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증명 (5)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웅성대던 가주들이 입을 닫고서 내게로 시선을 모은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왠지 벽이 느껴지는 눈빛. 나와 눈이 마주친 턱수염 남작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얀델 남작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보구려.”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생각이 바뀔 거란 기대는 하지 말라는 거겠지.
이는 다른 가주라고 딱히 달라 보이진 않는다.
‘거, 나 혼자 잘 살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구만.’
서른한 개의 가문에서 온 서른한 명의 가주.
그중 나의 아군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저기 주최자 자리에서 노심초사 중인 토끼 남작뿐.
그러니까 다시 말해.
‘열다섯 명을 설득하면 된다는 거지.’
멜베스는 이제 나까지 해서 총 서른두 개의 가문이 소속된 집단이 되었다.
과반수까지 17개의 찬성표가 필요하며 이미 나와 토끼 남작의 찬성표가 확보된 상황.
“저… 얀델 남작?”
어딘가 불안한 기색인 토끼 남작의 목소리를 끝으로 생각 정리를 마쳤다.
“일단 이것부터 먼저 말하겠다. 나 한 명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열다섯이나 되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었다.
“리리비아 남작이 꺼낸 이 안건은 우리 멜베스 전체를 위한 일이다.”
당연히 기다렸다는 듯 반박이 들어왔다.
“얀델 남작과 남작 휘하의 클랜을 지원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멜베스를 위한 일이란 것이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니까.”
“……?”
고개를 갸웃하는 콧수염 남작.
“귀족의 힘은 가문에서 나온다. 한데 내 가문은 이제 막 터를 잡을 땅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잠시 자세를 낮추자 눈에 맺힌 의아함은 더욱 커진다.
후, 그럼 이 정도면 추진력은 충분한 거 같으니.
“하지만 그런 나를 진심으로 우습게 보는 귀족은 없다.”
나는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백작 아래로는 만나 주지도 않는단 테르세리온 후작도, 케알루너스 공작도 이런 나를 존중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
“그 이유가 뭐일 거 같나?”
“그야… 명성 아니겠소?”
“틀렸다.”
뭐, 엄밀히 말하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이름값이 어디서 나왔는데?
“바로 힘이다.”
거인, 비요른 얀델.
단신의 무력으로 전공을 쌓아 남작이 된 자.
“내 명성과 지위는 오직 내가 강했기에 얻을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게 바로 너희가 나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논리가 완성된다.
“내가 강해지면 내 지위 역시 올라갈 테니까.”
“……?”
“나는 남작 작위로 만족할 생각이 없다.”
나를 돕는 것은 멜베스를 위한 일이다.
***
총 서른하나.
아니, 이제는 내가 껴서 총 서른두 개의 이종족 가문이 연합해 만들어진 집단 멜베스.
이 집단의 가장 큰 약점은 두 개다.
하나는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기존 귀족 사회의 배척과 견제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가장 높은 애가 백작이지.’
백작가 하나가 최대 아웃풋이라는 거다.
“나를 도와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소망을 모두 이뤄주겠다.”
다만, 내 논리가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던 건지 돌아오는 반응은 무덤덤했다.
“얀델 남작의 포부는 알겠으나, 이 역시 결국엔 특정 가문만을 위한 특혜 아니겠소?”
거, 이럴 때는 남이지.
원래 사회라는 게 뒤에서 밀어주면 위에서 당겨주고 하는 건데.
‘그래도 몇 명은 내 얘기에 관심이 있던 거 같으니 됐나?’
낭만은 충분히 보여 줬으니, 이번에는 다른 쪽을 공략해 볼 차례.
“물론 나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멜베스는 아직까지도 미궁과 관련된 사업에 손을 대지 않고 있지 않나. 멜베스 차원에서 클랜을 후원한다고 생각하면 딱히 손해도 아닐 거다.”
수많은 귀족가들이 탐험가 클랜을 후원하는 건 단순히 과시 수단만은 아니다.
휘하의 클랜이 있다는 것은, 언제든 미궁 내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의미하니까.
이 왕국 전체가 미궁 하나에 의지해서 돌아가는 나라인 만큼, 그 영향력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멜베스에는 아직 그런 클랜이 없었다.
“얀델 남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진 알겠소. 다만, 우리가 미궁 사업에 손대지 않은 건 하지 못해서가 아니오.”
“그럼 어째서지?”
짐짓 그 이유를 모르는 척 묻자, 이번에도 콧수염 남작이 친절히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미궁에 손을 대면 기존 세력의 견제가 들어올 게 뻔하기 때문이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성지와 선을 그었던 것과 비슷한 일환이었다.
세력이 작은 만큼 적을 늘리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멜베스의 모토였다.
하지만…….
“근데 그건 내가 들어온 순간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닌가?”
멜베스에서 귀족이 되기 전부터 유명 탐험가였던 나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 전략은 쓸 수 없게 된 것이나 매한가지다.
다만, 콧수염 남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제가 더더욱 위험한 거요. 공식적인 지원이 이어지게 된다면 정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외부에서는 우리가 미궁에 손을 대기 위해 얀델 남작을 이용한다 생각할 테고, 이는 얀델 남작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소.”
개인적인 지원금은 1스톤도 줄 수 없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답변.
근데 이거로 물러날 거면 시작도 안 했지.
“그들이 그렇게 무섭나?”
나는 도발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면 적당한 자극이 필요한 법이니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의미가 없는 질문이구려.”
“왜 의미가 없다는 거냐?”
“우리는 단지 합리적으로 판단을 내릴 뿐이오. 한 가문을 이끈다는 건 그런 거니까. 나를 넘어 내 자식을. 내 자식을 넘어 내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요.”
조금은 감정적인 목소리였으나, 의외로 그다지 적대적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후배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하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
따라서 더 흔들 필요가 있었다.
“내 귀에는 단지 책임을 후대에게로 미루겠단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내 판단에 대해 그대에게 비방을 들을 이유는 없소.”
결국 콧수염 남작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었다.
쩝, 사사건건 껴들긴 해도 나름 젠틀한 아저씨긴 했는데.
왠지 미안한 감정도 일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넘어서 내 팀, 그리고 내 클랜을 위해 행동해서 말이지.
“오해가 있군.”
아무튼, 이 정도면 밀 만큼 밀었으니 당기기도 해줄 차례.
“헤스카이라 남작, 나는 비방하고자 한 말이 아니다. 단지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을 뿐.”
“…….”
“나를 끌어들인 것도 그래서 아니었나?”
살살 달래듯 말했으나 콧수염 남작은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다만 대신 다른 곳에서 발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저는 얀델 남작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백랑족의 브웰린 남작.
나이는 30대로 가주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젊은 축에 속하는 사내.
“우리에게도 변화가 필요하단 건 모두가 동의를 했던 내용이지 않습니까.”
예전에 토끼 남작이 들었던 대로, 멜베스 내에도 현재 상황에 불만이 있는 자는 많았다.
그러니까 각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나온 걸 테고.
“아, 그렇다고 이번 논제를 찬성한다는 뜻은 아닙니다마는. 아직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했던 옛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미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 정도는 해볼 만한 시도라 봅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다들 공을 세우는 와중에 우리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브웰린 남작의 말을 필두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저 역시 이 부분은 동의해요. 탐험가가 필요할 때마다 매번 성지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좀 번거로웠으니까요.”
“하지만 굳이 얀델 남작을 통해서 할 필요가 있소? 우리 부족의 탐험가만 모아도 클랜은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을 터인데.”
“확실히… 얀델 남작의 클랜은 아직 열 명도 안 되는 규모라고 들었소.”
“예. 차라리 각 가문에서 인재들을 모아 새로이 만든 뒤 다 함께 지원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만.”
흐음, 이건 좋지 않은데.
대화의 중심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개입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군!”
“…예?”
“그때쯤이면 전쟁은 진작에 끝나 있을 거다!”
안전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이 미궁 사업에 욕심을 내게 된 원인이 뭐겠는가.
다 전쟁 때문이다.
수많은 가문들이 자신이 후원하는 클랜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니까. 한데 그걸 지켜만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배가 아파왔을—.
‘어…….’
분명 그랬을 터인데…….
“글쎄요. 이번 전쟁에서부터 이득을 보겠다는 건 너무 조급한 생각이 아닐지.”
“나도 같은 의견이오. 훗날 이런 사태가 재발할 때를 대비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당장 하자는 말인 것은 아니었소. 급한 걸음은 언제나 삐끗하기 마련이니.”
이래서 귀족놈들이란.
미래를 지향하는 저 특유의 마음가짐이 문제다.
저런 느긋하고도 안일한 생각으로 뭔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수천 년 동안 이러니까 지금까지 변한 게 없겠지.
‘빨리빨리’를 최우선시 하는 K-바바리안으로서 실로 속이 터지는 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전략을 바꿔야겠는데.’
미래를 보는 정치인에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니즈에 맞춰 내 미래 가치를 어필하든가.
아니면, 그냥 쟤들이 그리는 미래를 시궁창처럼 보이게 만들든가.
당연히 내가 고른 것은 후자였다.
“멍청한 소리! 너희가 세월을 낭비하는 동안에도 너희를 무시하던 가문들은 더 강해질 거다!”
정치는 네거티브가 기본이라고 보고 듣고 자라서 말이지.
“재상만 봐도 모르나? 전쟁 중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가문을 키우고 있다! 자기 사람들에게만 공을 세울 수 있는 자리를 퍼주고 있지 않나!”
“하지만 이번에 공을 세운 얀델 남작은 후작의 사람이 아니지 않소?”
“나, 나는 예외다!”
과격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주제를 꺼내고.
“재상의 아들만 봐도 그렇다! 이름도 실력도 없는데 전쟁통에 군단장이 되고, 전쟁터에서도 한 일도 없이 공을 인정받고 있다!”
“테르세리온 소가주가 실력이 없다고 하기에는 좀…….”
“아무튼, 이번엔 남작이 된 게 다행히 나였지만, 전쟁이 더 길어지면 어떨 거 같나? 분명 몇 명쯤 새 귀족가문이 더 탄생할 테고, 그 가문은 고스란히 후원하던 가문의 휘하로 들어가겠지!”
“…….”
“두고만 볼 건가? 우리가 개입하면 이종족 출신 가문이 하나 더 생길 수도 있는 기회인데?”
욕망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않소. 때를 준비하지 못한 우리 잘못이니.”
“전쟁은 너무도 이례적인 일이었지.”
“솔직히 말해, 이런 사태가 과연 또 벌어질지도 모르겠소이다. 그냥 지금처럼 지내는 게 최선인 건 아닐지…….”
얘네들은 뭐지 진짜?
내 분전을 보다 못한 토끼 남작도 중간에 껴들어 지원을 했지만, 결국 여론을 확실하게 뒤집지는 못한 채 투표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의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얀델 남작 및 클랜 아나바다에 대한 정식 지원을 찬성하는 분께선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해 주십시오.”
보나 마나 결과는 뻔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보수적일지는 몰랐는데.’
결국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는—.
“저는 찬성입니다.”
토끼 남작과 내가 쓸쓸하게 손을 들고 있던 와중에 들려온 말.
백랑족의 브웰린 남작이었다.
그나마 가주들 중에 ‘변화’의 필요성만큼은 인정했던 자인데…….
‘……어?’
놀랍게도 그를 시작으로 손을 들기 시작한 가주가 점차 늘어났다.
하나, 둘, 셋, 넷…….
이내 집계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찬성표를 던진 숫자는 과반수를 턱걸이로 넘었다.
“……여, 열일곱의 가문이 찬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얀델 남작 및 클랜 아나바다에 대한 정식 지원 건이 가결되었습니다.”
멜베스 토박이인 토끼 남작도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할 정도의 결과.
다만, 투표가 끝나고 추가 논의가 시작되며 내 벅찬 감정은 사르륵 녹아내리고 말았다.
“지원은 동의했으나, 멜베스의 공금을 사용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찬성표, 반대표 중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를 향한 지원에 제약을 걸어댔고, 끝내 내 손에 쥐어진 것은 너무도 조촐했다.
1. 공금을 이용한 대출 가능(이자 및 한도 있음).
2. 멜베스 상회의 건물 중 하나를 클랜 하우스로 제공(저렴하게).
3. 멜베스 전용 퀘스트 수락 가능.
결국 핵심은 3번이었다.
만약 나와 클랜의 힘이 필요하면 멜베스에서 정식으로 요청을 하고, 그에 따라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식인데…….
‘……시작이 반이랬으니까.’
그래, 오늘은 이거로 만족하자.
***
토끼 남작의 집에서 열렸던 집회가 끝난 뒤, 나는 다시 마차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제 제대로 못잔 숙면을 취하고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또 나섰다.
이번 달은 내내 스케줄이 빡빡하거든.
“아, 비요른 님……. 오셨어요…….”
“좋은 아침이다. 샤빈 에무어.”
“…벌써 아침인가요?”
“…….”
곧바로 성지로 가서 부족장 업무를 시작했다.
시일이 다가오며 밤낮없이 근로 중인 행정군단의 부동산 판매 계획이 얼마나 진행됐는지를 체크했고, 내 인가가 필요한 일들을 듣고 허가해 주었다.
참고로 부족장 업무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오! 비요른! 왔나!”
“비요른이 아니라 부족장.”
“……그래, 부족장!”
아이나르에게 이번에 성인식을 끝낸 전사들이 몇이나 살아서 귀환했는지, 부족 내에 다른 일은 없는지 여론은 어떤지를 체크.
그리고…….
“내, 내가 2장로……?”
“싫나?”
“그럴 리가 있나! 하겠다! 무조건 내가 하겠다! 시켜만 줘라!!”
동료에게 배신을 당했다가 내게 구원받고서 각성하여 배낭혁명을 불러일으킨 전사, 타르손의 아들 카론을 2장로로 임명했다.
아이나르만으로는 역시 손이 부족했거든.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됐으니, 다음 달 성인식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내가 하나하나 신경 쓰기엔 시간이 없다.
안 그래도 바쁜 행정군단에 부담을 더 지우는 것도 못할 짓이고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하루, 이틀.
바쁜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개벽 157년 7월 5일.
땅을 파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