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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남기-447화 (447/549)

447화 파티 (4)

장미기사단의 비밀 아공간에서 어떤 게 나올지 모르니 한 명씩 순서대로 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군부 마법사 리리스 마로네.

“상자네요……?”

그녀의 아공간에서 나온 것은 목각함이었다.

책 한두 권 정도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사이즈.

“별다른 마법적 조치는 없어요. 그냥 열면 돼요.”

베르실의 허락이 떨어진 즉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어…….”

“이건…….”

목각함 내부의 물건을 확인한 대원들의 입에서 어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용물이 기대한 것과 너무 달랐던 탓이다.

“현금이랑 위조 신분증 몇 개, 초상화 한 장이 전부네요…….”

“…초상화는 대체 누구지? 가족인가?”

“그런 거 같아요. 여기저기 손때가 묻어 있는 걸 보면.”

뭐야 이게…….

“다, 다음! 다음 것을 열어보죠!”

김이 빠진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나를 비롯한 대원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아공간 오픈식을 재개했다.

“마찬가지로 현금이랑 신분증… 그리고 여기엔 이상한 알약이 있네요?”

두 번째 상자에서 나온 알약은 아멜리아, 그리고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물건이었다.

“레테의 축복이라는 비약이다.”

“……레인즈 씨는 아시는 물건인가요?”

“그래, 복용 시 대상자의 기억을 지우는 효과를 지녔지. 노아르크의 연금술사가 만들어 낸 비약인데 왕가에서도 어떻게 제조법을 알아냈나 보군.”

“이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기억을 얼마나 지울 수 있죠?”

“글쎄, 개량이 됐는지 내가 알던 것과는 형태가 조금씩 달라서.”

“그런가요……. 보니까 크기가 전부 다르기도 하네요. 왠지 클수록 많은 기억을 지울 거 같기는 한데… 이건 제가 한번 연구실에서 확인을 해볼게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어진 아공간 오픈식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또 레테의 축복인가 뭔가 하는 그 알약이군.”

“여기 무슨 독극물 같은 것도 있소이만.”

“…강산성 용액이네요. 무언가를 인멸할 때 썼을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시체라든가…….”

보물상자인 줄 알았던 아공간은 애석하게도 속 빈 강정이었다. 뭐, 레테의 축복 말고 쓸 만한 것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카이슬란 경, 이 수첩을 좀 봐주시겠어요?”

여섯 번째 아공간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이건… 왕가에서 풀어둔 세작들의 이름인 듯하오.”

다양한 기관에서 위장 신분으로 잠입 활동 중인 왕가의 정보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

새삼스레 왕가의 저력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이건 수많은 정보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인 듯하구려.”

“이렇게 많은데… 그게 일부라고요?”

“보시오. 정보원들 중 대부분이 특정 귀족가의 세력에 집중돼 있지 않소? 어쩌면 이 아공간의 주인은 그 귀족가와 관련된 개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오.”

“이 명부는… 그 개인 임무 하나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보원일 뿐이고요?”

“물론 나의 추측이오.”

카이슬란은 그렇게 말을 끝마쳤지만, 내가 봐도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왕가의 눈과 귀는 어디에도 있다더니,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모든 대원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느낀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왕가의 진짜 힘을.

“아무튼, 잘 됐군.”

나는 침묵 속에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베르실, 이 명부는 내가 갖고 있겠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이내 명부를 따로 챙겨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사안은 마무리.

“그나저나 이제 마지막이군.”

내 말에 대원들이 눈을 빛냈다.

아공간 오픈식이 진행되며 잔뜩 부풀었던 기대는 사그라들었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게 그 여자의 아공간이었지요?”

장미기사단의 식스.

단장인지 부단장인지, 그도 아니면 평단원인지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여자는 그날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목각함이군.”

마지막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으며 오픈한 상자의 내용물은 간소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현금.

신분증.

레테의 축복.

그리고…….

봉인이 뜯긴 편지지에 담겨 있던 한 장의 서류.

“이건…….”

왕가에서 하달된 명령서였다.

만약 원정대가 살아 돌아온다면 아이스록에서 멸하라는 지시가 담긴.

“쓸 수 있겠군.”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다.

***

아공간 오픈식이 끝난 후.

미궁에서 싸들고 온 장비들을 전부 양도 받았다.

“이 장비들은 앞으로 어쩔 것이오?”

“우선 노아르크 놈들에게 얻은 장비들은 최대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처분할 거다. 그리고 그 돈은 앞으로 우리의 군자금이 될 테고.”

“그렇구려…….”

사실상 원정에서 획득한 대부분의 전리품을 내게 넘기고 사용 권한도 맡긴 거나 다름없으나, 의외로 불만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신뢰가 기쁘긴 한데, 조금은 걱정되는 태도였다.

‘거참, 사기당하기 딱 좋겠네.’

만약 대장 자리에 앉았던 게, 나처럼 선량하고 책임감 넘치는 바바리안이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얀델, 그나저나 장미기사단의 장비들은 어찌할 생각이오? 그 상태로 처분한다면 반드시 왕가의 눈에 띌 텐데.”

“아, 그거라면 적당한 대장간을 수배해 하나씩 재가공을 할 생각이다. 파는 게 위험한 것도 맞지만, 파는 게 아까울 만큼 상위 소재이기도 하니까.”

아크와 동급의 금속인 미스티움은 녹이고, 5등급 소재인 오우거 가죽은 재봉선 그대로 잘라내 다른 장비로 제작할 계획이다.

물론 다 해봤자 양은 얼마 안 될 것이다.

단검을 다 녹여봤자 미스티움은 갑옷 하나를 만들기에도 애매할 것이며, 가죽의 경우에는 재가공 과정에서 손실률이 상당할 테지.

“모인 소재로 뭘 제작할지는 나중에 함께 정할 생각이니, 만약 소재가 탐나는 자가 있다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갖고 와라.”

미스티움 방패를 하나 만들면 딱일 거 같지만, 리더란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법.

공금은 공정하게 집단을 위해서만 쓸 예정이다.

뭐, 얘네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저는 그보다 슬슬 그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며칠 전에 클랜은 창설했다던데……. 우리는 언제 합류할 수 있는 걸까요?”

“아, 그거라면 베르실이 간략하게나마 차례대로 시기를 정해놨다.”

“어머, 그래요? 저는 언젠데요?”

“마로네 양은 약 3개월 뒤요. 상관과의 마찰을 이유로 퇴역하는 게 가장 깔끔할 거 같지만. 더 좋은 사유가 생각난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고요.”

“오호라, 그러면 나는 언제쯤이오?”

“카이슬란 경은……. 저희 중에 가장 늦어요. 아무래도 직위가 있으시니까. 우리에게 관심이 조금 덜해질 무렵… 최소 1년은 있다가 합류하는 쪽이 자연스러울 듯해요.”

“그렇구려…….”

“칼라 님은 얼마 전에 클랜에서 방출을 당했다고 하셨죠? 두 달 정도 쉬며 다른 클랜에 입단 의사를 표해 보세요. 어차피 받아 줄 클랜은 없을 테니까.”

“…….”

“새 둥지를 찾아봤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어서 전 원정대 인맥이었던 얀델의 클랜에 합류했다. 역시 이쪽이 훨씬 더 위화감이 없잖아요?”

“만약 받아 준다고 하면… 그땐 어떡합니까?”

“그러면 이전 부단장 경력을 인정해 달라고 하며 높은 지위를 요구하세요. 분명 그 즉시 꺼지라 할 테니. 인사 담당 업무도 해봤던 제 말이니 믿어도 좋아요.”

그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제임스 칼라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찌그러졌다.

“아, 파라브 경은…….”

그렇게 베르실의 논리정연한 브리핑이 한동안 이어졌다.

꽤 인상적이었다.

마법사 속성에 전직 클랜 부단장 속성에 현대인 속성까지 합쳐져서 그런가?

일 처리가 아주 칼 같구나 정말.

‘지구에서는 무슨 일을 했으려나?’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지나 브리핑이 끝나자 그다음은 내게 질문이 모였다.

“폭검 아이나르 프넬린, 그녀는 우리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소?”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나중에 만났을 땐 다들 입조심해라.”

“그렇구려…….”

“그나저나 벌써 칠강의 일원이 둘이나 있는데, 여기에 우리까지 들어가면…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도 상당히 끌게 되겠군요? 후후후.”

“흐음, 파라브 너는 네가 그 정도 급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어, 아닙니까? 아니, 대외적인 명성에선 조금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서도……. 어…….”

“저는 아우옌 록로브라는 단원이 궁금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던데. 믿을 만한 자인지요?”

우리 항해사의 경우에는 내가 아니라 아멜리아가 대신 답했다.

“믿을 만하다. 내가 보증하지.”

이와 비슷한 질문이 쏟아진 후에는 화제가 또 바뀌었다.

이번엔 승작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였고, 멜베스에 들어가기로 한 얘기를 해주자 자연스레 우리의 다음 계획이 도마에 올랐다.

다만 이 자리에서 전부 설명할 수는 없기에 나는 간추려서 비전만을 제시했다.

“우리에게 적이 많은 만큼, 적들도 적이 많다.”

“…….”

“그리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지.”

클랜을 만들고, 가문을 세우며 착실하게 우리를 지킬 성벽을 쌓아올리는 한편, 동료들을 최대한 늘리는 것.

그게 내 계획의 핵심이다.

우리를 그 지옥 속에다 내다버렸던 놈들에게 엿을 먹여주기 위한.

***

진지한 이야기가 끝난 후엔 한결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카이슬란 경은 어때요? 원정대에서 돌아온 후, 취조 같은 건 없었나요?”

“있기는 했지만, 취조라기보다는 청취였소. 검증 마법 같은 것도 따로 쓰지 않았고.”

서로의 근황을 물었고.

“고울랜드 씨, 혹시 잠이 좀 잘 오는 약 같은 것도 갖고 있습니까?”

“네. 필요하다면 드릴게요.”

“이유는 묻지 않으시는군요.”

“사실 저도 잠이 잘 안 오거든요. 그날 이후로.”

누군가는 도움을 받기도 하며.

“마로네 씨라고 하셨죠……. 그 손톱에 칠한 거는 뭐예요?”

“아, 이거요? 예쁘죠?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예요. 테르시아 씨도 해볼래요?”

몇몇은 그저 취미를 화제로 한참 떠들기도 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한 달 전 미궁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남이었는데.

“…….”

나는 모퉁이 쪽 소파에 혼자 앉은 채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승작식 연회와 달리, 화려한 궁중요리도 값비싼 와인도 없었다. 단지 임차인이 나가서 텅 빈 건물을 빌려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눌 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생각했다.

역시 내게는 이런 쪽의 연회가 훨씬 더 즐겁다고.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겠구려.”

늘 그렇듯 즐거운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갔다.

저녁이 되자 하나둘 자리를 뜨며 사실상 우리 원정대의 뒤풀이는 끝이 났고, 나와 에르웬, 아멜리아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뒤.

“도서관에 간다고? 이 아침에?”

나는 아멜리아와 에르웬의 의문 어린 시선을 받으며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그야 나도 나중에 깨달은 것인데.

[사흘 뒤,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쪽지에는 시간이 안 적혀 있었다.

라그나, 얘도 안 그럴 거같이 생겨서 가만 보면 진짜 칠칠맞다니까.

“후우…….”

눈에 익은 7구역의 거리를 걷고 있자니 머지않아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라비기온 국립도서관]

이 야만인의 몸에서 막 깨어난 초창기에는 정말 집처럼 틀어박혀 살기도 했던 바로 그 장소.

다만 도착하자마자 나는 흠칫 굳었다.

도서관 앞에 오늘은 폐관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던 탓이다.

‘……이런 경우는 생각 못 했는데.’

어떡하지? 이대로 그냥 여기서 기다릴까? 응, 그래 그러면 적어도 엇갈리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또각, 또각.

문 앞을 서성이던 내 곁으로 한 여자가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눈을 마주친 즉시 몸이 움찔했다.

“얀델 남작님을 뵙습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검은색 치마까지.

하얀 셔츠를 제하면 모든 게 검은색인 여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틀렸다.”

“……예?”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초면의 여자를 보며 딱 잘라 말했다.

“오늘은 남작이 아니라 단장이다.”

“…….”

“며칠 전에 창설된 ‘아나바다’ 클랜의.”

조금 느닷없었을 나의 말에도 여자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비즈니스 미소를 보이며 이렇게 답할 뿐.

“그러시군요. 앞으로는 호칭에 주의하겠습니다. 얀델 단장님.”

“고맙다. 오늘은 왠지 그런 기분이라서.”

“그런 기분… 말씀입니까?”

“아, 남작보단 단장이 더 강해 보이지 않나.”

“……그렇군요.”

뭔 차이인지 이해도 못 했을 거면서도 무작정 긍정의 뜻을 밝히는 여자.

나는 그 여자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 아나바다가 무슨 뜻인지도 아나?”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고대어로 맹수 무리라는 뜻을 지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어, 어… 그래, 그렇지……. 역시 아는군?”

나는 지식을 뽐낼 기회를 잃은 바바리안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여자는 애써 못 본 척하며 잠겨 있던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내 여자는 내 앞에서 먼저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입맛을 다셨다.

또각, 또각.

씁, 이거 암만 봐도 현별이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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