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우리 (5)
비요른 얀델 준남작.
그 이름을 입에 담은 후작의 눈에는 작은 떨림도 묻어나지 않았다.
아마 에르웬이나 아멜리아가 이런 눈으로 나를 쳐다봤으면 나는 솔직하게 더 혼나기 전에 모든 잘못을 털어놨겠지.
그만큼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하지만…….
후작과 그 둘은 다르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수십 년간 왕국의 이인자 자리를 지켜온 정치인의 눈을 그대로 믿는 것만큼 순진한 짓은 없을 터.
“후작님께선 혹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떠보고 있을 가능성을 절대 배제하지 않으며 모르쇠 자세를 일관했다.
물론 후작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경어를 듣고 있자니 굉장히 어색하군. 난 아직도 작위 수여 날의 자네 모습이 선명한데 말이야.]
“……이 오해의 원인은 역시, 에르웬입니까?”
[자네의 입장을 이해하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두고 뭐라 책잡지는 않겠네. 하지만…….]
수정구 너머의 후작이 등을 의자에서 떼며 탁상에 팔꿈치를 붙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자네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부터 만들어야겠군.]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설마 검증 마법이나 어긋난 신뢰 같은 넘버스 아이템을 쓰려는 건가?
그도 아니면 고문?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양한 가능성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예상들은 전부 다 빗나갔다.
[일단 이것부터 말하지.]
후작이 선택한 것은 ‘대화’였다.
[얀델 준남작, 경계치 말게. 나는 자네가 악령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니.]
그래, 초장부터 세게 나오는구나.
***
내 정체가 들켰을 때, 아멜리아가 가장 놀란 부분은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거였다.
악령인 내가 귀족 작위를 어떻게 받을 수 있었는가.
[……흐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왕가에서는 알면서도 묵인해 줬을 수도 있겠군. 그때 너는 도시에서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당시 아멜리아는 그런 추측을 하였고, 나도 이를 어느 정도 신빙성 있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금 후작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몰랐다는 뜻이 되겠네.’
물론 후작이 다 알면서 미끼를 던진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나 일단은 잠자코 이어지는 말을 듣기로 했다.
때로는 선공보다 후공이 유리할 때도 있는 법이니.
다 듣고 나서 판단하고 행동해도 늦지 않는다.
[리헨 슈이츠와 비요른 얀델 준남작. 이 두 탐험가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시간만 아까우니 따로 짚고 넘어가지 않겠네. 괜찮나?]
“예, 뭐 실제로 그런 오해를 몇 번인가 받았으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은 나를 준남작이라고 확신하는 근거들을 하나씩 설명했다.
[일단 자네가 리헨 슈이츠 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는 건 쉬웠네. 자네의 자료들을 우연히 손상시켜 폐기하게끔 만든 직원에게 전말을 들을 수 있었으니.]
웬 여자가 찾아와 협박을 했다던가?
의심이 깊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물론 처음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행정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는가? 오직 숫자만을 보는 것일세. 아무리 논리적이고 납득이 가는 이야기일지라도 숫자가 맞지 않으면 그건 틀린 이야기니까.]
[바로 자네의 경우가 그러했네.]
비요른 얀델은 죽었다.
그 명제를 부정한 순간, 모든 실마리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고 후작은 말했다.
[자네는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라기엔 너무 강했지. 하지만 2년이란 시간과 지원이 주어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네.]
[하면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우리의 눈을 피해 숨어 있을 수 있었을까. 이 또한 자네가 이 도시에 머무르지 않았다면 말이 됐네.]
이 도시가 아니라면 어디였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뻔했다.
[파루네섬에서 실종이 될 때, 노아르크에서 온 자들과 접촉이 있었다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로운 타이밍.
심지어 조사 결과, 2년 뒤에 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지금은 폐쇄가 된 지하 성채에서였다.
성벽 밖과 이어진 길이 있다고 알려진 바로 그 성채.
[혈령후가 그곳에 다녀온 뒤, 자네가 나타났지.]
이제 보니, 괜히 기사가 우리 집 문을 박살 내며 내통 혐의를 말한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냥 구실이라고만 생각했건만.
[자, 그럼 이제 내 얘기를 들은 감상을 말해주겠나?]
이내 후작이 수정구 너머의 나를 들여다보며 씨익 웃었다.
확실히 자신할 만큼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2년간 시간 여행을 하고 왔다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개연성이 맞는다.
하지만…….
‘어………….’
긴 얘기를 들은 내 감상은 단 하나였다.
암만 봐도 미끼가 아니라 진심으로 저리 믿고서 하는 얘기 같은데.
‘이걸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부족하다고 해야 할지…….’
이걸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거구나.
***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게는 목표를 정할 때 항상 우선순위를 매겨두는 버릇이 있으니까.
1순위는 우리의 생존.
2순위는 비요른 얀델 신분 되찾기.
3순위는 악령 혐의를 벗는 것.
나는 이곳에 향하며 이렇게 우선순위를 정해뒀다.
그렇기에…….
“확실히 재상이라 그런지 똑똑하군.”
리헨 슈이츠의 탈을 벗고서 바바리안의 모습을 드러낸다.
너무도 간단한 이유다.
앞서 말했듯 악령 혐의를 벗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비요른 얀델이란 이름을 되찾는 것.
나를 악령으로 알든, 배신자로 알든 상관없다.
이는 후작과의 협상으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한 문제였으니.
‘애초에 배신자라고 죽일 거였으면 여기 부르지도 않았겠지.’
“그래, 내가 비요른 얀델이다. 오랜만이군 후작.”
새삼 느끼지만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의 가면을 벗어던진 순간,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렇게 뿜어져 나올 리 없으니.
후, 이제 좀 살 거 같네.
[하하, 다행일세. 여기서도 아니라고 부정했으면, 정말 귀찮아질 뻔했으니.]
뼈가 실린 후작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귀찮아질 뻔했다라…….’
사실 내가 이쯤에서 순순히 정체를 밝힌 이유도 이것이었다. 이 다음에는 ‘대화’가 아니라 ‘물건’이 사용될 테니까.
그 ‘물건’이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화살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훤했다.
에르웬, 아멜리아, 레이븐.
어차피 얘네한테 빡세게 조사가 들어가면 저 가당치 않은 오해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
그럴 바엔 쿨하게 인정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쩌다 보니 남들 속이는 게 내 특기가 됐기도 하고.
[자, 그럼 이제부터가 본론이겠군.]
이내 후작이 잡담을 끝내고서 목소리를 깔았다.
[얀델 준남작, 노아르크에 붙은 이유가 뭔가?]
“글쎄, 그게 중요한가?”
[그런 비협조적인 자세는 좋지 않네. 자네는 똑똑한 친구가 아닌가.]
“붙었다고 할 것도 없다. 잠깐 내 목적을 위해서 머물렀을 뿐이니.”
[…….]
내 답변에 후작이 묘한 눈으로 말없이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뭐, 아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나는 과거에 돌아가서 노아르크에 머물렀다.
그것도 무려 6개월 동안.
심지어 마지막엔 성주놈 대가리도 쳐부쉈더랬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
“꺼억.”
[……?]
“아, 미안하다. 속에 공기가 차서.”
정말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사실 아까부터 속이 더부룩했었어서 말이지.
[자네도 긴장을 했었나 보군.]
한데 갑작스러운 딸꾹질로 분위기가 살짝 전환이 되어서일까?
후작도 더 깊이 캐묻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무튼, 그럼 지금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물론이다.”
[그리 말해도 좀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일세. 자네가 세작이 아니라면, 정체를 숨기고 활동한 이유가 뭔가?]
“왕가에서 먼저 날 악령이라고 공표했지 않나. 내 누명을 벗기 전에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우리를 경계했다라…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
이내 후작이 고개를 살짝 주억였고, 이제 슬슬 내 차례였다.
원래 질문은 주고받는 게 제맛이잖아?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묻는데, 그런 공표는 왜 한 건가? 후작 당신이라면 분명 그 이유도 알고 있을 거 같은데.”
[그건 자세히 말해 줄 수 없네. 단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고만 생각해 주게. 게다가 그때 우리는 자네가 살아 있는지도 몰랐지 않은가.]
후,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는데 제일 중요한 걸 못 들었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나는 미련을 갖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러면 이거나 슬슬 말해봐라.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정말 배신자라 생각했으면 이렇게 데려올 게 아니라 암살을 하는 게 맞았을 텐데.”
[왕가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네.]
지랄,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기는.
왕궁만 갖다 오면 온갖 구린내가 뒤섞여서 몸에 풀풀 배는구만.
“그럼 내게 원하는 게 없다는 뜻인가?”
[사실 자네가 세작이라고 하면, 자네를 회유해서 전쟁에 활용할 예정이었네.]
이거 봐, 말하자마자 바로 나오잖아.
“그렇다면 안타깝게 됐군.”
[글쎄, 안타까울 것까지 있겠나. 현 상황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네.]
“나쁘진 않다니?”
[전쟁에는 늘 영웅이 필요하니까.]
거, 악령으로 공표를 할 때는 언제고?
뻔뻔한 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저런 사람이니까 저 위치까지 올라간 거겠지.
[비요른 얀델 준남작, 왕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그래야 하는 이유는?”
[자네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니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내가 한 번 더 튕기자 후작이 본심을 드러냈다.
[노아르크와 연을 끊었든 아니든, 자네가 그들과 손을 잡았던 건 사실이지 않은가. 즉결 처형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사안이네.]
“쉽게 말해, 손을 잡으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없던 일뿐인가. 자네의 귀족 작위는 물론이고 원래의 이름까지 모두 되찾도록 도와주겠네.]
“악령이라는 공표는 어떡하고?”
[적당한 이야기가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 걸세.]
보아하니 후작은 이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까지 이미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 듯한데…….
[노아르크에도 잠시 목적을 위해서 머물렀다고 하지 않았던가? 감정적으로 꺼려지는 것이라면, 거래를 한다고 생각하게.]
조금 기분이 묘했다.
아니, 정확히는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그도 그럴 게, 최악의 최악까지 상정을 하고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왔건만.
‘이렇게까지 일이 술술 풀릴 수가 있나……?’
너무도 내게만 유리하게 일이 착착 진행되니 괜히 심장이 빨리 뛰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준남작, 결정을 내렸다면 슬슬 답해주겠나?]
당장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적이었다.
후작이나 왕가가 함께 뭔가 음흉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한들, 여기서 달리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는가.
여기선 승낙하고 나중에 자력으로 알아내야지.
“좋다. 그러니 자세한 얘기를 해봐라. 내 작위를 어떻게 돌려줄 건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까지.”
이내 승낙 의사를 표하자 후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다만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콰아아앙-!
정원 쪽에서 커다란 진동이 피어났다.
이게 뭔 소란인가 싶었으나, 곧이어 후작의 입을 통해 원인을 들을 수 있었다.
[저런, 그녀가 온 모양이군. 설마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행동할 줄은 몰랐네만.]
에르웬인 거구나.
[오늘 하려던 얘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도록 하고, 자네는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그녀부터 진정을 시키게.]
“…그러지.”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