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레인보우 (5)
가르파스의 목걸이.
처음 참석한 귀족가의 연회에서 ‘기사분쇄자’란 이명과 함께 상품으로 얻어낸 넘버스 아이템.
다만 너무 초반부에 습득한 탓에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바로 그것.
이 목걸이를 쓰려면 탄탄한 재력이 받쳐줘야 한다.
‘한데 지금 마석이 벌리는 걸 보면…….’
한두 달 안에 목표로 한 양을 모을 수 있을 것 같단 판단이 선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당장 지하 1층에서 이것보다 확실하게 스펙업을 할 수 있는 물건이 없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정수보다 격한 성장이 가능할 터.
‘그럼 앞으로 한동안 중요한 건 마석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촌장섬 전역에 쌓이고 있을 마석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우기가 끝난 다음에 그걸 전부 다 주워오면 기간을 확 단축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너무 위험하겠지?
‘……잠깐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이트 헥츠, 이리 좀 와봐라.”
“…부르셨습니까?”
“별건 아니고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너는 예전에 우기 때 거인섬에 도착했다고 했지?”
“예, 우기가 시작된 첫날이었습니다.”
“그건 나도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그때 거기 거인섬에서도 마물이 가득했고?”
“…그렇습니다만?”
헥츠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지으면서도 ‘시체가 남는 마물’과 그렇지 않은 ‘일반 마물’들이 치열하게 서로를 물어뜯던 장면의 목격담을 말해주었다.
나는 이를 곰곰이 듣다가 말했다.
“이상하지 않나?”
“예……?”
“그렇게 마물들끼리 치고받고 싸웠으면 섬 안에 마석이 가득했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거인섬에 도착했을 때, 몬스터의 시체들만 보일 뿐 마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짚고 넘어가자 헥츠도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그 말씀대로군요. 당시엔 생각도 못 했지만……. 마을이 있던 섬처럼 그 섬에도 마석이 남았어야 할 텐데.”
“네가 그 동굴 안에 들어간 다음 처음 밖으로 나온 게 언제지?”
“우기가 끝나고 열흘쯤 지난 시기입니다. 그땐 우기가 언제 끝나는지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군.”
의문이 더 커진다.
대체 그 많은 마석이 다 어디로 갔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시스템이라면 바다 아래에도 마석이 가득해야 한다.
콰직-!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들이 바다에 떨어지며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으니까.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다에 마석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뤘어야 말이 된다.
하지만…….
‘그때 바다 아래에는 딱히 별게 없었지.’
음, 그냥 지금 한 번 바다에 들어가 확인해볼까?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마법사들의 조언을 구했다.
“확실히… 저 역시 굉장히 의문을 갖고 있던 부분입니다.”
“당장 바다 아래로 내려가서 확인해보죠!”
“하지만, 저 아래에는 온갖 마물들이 가득한데…….”
“지금 그게 중요하오? 숨겨져 있던 이 세계의 법칙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잠깐만요! 꼭 입수하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요!”
“……응?”
흥분해서 당장에라도 바다로 뛰어들 거 같던 마법사들이 베르실의 말에 일제히 멈췄다.
“우리가 가진 마석으로 확인해봐요.”
그리 말한 베르실은 갖고 있는 마석 하나를 꺼내 실로 묶은 뒤 배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온갖 마법을 사용해서 그 마석의 변화를 관찰했다.
덕분에 한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걸, 왜 이제서야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없어졌네요?”
“줄 뿐이군.”
바다에 들어간 마석은 사라진다.
***
실험 이후엔 수많은 가설, 그리고 의문점들이 제시됐다.
“바다의 색이 은빛인 것도 마석이 흡수된 영향인 걸까요?”
“글쎄, 아직 둘의 연관 관계를 확정짓기에는 근거가 부족하오.”
“예. 마석을 흡수한 거라면 바닷물에서도 마력이 검출되어야 하는데, 이 바닷물은 그렇지 않지요.”
“흐음……. 그런데 마석이 바닷물에만 녹는 거라면 지상의 것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원래의 나는 이런 지적인 토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한데, 바바리안으로 살면서 면역이 떨어진 걸까?
“저… 남작님께서는 방금 한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으윽… 머리가…….”
어째선지 대화를 들을수록 두통이 밀려들었기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벗어났다.
뭐, 연구야 마법사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이후로는 마법사들을 피해 달아나 동료들과 수다나 떨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또 얼마나 흘렀을까.
콰직-!
우기 7일 차에 접어들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물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23 : 59]
23시 50분을 넘은 때부터는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음… 10분 정도 시계에 오차가 있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결계를 해제하는 건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혹시 몬스터가 갑판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배가 망가지니까.
뭐든 확실한 게 좋은 법.
째깍, 째깍.
초침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 초침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자니, 어딘가 주변이 조용해진 것이 느껴진다.
쓱 둘러보니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시계를 꺼내놓고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마치 새해가 밝기 직전처럼.
째깍, 째깍.
누구도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듯, 어느덧 모두가 숨죽여 기다리던 그 시간이 찾아왔다.
[00 : 00]
지긋지긋하던 우기의 끝.
“12시다!”
“그럼 진짜 끝난 건가?”
갑판에 옹기종기 모인 탐험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새 지시를 내렸다.
“결계를 거둬라!”
이내 마법사들이 배 위에 우산처럼 펼친 결계마저 해제하자, 개방감이 확 느껴졌다.
그제야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항해 내내 몬스터들이 머리를 처박고 죽은 덕에 결계에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탓인데…….
“아, 아저씨!”
바람이나 즐겨볼까 하고 뱃머리를 향해가던 차, 전망대에 오른 에르웬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기! 저기 좀 보세요!”
뭐지?
고개를 들어 전망대를 응시하니 한 곳을 가리키는 에르웬이 보였다.
스으윽.
자연스레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인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니,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얘기를 듣고 그곳을 확인한 모든 탐험가들이 매한가지였다.
드넓게 펼쳐진 은빛의 수평선 너머.
“……무지개?”
무지개가 떠 있었다.
마치 우기가 끝난 하루를 축복하듯.
***
빨주노초파남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형형색색의 빛무리.
몬스터들의 피가 덕지덕지 붙은 배 위에서 보는 것이라 그런지 더욱더 그 알록달록한 색채가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하나 이대로 멍하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탐험가니까.
무지개든, 현세에 없을 지옥의 경관이든 뭐든.
수상한 게 보이면 일단 달려가서 돈이 될 게 있나 찾아보는.
“아우옌! 무지개가 있는 방향을 제대로 기록해라!”
“예? 아… 예!”
우선 무지개가 발생한 지점부터 체크했다.
그도 그럴 게, 타이밍부터가 수상했으니까.
‘우기가 끝났을 때, 바다에 나와 있어야지만 발견이 가능한 이상 현상.’
과연 이게 그냥 자연 현상일 뿐일까?
심지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무지개는 보통의 것과 형태부터 달랐다. 일반적인 무지개가 포물선, 혹은 곡선을 그린다면…….
솨아아아아아-!
저것은 원기둥처럼 쭉 위로 솟아나 있는 형태다.
마치 게임에서 뭔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려주는 이펙트처럼.
“현 위치에서는 21도. 바위섬을 기준으로는 34도 방향입니다! 거리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아우옌이 전문 용어로 뭐라뭐라 말했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일단 방향을 확인하는 건 제대로 해냈다는 것.
‘근데 거리는 알 수 없다라…….’
조금 고민이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뱃머리를 돌려서 무지개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가느냐.
그런 고민을 속으로 이어가던 때였다.
“어? 무지개가 사라진다!”
저 멀리 떠 있던 무지개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5분.
‘우기가 끝나고서 5분 동안만 관측이 가능하다라…….’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찾은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끝내 뱃머리를 틀지 않았다.
“어? 비요른? 무지개를 찾으러 떠나지 않는 거냐?”
아이나르는 그런 내 판단에 의문을 품은 듯했지만, 사실 리더로서 당연한 결정이었다.
거인섬도, 나무섬도, 도서관도 아직 제대로 공략을 하지 못한 상황 아닌가.
당장은 스펙업이 먼저다.
방향을 봐뒀으니 언제든 항해를 시작할 수 있기도 하고.
“아우옌, 거인섬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세 시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그렇게 항로를 유지하길 약 세 시간.
마침내 거인섬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멍하니 입을 떡 벌리는 것이었다.
후, 어쩐지 그냥 여기로 바로 오고 싶더라니.
“……마석이군.”
해안가 전역에 수천 개의 마석이 깔려 있었다.
***
거인섬을 다시 방문한 이유는 간단하다.
여타 섬들 중에 유일하게 포탈 비석이 발견된 곳이니까.
마지막에 본 그 초거대 거인은 마음에 걸리지만, 이곳을 탐사하며 밝혀낼 비밀들이 더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두근-!
섬에 숨겨진 비밀이고 뭐고, 해안가에 펼쳐진 마석을 본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물론 촌장섬에 비하면 마석이 떨어져 있는 밀도는 낮았다.
그러나 거인섬은 촌장섬에 비해 몇 배는 더 크다.
한데 이 섬 전체에 떨어진 마석을 전부 다 수거할 수 있다면?
“미쳤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목표량을 다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서둘러 배에서 내린 뒤 주인 없는 마석들을 말 그대로 주워서 퍼담았다.
물론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막 우기가 끝난 직후라 여기저기 몬스터들이 가득했던 탓인데…….
‘우기를 버틴 놈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다 까다로운 놈들뿐이네.’
최소 4등급.
거기에 괴상한 정수 조합으로 무장한 신종 개체도 나타나는 바람에 전투 난이도가 몹시 높은 편이다.
하지만, 우리도 점점 성장하는 중이란 말이지.
대표적으로는 뮐 아르민이 있다.
「뮐 아르민이 [과민성 피부]를 시전했습니다.」
「대상이 받는 피해량이 30% 증가합니다.」
「뮐 아르민이 [영원의 쇠약]을 시전했습니다.」
「대상의 육체 수치가 30% 감소하며, 모든 저주 효과가 1.5배 증가합니다.」
이 녀석의 클래스는 저주 특화 네크로맨서.
액티브 스킬도 저주 계통이며, 소환수도 그쪽 방면으로 특화되어 있다.
「뮐 아르민이 [혼령충]을 소환했습니다.」
대미지는 없다시피 하지만 타격할 때마다 일정 확률로 MP를 쪽쪽 빨아먹는 소환수.
「뮐 아르민이 [부식성 맹견]을 소환했습니다.」
적을 물 때마다 일정량의 내성을 깎는 소환수.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날아가 자폭하며 온갖 저주를 묻히는 소환수 등등.
인면조의 정수를 먹인 것도 그래서였다.
패시브 스킬인 [어미새]가 네크 전용이거든.
「반경 내의 소환수가 소환 해제 되었습니다.」
「소모된 영혼력의 80%를 돌려받습니다.」
「해당 소환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80% 감소합니다.」
네크로맨서 트리를 탈 때 필수로 가져가야 하는 정수.
이 정수 하나로로 인해 뮐 아르민은 이전보다 최소 다섯 배 이상은 강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2등급 코어 정수는 그 정도 성능을 갖고 있으니까.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습니다.」
「뮐 아르민이 [원혼 자폭병]을 소환했…….」
돌려받은 MP와 줄어든 쿨타임을 이용해 미친듯이 소환하는 자폭병.
퍼엉-!
대미지 세팅이 없던 만큼 피해 자체는 미미했지만, 폭발이 거듭될수록 저주가 쉴 새 없이 중첩된다.
‘잘 큰 디버퍼 하나가 있으니까 사냥이 확 쉬워지네.’
심지어 뮐 아르민은 현 상황에서도 찰떡이었다.
약한 적 여러 마리를 상대할 때보다 강한 적 하나와 싸울 때 더 빛을 발하는 클래스였으니까.
“수고했다. 뮐.”
“수고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음, 얘는 요즘따라 더 나를 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느낌이란 말이지.
꼬박꼬박 ‘남작님’이라며 극존칭을 쓰고.
‘챙길 거 다 챙겼다고 미리 선을 긋는 건가? 내가 갚으라고 할까 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서운할 거 같지만, 내 기분탓일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시간이 더 흘렀다.
하루, 이틀, 사흘…….
섬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석을 수거하랴, 몬스터들과 싸우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나날들.
[00 : 00]
어느덧 우기가 끝나고 3일 차가 되던 날.
신이 나서 마석을 줍고 있던 우리에게 안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마석이… 사라지고 있네요.”
섬 전역에 떨어진 주인 없는 마석들이 하나둘 분해가 되기 시작했다.
마치 땅에 묻힌 음식이 썩어 가기라도 하듯이.
“신기하네요… 마력이 분해된 건 확실한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이유가 어찌됐던 우리로서는 실로 애석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좋은 소식도 있었다.
“베르실, 지금까지 모은 마석이 얼마나 되나?”
“글쎄요? 검문소에서 환전하는 걸 기준으로 한다면……. 10억 스톤은 될 거 같은데요?”
목걸이 가챠를 하기엔 충분한 총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