 보인 마차에 던져 사고로 위장했다던가?

기억을 몽땅 잃은 것에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갖고 있던 것 중 연고가 없고 나이도 비슷한 신분패까지 품에 넣어놨다고 하는데…….

“대충 자네가 뭘 원하는지 알 거 같아서 말일세.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언니 쪽은 문제가 없을 듯하다.

따라서 나는 이후 다음 안건도 확인했다.

“그보다 동생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걱정 말게. 말했지 않은가. 은밀한 마법이 노부의 특기라고. 아마 이 아이는 환각을 보았을 거라고는 평생 깨닫지 못할 걸세. 숨이 멎었다는 것만을 제하면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

라우라가 암석에 깔리고, 스스로의 목에 단검을 꽂은 일은 실제 상황이었다. 심장이 멈추며 포션의 효과가 끝난 것만이 환각이었을 뿐.

“근데 말일세. 꼭 노부의 이름까지 밝혀야 했나?”

“얘 기억에서 그랬다고 하는데 어떡합니까.”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대본이었다.

“흐음, 그것도 그렇군. 그나저나 자네도 참 머리가 좋아.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해내다니.”

노인네가 감탄했다는 듯 나를 보았으나, 정작 나는 입맛이 썼다.

사실 생각해 보면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으니까.

대본을 따라가는 연극배우라도 된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너무 비효율적이야.’

일이 다 끝나고 나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였으면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우라가 죽은 것처럼 연기할 필요도 없고,

아멜리아를 굳이 노아르크로 데려갈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냥 언니랑 같이 지상으로 보내주면 그만인 이야기니까.

모두가 행복한 결말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비효율적이며 20년간 한 소녀가 비극을 겪어야 하는 방법을 썼다.

과거로 돌아와 아우릴 가비스를 만났기에.

그래서 이미 지나간 일을 돌릴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결과를 정해놓고 나머지를 끼워 맞추었다.

어느 면에선 조삼모사나 다름없는 행위.

‘어쩌면…….’

어쩌면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에 대한 고민은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을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엇이 먼저든, 닭이 낳은 알은 결국에 닭이 되는 과정을 거쳐 닭이 되는 결과로 이어질 터인데.

“그리 기뻐 보이지가 않는군?”

아우릴 가비스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털어놨다. 꽤 긴 이야기였으나 그는 귀 기울여 듣더니 내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자네 기분을 이해 못할 건 아니네마는, 너무 깊게 생각지는 말게나. 자네도 이번 일을 통해 여러 가지를 얻었을 것 아닌가.”

딱히 도움은 안 되는 위로였다.

과거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 아우릴 가비스가 걸어준 버프, 더블 넘버스 아이템인 크라울의 악마 분쇄기, 그리고 아멜리아(SSR) 영입권까지.

확실히 많은 것을 얻기는 하였지만…….

“세상이 유지되고, 나라가 유지되고,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해내기 때문이지. 이게 자네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하게.”

저리 말하니까 괜히 더 찝찝해진단 말이지.

기록의 파편석이란 대체 뭐 하는 물건인 걸까?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이제 전부 끝났으면 약속한 대가를 받을까 싶은—”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는 아우릴 가비스를 보며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직 다 안 끝났습니다.”

“응?”

“걔, 이리 주십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

아멜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등에 업힌 상태로 하수도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그녀는 의문을 품었다.

대체 누구일까.

“정신을 차렸나보군.”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어쩐지 팔이 뻐근할 정도로 등이 넓더라니.

“철가면 님…….”

철가면이다.

미궁에서도 바깥에서도 다른 클랜원들과 달리 우리 자매에게 너그럽고 친절했던.

그리고…….

‘에밀리 님의 동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 동안 에밀리는 그들 자매를 보살펴주었다. 그 사실을 모를 만큼 그녀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이분들은 왜 우리를 도와준 걸까…….’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아마 이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자신과 언니는 진작에…….

‘진작에…?’

사고가 그곳까지 이르자 기억이 확 몰려왔다.

“어, 언니!”

“……?”

“어, 언니는 어떻게 됐나요? 제 여, 옆에 있었을 텐데……! 못 보셨나요?”

“……잔해 속에서 발견한 건 너뿐이다.”

“아…….”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 아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현 상황을 설명하는 철가면의 말이 뭉개지듯이 들려왔다.

“지금은 노아르크로 돌아가는 중이다. 도시로 나가는 길은 무너졌거……. 뭐야, 잠든 거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지막이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미안하다, 제대로 못 구해줘서.”

“…….”

“나중에 보자.”

거기까지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여긴…….”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스산함이 감도는 공동묘지에 있었다.

저 멀리로 노아르크의 성채가 보였고, 코로는 매캐한 향이 맡아졌다.

그리고…….

“…….”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철가면도, 에밀리도.

하나뿐이던 나의 언니도.

스륵.

아멜리아는 홀린 사람처럼 단검을 꺼냈다.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다.

“어, 언니…….”

단검에 묻은 피를 보고 있자니 실감이 났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은 꿈같은 게 아니다.

“아, 아아…….”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던 아멜리아의 귀에 번잡한 소란이 들려왔다.

“여기! 여기에 누가 있는데?”

“뭐야, 얘는?”

“펠릭 바커네 몰이꾼 같은데?”

“일단 데려가자,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후 아멜리아는 경비들의 손에 이끌려 도시에 들어서고서야 깨달았다.

“…….”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나를 지켜주던 언니는 이제 없기에.

앞으로는 이 도시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

경비들에 의해 끌려가는 아멜리아를 보고 있자니,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군그래. 몹쓸 짓이라도 한 것만 같아서.”

뭐래, 인자한 할아비 코스프레라도 할 셈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도 안 하면서.

“그나저나 제 동료는 어디에 두고 혼자 왔습니까?”

“그 처자라면 아까 그곳에 있네.”

“아무리 그래도 의식도 없는 여자를…….”

“걱정 말게, 노부가 떠나자마자 깨어났을 테니.”

음, 그렇다면야.

그 말에 나도 걱정을 덜었다.

무슨 일이 있든 스스로는 지킬 수 있는 여자니까.

단지 궁금한 건 하나다.

“근데 왜 같이 오지 않고요?”

내 물음에 아우릴 가비스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답했다.

“노부와 나눌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아, 그거······.

‘이제 와서 싫다고 배짱부릴 수도 없고…….’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람의 태도가 다른 것은 자연의 이치.

내줄 건 내주자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막상 이때가 오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혹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인가?”

아우릴 가비스의 목소리는 온화했으나 묘하게 그 말에서 압박감이 풍겨져왔다.

“이름.”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노인네가 눈에 이채를 띠며 한 걸음 다가왔다.

“이름을 말하게. 아니면 그 가면부터 먼저 벗는 것도 좋고. 흐음, 그래…… 일단 얼굴부터 보는 게 낫겠군.”

숨을 쉴 때마다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실로 공포스러웠다.

따라서…….

“자, 잠깐만!”

급하게 손을 들며 아우릴 가비스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아공간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 내 모습에 그가 물었다.

“…가방은 왜 뒤지는가?”

그야 시도해 볼 게 있거든.

“기록의 파편석?”

이내 내가 아공간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어째서?”

어째서긴 어째서야.

이게 마지막 내 노림수였으니까 그러지.

그도 그럴 게, 성주는 말했다.

[와, 왔을 때와 마찬가지라 들었소. 이곳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치면 다시 부름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방법은 ‘할 일’을 모두 마치는 것. 나는 남은 ‘할 일’이 라우라를 구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지금 끝이 났다.

쉽게 말해, 잘만 하면 이를 이용해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래로 튈 수도 있다는 뜻.

음, 그랬을 터였는데…….

‘왜 안 돼.’

기록의 파편석은 미동도 없었다.

한데 이에 나도 모르게 실망감이 얼굴에 드러났을까.

“……허허, 그래 그걸 노리고 있던 것인가.”

노인네도 내 속셈을 눈치챘는지, 눈을 희번덕이며 나를 쏘아봤다.

“우호적인 관계가 되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네. 그래서 이렇게 귀찮은 부탁까지 전부 다 들어준 것이네마는……. 설마 마지막까지 노부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오해… 오해입니다. 차분히 대화를 나누면—”

“됐네. 이제 자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정확히 알겠으니.”

‘니미럴.’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아우릴 가비스가 허공에 대고 손짓을 했다.

후웅-!

[폭풍의 눈]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물리력에 의해 끌려가는 몸.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샌가 나는 그의 앞에 다가와 있는 상태였다.

“자, 그럼 얼굴부터 볼까.”

이내 아우릴 가비스가 내 투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 손으로 벗을걸.’

뒤늦게 후회가 됐으나 이미 돌이키긴 늦은 상황.

툭.

그렇게 아우릴 가비스의 손끝이 내 투구에 닿은, 그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에도 빛은 있다던가.

솨아아아아아아아-!

손에 쥐고 있던 기록의 파편석이 돌연 새하얀 광채를 사방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노인 착취지.’

모든 게 새하얗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약속은 지키려 했는데.”

“…놈!!”

“소리 지르지 마십쇼. 그럼 뭐 어쩝니까? 여기서 내가 할 역할이 다 끝났다는데.”

“이름! 그럼 이름이라도 어서 말해—”

번뜩-!

빛이 섬광처럼 폭발하며 아우릴 가비스의 음성이 짓뭉개졌다.

그리고…….

툭.

빛이 가시며 살짝 떠 있던 발이 땅에 맞닿았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기는 했으나, 무임금 노인 착취 계획이 성공했다는 뜻—

“어…….”

근데 이건 또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어……?”

주변을 확인한 나는 멍하니 굳었다.

그야 모든 게 그대로였으니까.

부서뜨린 묘지도.

묘지 관리인의 사체도.

그리고 불에 탄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탄내까지도.

원래 시간대로 온 거라면 분명 달라진 점이 있어야 할 터인데, 주변에 자리한 모든 것이 그대로다.

단지…….

“뭐야, 이 할배 어디 갔어.”

아우릴 가비스만 없어졌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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