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고립 (4)
최악의 범죄 조직 오르큘리스.
그 안에서도 제법 명성이 있는 4인방.
그래서인지 더 기분이 묘하다.
이전과의 변화가 보다 확실하게 체감됐으니까.
“슈이츠, 어쩔 거지?”
어쩌긴 뭘 어째.
2층 고블린숲 전투에서는 고작 세 명이었다.
그 세 명을 상대하기 위해 천여 명에 이르는 탐험가들이 목숨을 바치고 싸워야 했다.
하지만…….
“싸워 봐야지. 적어도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는.”
그때처럼 절망적이지는 않다.
아니, 지금 멤버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부터 드는 나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런가? 알겠다.”
아멜리아의 반응을 보니 나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듯하다.
에르웬은 애초에 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이고.
“……아벳, 네크라페토.”
시체 수집가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에르웬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의를 줄까도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겁을 집어먹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낫다.
게다가 당장 달려나가거나 선공을 때리지 않는 걸 보면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당신, 뭐 해요. 마법 영창이 끊겼잖아요.”
멍하니 굳은 레이븐에게 순간이동 마법 영창을 이어가라는 말을 할 정도면, 살아남는 게 먼저라는 내 말도 기억해 주고 있는 듯한데…….
왠지… 대견하네.
“아……. 아, 알았어요.”
내 등에 대해 뭐라 말한 것을 끝으로 한참 동안 반응이 없던 레이븐이 정신을 차리고 제 할 일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의혹을 풀 상황이 아니라 판단한 모양.
‘쩝, 역시 눈치를 챈 거겠지?’
이 일이 추후 어떤 변수로 이어질까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저기 시체 수집가 놈도 날 보고 말하지 않았던가.
짝퉁 씨라고.
“피시싯, 거기 요정 씨는 너무 뚫어 지레 보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저라도 부담스러운데요.”
“…….”
“흐음, 그보다 참 놀랐습니다! 이번에 일족에서 돈을 크게 빌렸다고 들었는데… 설마 저런 짝퉁을 만드는 데 썼을 줄이야!”
녀석은 [거대화]를 보고도 내가 비요른 얀델이라는 것까지 연관 짓지 못했다.
하긴, 얘는 내가 죽었다고 확신하는 중일 테니까.
에르웬의 광증이야 워낙 유명하다 보니, 가짜를 만들었다고 하는 쪽이 더 납득이 됐겠지.
‘레이븐, 얘도 그리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몰라. 걸렸으면 걸린 거지.
설마 이번에 몸 바쳐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왕가를 배신할 수 없다며 다 일러바치겠어?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야 상대 쪽에서도 더 시간을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
“네크라페토 오빠, 저기 저 여자가 영창 중인 거, 다중 순간이동 같은데?”
상대측의 흑마법사가 우리의 보험을 눈치챘다.
“피시싯, 그럼 서둘러 시작해야겠군요. 피와 뼈, 그리고 절규의 춤—”
“아, 진짜 그 말투 이제 좀 그만하지? 언제부턴가 갑자기 이상한 버릇이 들어서, 원정을 나갈 때면 항상 가면부터 뒤집어쓰고…….”
“저… 비비앙 씨, 다른 사람도 보는데 그러는 건 조금…….”
“다른 사람 다 보니까 하지 말라는 거잖아! 어휴, 진짜 안에선 멀쩡한 사람이 왜 밖에만 나오면…….”
“……취미 생활입니다. 취미 생활.”
절규의 마녀가 녀석을 타박하며 잠깐 딜레이가 되기는 했으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둘 다 그만하고, 일이나 하지.”
로브를 뒤집어쓴 거구의 사내, 등대지기가 둘의 대화를 끊으며 자연스레 공기가 무거워졌다.
후, 텔레포트 게이지를 꽁으로 채우는 건 이제 끝인가?
“순간이동 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남았소?”
“…10분은 걸릴 거예요. 아까 술식이 해제되면서 마력이 흩어진 바람에.”
“그럼 영창 중에 다른 마법을 쓰는 건?”
“가능해요. 고위 마법은 무리겠지만, 필요할 때 돕는 정도라면.”
오케이, 한시름 덜었네.
“일단은 마법을 완성하는 데 집중하되, 상황을 봐서 지원해 주시오.”
“네, 알겠… 아니, 그보다 왜 당신이 지휘를 하고 있는 거죠?”
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시답지도 않은 의문이군. 지금 그게 중요하오?”
나는 재빠르게 논점을 흐린 뒤, 오더를 마저 이어갔다.
“에르웬, 에밀리. 너희 둘도 당장은 지키는 것에 집중해라. 일단 마법이 완성되는 게 먼저니까.”
“네.”
의외로 에르웬이 잠깐의 고민도 없이 내 말에 수긍했고, 아멜리아는 한 가지를 되물어왔다.
“…차라리 마법을 포기하고 힘을 합쳐 놈들과 싸우는 게 낫지 않나?”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저 네 명 말고 다른 놈이 언제 또 올지 모르지 않나.”
지원군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지원군이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보는 건 꺼려진다.
승산이야 충분하지만,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
그 과정에서 우리 중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도 그렇군.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설명이 됐는지 아멜리아도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음,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이제 없어졌다 해야 하나?
[그어어어어어-!]
우리를 포위한 형국의 시체 군단들이 일제히 달려들며 전투가 시작됐다.
***
우선 기본적인 형국은 간결하다.
사방에서 시체 군단이 달려들고, 우리는 수비 진형으로 이를 막아 낸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그어어어어어-!]
한 방이면 터져 나가던 시체들이 훨씬 위협적으로 변했다는 거겠지.
「리란느 비비앙이 5등급 흑마법 [죽은 자의 분노]를 시전했습니다.」
「리란느 비비앙이 4등급 흑마법 [암흑세례]를 시전했습니다.」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
나도 한때 애용했을 정도로 위력적인 조합이다.
흑마법에는 언데드를 대상으로한 고효율 버프들이 잔뜩 있으니까.
서로 시너지가 잘 난다고 해야 하나?
「리란느 비비앙이 4등급 흑마법 [명계의 등불]을 시전했습니다.」
후, 그래 역시 이것까지 쓰는구나.
하긴 이 조합에 이 마법이 빠질 수 없지.
후우우웅-!
하늘 위에 떠오른 흑빛의 불꽃이 떠오른 순간, 지금까지 열심히 박살 낸 시체들이 재생되며 다시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리란느 비비앙이 [고통의 여왕 에리미안느]를 소환했습니다.」
수천 개의 가시가 박힌 원령이 상공을 날아다니며 비명을 내지른다.
리란느 비비앙이란 흑마법사가 절규의 마녀라는 이명을 얻게 된 시그니처 소환수였다.
그러니까 효과가 분명…….
「캐릭터의 고통 내성 수치가 -200 하락합니다.」
통증 강화.
그리고.
「비명을 들은 대상자가 피해를 입을 시, 소환자의 흑마력이 일정량 회복됩니다.」
마법사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마력 수급.
‘뭐, 그래도 이건 우리가 안 다치고 조심하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소수 정예로 싸우는 지금에는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소환수는 아니다.
다만…….
「리란느 비비앙이 3등급 흑마법 [부두인형]을 시전했습니다.」
「캐릭터를 대상으로한 저주 계열의 마법 명중률이 100%로 상승하며,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시체 군단의 버프에서부터 시그니처 소환수를 뽑는 것까지 기본 준비를 끝마친 절규의 마녀가 본격적으로 마법을 써대기 시작했다.
「[상급 부패]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부상이 회복되는 속도가 대폭 감소합니다.」
「[무기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근력 수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보이지 않는 위협]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적의 공격을 감지하지 못할 확률이 증가…….」
아니, 왜 얘는 나한테만 저주를 거는 건데.
예전에 카루이의 사제였던 엘리사가 떠올라서 PTSD가 올 것만 같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힘내 봐야지.
조상신의 이름 대신 악이라도 써가며.
“으아아아아악!”
기합을 내지르며 망치를 휘두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전사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니까.
콰직-!
동료를 지키는 것에만 모든 행동을 배분하고, 원거리 공격은 에르웬에게 맡긴다.
다행히 에르웬은 투자한 그 이상의 아웃풋을 보여 주었다.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원소합성]을 시전했습니다.」
한 발에 큰 힘을 응축시킨 견제용 저격.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고속연사]를 시전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늘비.
그리고…….
「에르웬 포르나치 디 테르시아가 [어둠의 정령왕 디클로에]를 소환합니다.」
에르웬에게 혈령후라는 이명을 가져다 준 어둠의 정령왕까지.
콰콰콰콰쾅-!
정령왕이 소환된 시간은 5초 안팎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기간에 그 많던 시체 군단 중 반이 소멸됐다.
그래, 말 그대로 소멸이다.
아무리 [명계의 등불]이라고 한들 흔적 없이 사라진 시체들까지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아, 안 돼! 내가 어떻게 모았는데……!”
그 압도적인 폭력에 시체 수집가마저 극찬을 해올 지경.
다만, 정령왕을 소환한 반대급부로 에르웬의 정령력이 바닥났다.
영혼력을 자원으로 쓰는 각종 스킬들은 여전히 쓸 수 있지만, 앞으로 정령은 활용하지는 못한다는 뜻.
“…고생했다.”
“아니… 에요.”
에르웬이 갖고 있던 비장의 무기가 사라진 셈이나, 상황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몰려들던 시체 군단에 큰 공백이 생기며 훨씬 더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뭐, 애석하게도 그 여유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슈이츠, 놈이 온다.”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 너희는 물러나라.”
전투가 시작되고서도 잠시간 후방에 빠져 있던 혈기사가 등대지기로부터 치유를 받고서 전장에 복귀했다.
‘지원계 이능술사라더니 치유 스킬도 있었구나.’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에르웬에게 [파열]을 맞고 왼팔이 통째로 날아간 게 아까 전인데, 몇 분이나 됐다고 그게 벌써 나아?
그런 부상은 최상급 포션을 써서 붙여도 후유증이 남아서 한참 동안 못 쓰는—
서걱-!
응?
“끄윽.”
이번에도 갑옷 이음새를 노려오기에, 대충 몸으로 때우며 역공을 가하려던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고통 내성이 200이나 하락했으니, 작은 상처에도 커다란 아픔이 느껴지는 건 당연했지만…….
“이제, 베이는군.”
아까에 비해 상처가 훨씬 더 깊다.
한데 출혈은 비교적 적으며, 탄 냄새가 난다.
하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오러가 아니구나.’
놈의 검은 여전히 붉은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아까의 오러와는 달랐다.
공기를 타고 전해질 만큼 후끈한 열기.
‘하, 그사이에 불 인챈트를 해왔어?’
필시 등대지기의 공로일 것이다.
오러에는 멀쩡했지만, 마법에 작살이 난 정보를 통해 혈기사의 평타를 마법 딜로 바꿔 버린 거겠지.
‘거, 똑똑한 새끼.’
물론 화염 딜로 바뀌었다고 해도 도검류, 그리고 ‘베기’ 공격이라는 고정 값은 변하지 않기에 버티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딱 조금 더 전투 난이도가 오른 정도.
‘이 정도면 버티기는 충분하겠네.’
예상대로 이후로는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등골이 서늘했던 순간이 없던 건 아니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서로가 이렇다 할 득점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끄, 끝났어요!”
마침내 레이븐이 다중 순간이동 마법을 완성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전투를 끝내고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는 뜻.
오케이, 그럼 보험 가입은 끝났고.
“쓰지 말고 기다려 보시오.”
“네?”
‘네’는 무슨 ‘네’야.
한참 동안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이대로 가면 잠이나 제대로 자겠어?
떠날 땐 떠나도, 적어도 한 명은 데리고 가야지.
‘그럼 누구로 할까.’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첫 타깃이 정해졌다.
“오빠들! 쟤네 주문이 완성됐는데요?”
흑마법사는 빗자루를 타고 날고 있으니 패스.
“비비앙! 뭔가 좀 해보십쇼! 이대로 보내면 저만 손해가 막심하지 않습니까!!”
시체 수집가 새끼는 민첩 수치도 높은 데다가 무적기까지 있어서 잡기 어려울 테고.
휘이익-!
바로 지근거리에서 검을 휘두르는 중인 혈기사도 마찬가지다.
4:1로 덤빌 때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놈을 무슨 수로 나 혼자 잡아?
밀실에서 일대일로 붙는 게 아닌 이상 어렵다.
그렇기에…….
“……언젠가, 또 보겠군.”
이미 우리가 도망치는 게 기정사실인 듯 말하는 혈기사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거, 누가 그냥 간다고 말이라도 했나?
‘그래, 역시 쟤가 좋겠네.’
등대지기, 이름은 불명.
특징은 노아르크의 몇 없는 지원계 이능술사라는 것.
그리고…….
‘보통 장신구가 비싼데.’
손가락에 반지 열 개를 꽉 채워서 끼고 있다는 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