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투 더 퓨처 (1)
창살을 타고 새어들어오는 햇빛과 선선한 바람.
앞 가게에서 포장해 온 고기구이에 럼주로 반주를 하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크, 그래 이거거든.”
이 얼마 만에 만끽하는 일상이란 말인가.
몇 달 동안 칙칙한 노아르크에만 있어서 그런지, 그 갭 차이 덕분에 만족도가 말도 안 될 지경이다.
뭐,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나저나…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네.’
아우릴 가비스, 뤼헨프라하, 빛의 기사 제롬.
온갖 거물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온 덕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그날로부터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에휴.”
나는 아직도 이 시대에 머물러 있다.
“요놈은 대체 언제 써지려는 건지.”
습관처럼 기록의 파편석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툴툴대긴 했지만, 시간을 벌게 된 격이라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적어도 장비를 처분할 여유가 생겼지 않은가.
‘요놈이 왜 아직도 묵묵부답인지 짐작 가는 것도 몇 개 있고 말이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당분간 휴식을 갖기로 하며 지상에 숙소를 잡았다.
아, 참고로 방은 한 개다.
나는 두 개로 나누려 했는데, 아멜리아가 이제 와서 굳이 그럴 이유가 있냐며 핀잔을 줬기 때문인데…….
솔직히 납득해 버렸다.
하긴 아래에서 몇 달을 한 몸처럼 붙어 다녔는데?
남녀의 유별함을 논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긴 했지.
“또 술인 거냐…….”
“오, 왔냐.”
“내가 없을 땐 문을 잘 잠가두라 했을 텐데?”
외출했던 아멜리아가 방문에 들어오며 익숙하게 외투걸이에 겉옷을 던졌다.
새벽부터 어디를 갔다 왔냐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야 뻔하니까.
오늘도 언니가 잘 지내는지 몰래 스토킹을 하다가 왔겠지.
“오자마자 잔소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라우라는 잘 있냐?”
레테의 축복 프로토 타입의 센 약효 때문인지, 라우라는 사흘 전에서야 눈을 떴다. 그리고 구호소에 봉사를 온 신관에게 기억 상실 판정을 받으며, 품에 있던 신분패의 이름이 본인이라고 믿게 됐는데…….
“라우라가 아니라, 셰넌 엘라우라다.”
“아, 그랬지.”
참고로 셰넌 엘라우라는 이름은 우리가 새로이 마련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 늙은이가 준 신분패를 이용하기에는 조금 꺼려지더란 말이지.
하루 만에 수급해 온 신분패를 환자 소지품함의 것과 바꿔치기하고, 구호소에 적힌 환자 기록까지 일일이 수정하느라 아멜리아가 고생 좀 했다.
“그래서 걔는 어떤데?”
“애석하게도 봉사자로 온 신관에게 관심을 끈 거 같다. 오늘은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굉장히 빨랐다. 신관은 그게 기억이 되돌아올 징조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걱정 마라. 그렇게는 안 될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가 교단 측 인물인지라, 관심을 끄는 게 걸릴 뿐.”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금방 이해가 됐다.
“정수 때문에?”
“그래. 성인도 안 된 아이가 정수를 갖고 있는 것은 수상하게 보일 테니까.”
아마 냅두면 평생 자기 몸에 정수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겠지.
스탯이야 그냥 선천적으로 몸이 건강하단 것으로 퉁칠 수 있고, 기억이 없으니 이능 발현도 평생 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확실히 이건 나도 좀 불안하긴 하네. 하필 봉사를 나온 신관의 눈에 들다니.”
교단과 밀접한 삶을 살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수를 삭제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곳인 만큼 정수의 존재가 탄로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
“……기억을 잃는 게 희귀한 일이다 보니, 예기치 않게 관심을 사버린 거 같다.”
“그럼 이제 어떡하려고?”
“어떡하긴, 억지로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멜리아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당분간은 계속 지켜보기만 할 것이라고 말했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거로 이 화제는 여기서 마무리.
“그나저나 슬슬 말투 좀 바꾸는 게 어떠냐?”
내가 은근슬쩍 운을 떼자 아멜리아가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말투라니?”
“동료끼리 한다기엔 너무 딱딱한 말투지 않냐.”
“동료?”
“뭐냐 그 처음 듣는다는 표정은? 설마 나랑 한 약속을 까먹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오려는—”
“아니다, 기억하고 있다. 단지… 말투랑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 싶었을 뿐.”
“음, 사실 연관은 없다. 그냥 다른 말투를 쓰는 네가 궁금했을 뿐.”
“…뭐?”
내 말에 아멜리아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정말…….”
“왜 궁금할 수도 있지 않냐? 너 어릴 때 말투를 보니까 그때부터 이랬던 건 아닌 거 같던데.”
“그건…….”
아멜리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여기서 그냥 날 무시하거나, 자기를 놀리는 것이냐며 정색했을 터인데.
“말투는 노력해 보겠다.”
“어?”
“아니, 노력… 하겠어. 이러면 됐나? 아니, 됐… 어?”
되긴 뭐가 돼.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때였다.
“흐음… ‘됐어?’보다는 ‘됐니?’가 더 부드러운 어감인 거 같기도 하군. 너는 어느 쪽이 더 나은 것 같나?”
아멜리아가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의 말투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너무 쉽게 말투를 바꾸려는 거 아니냐?”
“바꾸라 한 건 얀델, 너지 않냐.”
“그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해 마라. 사실 나도 최근 들어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으니.”
“생각했던 문제라고?”
“…언니라면 분명 그러길 바랐을 테니까. 게다가 너도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 내게 문제가 있던 게 맞는 거겠지.”
아…….
‘그냥 너무 분위기가 우울해서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장난 좀 친 건데.’
더 늦기 전에 나는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억지로 바꿀 문제까진 아닌 거 같다. 말투가 뭐가 중요하겠냐? 암, 중요한 건 사람의 본질이지.”
처음엔 그 말에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아멜리아였으나, 미샤에게 반했던 전적이 있는 내 말이니 신용해도 좋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희 둘은 그런 관계였던 거군.”
“아…….”
내가 이걸 왜 말했지?
아무한테도 말 안 했던 이야기인데.
“흐음, 확실히 그런 말투도 흠잡지 않던 너니까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겠군. 일단 알겠다. 말투 문제는 당분간 보류하도록 하지.”
“……그래, 잘 생각했다.”
나로서는 제법 불편한 대화였기에, 서둘러 아까 들어갔어야 할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이제 서로 쉴 만큼 쉬었으니 본격적으로 대화를 좀 나눠 볼까 하는데.”
“대화라… 좋다.”
이내 아멜리아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우리는 휴식이란 명목하에 일주일 동안 미뤄 둔 회의를 시작했다.
* * *
회의의 첫 번째 안건은 이거였다.
“너, 정말 장미기사단이랑은 관계없는 거냐?”
“없다. 그리고 그 얘기는 전에 끝났을 텐데?”
나중에 들어보니 뤼헨프라하는 아멜리아가 그 집단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집요하게 추격해 왔던 것이었다.
아마 세간엔 알려지지 않은 원한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잃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을 테니까.]
놈이 그때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면, 분명 소중한 누군가를 그들 때문에 잃지 않았을까 싶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겠다마는.
“근데 이 이야기는 왜 또 하는 거지?”
그때는 그냥 기묘한 우연이라 하고 넘어갔지만, 차차 생각해 보니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너, 노아르크 성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오러를 배웠다고 했지?”
“그래, 눈빛이 마음에 든다며 몇 가지 알려 줬었다. 물론 기본이 되는 토대를 만들어 줬을 뿐, 오러를 깨우친 것은 훨씬 더 나중의 일이었다. 근데… 이 얘기도 분명 전에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
그때 우리는 그 여자가 장미기사단의 일원이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근데 혹시 그 여자가 너일 가능성은 없냐?”
“…뭐?”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들어서 말이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런 친절을 베풀 리가 없지 않나.”
꼬맹이 시절부터 제법 눈치가 빨랐던 아멜리아는 이번에도 내가 말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설마 우리에게 남은 해야 할 일이 그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
혼자 세상에 남은 응멜리아에게 ‘오러’의 뼈대를 만들어 주는 것.
이게 우리에게 남은 숙제일지 모른다.
다만…….
“걱정 마라. 그런 건 아닐 테니까.”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가능성을 거부했다.
근거라도 대보라 했지만, 이 부분은 자신을 믿어도 된다고 말할 뿐 길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내 생각이 틀린 거 같긴 한데…….’
정말 그렇다면 내게는 기쁜 소식이다.
원래 역사대로 따라가려면 앞으로 2년을 더 이곳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니까.
“그럼 이쯤에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두 번째로 꺼낸 화제는 아우릴 가비스였다.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가 앞으로 어떤 변수로 작용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 우리는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별다른 소득 없이 내가 혼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나저나 너는 왜 그런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거냐? 좋게 헤어졌어도 좋았을 텐데.”
“무슨 뜻이지? 그럼 내가 이름이랑 얼굴을 깠어야 했다는 거냐?”
“그게 아니더라도, 마지막에 놀리는 식으로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다.”
“아…….”
그건 그렇긴 하지.
그때는 속이 아주 시원했지만, 나중에 부들거렸을 노인네를 생각하면 조금 오싹해지는 것도 사실이니.
“넌 다 좋은데, 평소 언행에 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알겠다.”
“알겠다니 더 말은 안 하겠는데……. 조심해라. 내가 네 동료가 되겠다 한 것은, 네게 내 목숨을 맡기겠단 뜻이었으니까.”
신뢰를 넘어선 듯한 각오는 굉장히 고마웠다.
‘……근데 분명 더 말은 안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크흠.”
나는 기침 소리를 내며 화제를 끝낸 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다름 아닌 이번 회의의 핵심.
어떻게 해야 기록의 파편석이 발동할 것인가.
“정확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무엇인지를 의논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듯한 말투군?”
아무렴, 내가 생각 없이 말을 꺼냈을까.
2년 뒤 응멜리아에게 오러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 외에도 몇 가지 후보가 더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이거다.
“창세보구……?”
아멜리아는 ‘창세보구’가 언급되자마자 고개를 갸웃했지만, 가능성을 지울 수는 없었다.
뭐, 20년 뒤에 ‘창세보구’를 훔치는 게 나일 리는 없겠지만…….
앞으로 그 일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생기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바바리안의 심장’ 소동처럼.
결과는 훨씬 나중에 이루어지지만, 그 원인을 내가 제공하게 될 수도 있다.
“하긴, 창세보구라면 악령에게 특히나 중요한 물건이랬지. 그런 면에선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너도 악령—”
“쓰읍.”
“아, 실수다. 그 말은 언급하지 말랬는데.”
내게는 예민한 문제였으나 아멜리아가 곧장 미안하다고 사과했기에 옐로카드를 주는 것으로 넘어가줬다.
그럼 이쯤에서 두 번째.
“GM이라면… 분명 아우릴 가비스에게 집회를 넘겨받은 그자의 이명이었지.”
“그래.”
“근데 그자는 왜?”
“지금 시기가 딱 그놈한테 커뮤니티가 넘어간 시기라서 말이지.”
좀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과거의 그놈과 만나서 내가 뭔가를 해야지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그럴듯하군. 혹시 세 번째도 있나?”
그러면 없을까봐?
나는 즉시 마지막 가능성을 말하였다.
“내가 여기서 모은 것들을 미래로 전달할 수 있게끔 잘 숨겨 놓는 것. 어쩌면 그게 내 마지막 역할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냥 네 희망 사항인 거 아닌가?”
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그러는 너는 생각해 본 게 있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그, 글쎄… 생각이 나면 말해주겠다.”
쩝, 뭔가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건만.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동료의 모자람도 포용하는 게 리더의 자질일 터.
“됐고, 그래서 장비들은 다 팔렸나?”
“절반 이상은. 가격을 낮춘다면 더 빠른 시일 내에 처분이 가능한데—”
“아니, 시간이 걸리는 건 괜찮으니 제값을 받고 팔아줘라.”
“한데 귀한 것들도 꽤나 있던데, 몇 개는 갖고 있는 게 낫지 않나?”
어허, 뭘 모르는 소리.
장비의 경우에는 관리가 필수다.
시간이 흐르면 가치가 저하된다는 뜻.
게다가 20년 전 장비를 팔고 있으면 출처도 의심받을 테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악마분쇄기를 빼면 전부 다 정리하는 게 여러모로 깔끔하다.
‘문제는 이걸 대체 어디다가 숨겨놔야 안전하냐는 건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수없이 했던 고민을 다시금 이어가던 차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말할 게 있다.”
“응?”
“오늘 나갔다가 들은 건데, 중앙 거래소에 경매로 3등급 정수가 출품될 거라고 하더군.”
“어, 3등급 정수가? 웬일로 천공 경매장에 안 가고?”
“알미너스 상회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거 같더군.”
음, 중앙 거래소의 고급화를 노리는 건가?
암만 그래 봤자 천공 경매장은 못 이길 텐데.
“그래서 뭔 정수가 나오는데? 아, 얘네도 천공 경매장처럼 경매일 전날까지 비공개로 하려나?”
“그건 그렇지만, 무슨 정수인지 이미 알고 있어서 상관없다. 굉장히 유명한 경매였으니까.”
크, 그래 이게 회귀자 특전이지.
얼른 말해보라는 눈으로 재촉하자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볼-헤르찬의 정수다.”
과연 이게 운명이라는 걸까.
“……!!!!”
공교롭게도 내 육성법에 꼭 필요한 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