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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387화 (387/549)

387화 야생마 (1)

솨아아아아아-!

온수로 머리를 적시고, 때를 밀듯이 비누로 피부를 박박 긁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에서 나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집에 돌아왔다는 게.

터벅, 터벅.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어내며 1층으로 내려가니 거실에 아멜리아와 에르웬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도 걸렸군.”

열심히 뽀득뽀득 씻고 온 나를 보며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멜리아.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필담으로 하지 않는 걸 보니, 별게 나오지 않았나 보군?”

“그래, 네가 우려한 것과 달리 도청 장치 같은 것은 찾아낼 수 없었다.”

다행이다.

놈들이 집에 쳐들어온 김에 뭔가 잔뜩 설치해 두고 가지는 않았을까 걱정을 했는—

“원래 있던 것들을 제하고는 말이지.”

응? 원래 있던 것이라니?

“표정을 보니 몰랐나 보군? 거실에는 예전부터 기록용 수정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말해도 금시초문이다.

다만, 예전부터 있었다는 말을 통해 유추라도 해보자면…….

“에르웬?”

유력한 용의자를 바라보며 해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자, 에르웬이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오…….”

“…….”

“시, 실제로 이게 아니었으면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건지 그렇게 빨리 찾아내지 못했을 거기도 하고…….”

……이러면 또 할 말이 없는데.

심지어 물어보니 기록용 수정구가 설치된 것도 현관과 거실뿐이라는데, 집주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보안적 조치로 여겨진다.

‘어쩐지 금방 후작가까지 잘 찾아왔더라니만.’

나는 후작이 준비한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는 나누지 못했던 의문을 꺼냈다.

“근데 에르웬, 너는 내가 후작가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그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죠! 그 남자가 직접 여기까지 왔는데!”

“그 남자라니……?”

“어, 혹시 아저씨는 모르셨던 건가요? 아저씨를 잡아가려 했던 그 지휘관이 바로 엘토라 테르세리온, 재상의 아들이잖아요!”

“뭐? 걔가 이번에 3군단장이 된 그놈이라고?”

재상은 미친놈인가?

자기 아들을 이런 위험한 임무에 보내?

만약 내가 거기서 대가리를 부쉈으면 어쩌려고?

‘아니, 애초에 자식을 애지중지했으면 전쟁터에 내보내지도 않았으려나?’

후작의 자식 농사 기법이 참 스파트라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오지랖을 부릴 영역은 아닐 터.

“그보다 슈이츠, 후작가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네. 얼른 말해주세요. 돌아왔을 때 아저씨는 없고 문은 부숴져있고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이후로는 후작이 한 오해와 내게 제안한 거래를 설명하고서 둘의 의견도 들어봤다.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어머, 아저씨의 작위를 돌려준다니 정말요? 너무 잘 됐어요!”

에르웬은 호재라며 기뻐한 반면.

“재상이라면 뒷배로서 최적의 인물이겠다마는, 그래도 어딘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군.”

나랑 비슷한 과인 아멜리아는 일이 너무 술술 풀린 것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어쩌겠냐. 거기서 싫다고 하면 일만 더 꼬였을 텐데.”

“…재상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조사를 해보지.”

“그래, 너만 믿고 있겠다.”

“네? 저는요?”

“물론 에르웬 너도.”

정말로, 믿을 건 동료뿐이다.

혼자 살아남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세상이니까.

***

툭툭.

일정 주기로 탁자를 검지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때.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엘토라 테르세리온.

후작가의 독자이자, 언젠가 재상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물려받으리란 평을 받는 자.

다만, 그를 보는 후작의 시선은 싸늘했다.

“너도 눈과 귀가 있으면 보고 들은 게 있을 테니,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으마.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솔직히… 굉장히 놀랐습니다. 설마 아버님의 말대로 비요른 얀델 준남작이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그게 전부더냐?”

후작의 되물음에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합류는 우리 후작가에 긍정적인 소식으로 여겨집니다.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용하게 활용을—”

“그만.”

논리적인 어조로 이어지던 사내의 말은 후작의 제지로 도중에 끊겼다.

“고작 거기까지밖에 보지 못한 것이냐?”

실망을 넘어선 혐오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향했다.

이에 사내는 눈을 내리깔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친네가 최근 들어서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원래부터 친절한 아비는 아니었으나. 절대로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2년 전부터 조금 심해지더니 요즘에는 아예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다 해야 하나?

‘그 알 수 없는 여자를 데려온 것도 그렇고……. 설마 나에 대해 뭔가 눈치를 챈 건가?’

수상한 점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지시를 내릴 일이 없으면 그를 부르지 않았고, 정보 공유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님.”

“말해보거라.”

“얀델 준남작이 악령이 아니란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왜 저에게까지 숨기신 겁니까?”

사내는 후작을 떠볼 생각으로 조심스레 물었고, 이내 후작은 차갑게 답하였다.

“언제까지고 내가 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가 미리 알았으면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애초에 얀델 준남작이 악령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글렀다.”

“예?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분명…….”

“됐다. 네게 말해봤자 입만 아플 테니.”

자식이 대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매정한 말.

이에 사내가 입을 꾹 다물었고, 후작은 이에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이곳에 그를 부른 이유를 꺼냈다.

“내일, 네가 직접 찾아가 얀델에게 기일을 알려라. 오늘 못다한 대화를 이어가자고.”

“기일은… 언제로 하면 되겠습니까?”

“금월 보름.”

시간대는 저녁이었다.

***

15일 오후.

“그럼 다녀오세요. 몸조심하시고요!”

에르웬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자, 대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마차의 문이 열렸다.

“오랜만이군.”

“이제 경어도 그만두기로 한 것이오?”

“후작의 아들이라며? 그럼 어차피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닌가. 내가 누구인지.”

“그건 그렇소만…….”

그리 답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재상 아들내미의 표정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으나,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됐고, 얼른 출발이나 하지.”

“그럽시다.”

드넓은 마차용 관도를 내달리는 마차.

머지않아 군용 승장강이 나타났고, 이전에도 그랬듯 이를 타고서 편하게 황도 카르논으로 이동했다.

“황도까지 1시간 만에 오다니, 편리하긴 하군. 한 번 탈 때 가격이 얼마지?”

“한 사람당 백만 스톤 정도로 계산하면 편할 것이오. 물론 마차가 없다는 가정하에.”

“……그 정도면 그냥 마차를 타고 다니는 편이 낫겠군.”

“그럴 거요. 실제로 사용인들까지 대동하며 이 설비를 이용하는 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으니. 급한 용무가 있을 때나 쓴다고 들었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어느덧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거대한 대저택.

이 비싼 황도 땅에 부지를 이만큼 쓰려면 대체 얼마가 드는 걸까?

“어서 갑시다. 아버님께서 기다리시오.”

“이번엔 수정구가 아닌 모양이군?”

“말했지 않소. 아버님께서 저녁 만찬을 함께하고자 한다고.”

그리 말해봤자 뭐…….

비대면 회식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지.

끼이이익-

이윽고 재상 아들내미의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곳은 4층에 위치한 만찬실이었다.

한쪽 외벽은 창이 크게 나 있어서 바깥의 정원과 그 너머 멀리로 왕궁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 뷰를 구경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마는.

“왔군.”

상석에 앉은 채로 내게 인사말을 건네는 재상.

“오랜만이다, 테르세리온 후작.”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앉게, 얀델 준남작. 아, 엘토라 너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고.”

“…좋은 시간 되십시오.”

재상 아들내미까지 떠나자 안 그래도 텅텅 비어 있던 만찬실이 더욱 비어 보인다.

하지만 프라이빗한 대화를 나누기엔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을 터.

툭.

일단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 도중 사용인의 출입을 막기 위함인지, 이미 상에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참고로 내 앞에는 음식의 양이 후작의 다섯 배는 됐다.

아무래도 내 종족적 특이점을 배려해준 모양.

“그럼 편하게 들게나. 갑갑한 예법을 그대에게도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

“…그렇다면야.”

이내 후작이 먼저 칼질을 하며 고기를 썰기 시작했고, 나도 후작의 눈치를 보며 닭다리 하나를 뜯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음식은 어때 입에 맞나?”

“훌륭하군.”

“그렇다면 다행일세.”

식사를 이어가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라프도니아 예법상 식사 중에 일 얘기는 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그런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종족.

“후작, 음식도 좋지만 이제 슬슬 그 얘기도 들어보고 싶은데.”

“자네의 작위를 어떻게 돌려줄 건지 말인가?”

“그래. 내가 갑자기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면 납득하지 않을 자들이 많을 텐데.”

후작도 내 무례에도 별말 않고 대화에 응해줬다.

“내 말을 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묻겠네. 혹시 자네가 노아르크에 있을 때 자네를 알고 있던 자가 몇이나 되나?”

“없다. 거기서도 모습을 감추고 지냈으니까.”

“그렇다면 훨씬 더 일이 쉬워지겠군.”

이내 후작은 이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우선 자네가 왕가의 특명을 받고서 노아르크에 잠입했던 것으로 포장할 계획이네. 그리고 2년 반이 지나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를 한 거지. 어떤가?”

고작 몇 문장으로 정리될 정도로 짧은 시나리오.

다만, 이게 통하겠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후작에게는 응당 이 계획을 실현할 능력이 있을 테니까.

“나쁘지 않군.”

“물론, 조금 시간은 걸릴 걸세. 왕가 내부의 서류를 만들고 해야 하니까.”

“나를 악령이라 공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걱정 말게. 잠입 임무 중에 필요한 일이었다고 해명하면 그만이니.”

시나리오 자체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으로 복귀를 하면 다시 예전의 일상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럼 그 대가로 내게 바라는 건?”

이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해야하는가.

후작은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내려놓고서 손을 들었다.

“총 두 가지일세.”

“말해봐라.”

“자네를 주축으로 한 특수 부대를 꾸려줄 테니, 이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게.”

“기한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예 노예로 부리려고 하는구나.

“밑도 끝도 없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니, 이건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럼 최대 3년으로 하지. 그전에 전쟁이 끝나면 거래는 끝이고. 물론 그동안 전공을 올린다면 이에 대해서도 차등 없이 포상이 나올 걸세.”

음, 일단 내용만 들으면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은 아니다.

어차피 요즘에는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전쟁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게 추세이기도 하고.

“그럼 두 번째는?”

“두 번째는…….”

후작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포크를 내려놨다.

“두 번째는 내일 아침 다시 말해주겠네. 그러는 쪽이 훨씬 더 얘기가 빠를 테니까. 널리고 널린 게 빈 방이니 오늘은 거기서 묵고 가게나.”

이건 뭐 60초 뒤 공개도 아니고.

***

저녁 만찬이 끝난 후, 나는 사용인들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이동했다.

이동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심적으로는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의도가 수상하단 말이지.’

후작이 나를 저택으로 초대한 날짜와 시간대, 그리고 뜬금없이 자고 가라는 요구까지.

딱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그렇기에 집에 있을 에르웬에게 연락만 하게 해달라고 한 뒤, 후작의 요구대로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때로는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

“에휴…….”

혼자 쓰기에는 너무도 넓고 화려한 방.

딸깍, 딸깍-

협탁의 마력등만을 켜둔 채 침대에 누워 시계를 확인하던 나는, 협탁의 마력등마저 끄고서 시계를 올려두었다.

딸깍, 딸깍, 딸깍.

정적 속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초침.

딸깍, 딸깍.

그러한 소리가 열 번 더 반복됐을 때.

「캐릭터의 영혼이 공명하며 특정 세계로 이끌립니다.」

나는 즉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번엔 평소보다 서둘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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