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칼 잘 쓰는 도둑
화살이 날아온 쪽을 힐끔 보던 강무덕이 풍연초의 앞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좀도둑들을 정리해!”
명이 떨어지자 달구지 곁에 서 있던 호위무사들도 칼을 뽑아 들었다.
풍연초는 마치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니, 실제로 그에게 강무덕은 호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심의 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풍연초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확실히 만수상방은 남양상방과 달랐다.
전력상 우위인 것은 물론 녹림이라는 이름도 먹히지 않았다.
이럴 때는 달아나는 게 상책.
풍연초가 도망치려고 상체를 살짝 틀었을 때다.
누군가 빠르게 풍연초를 지나쳐 강무덕의 앞으로 나갔다.
연적하다.
깜짝 놀란 풍연초가 만류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연적하에게 닿지 않았다.
갑자기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끼어들자 강무덕은 기가 막혔다.
“흥! 어린놈이 벌써부터 도적질이라니! 부모를 잘못 만났구나! 오늘 네놈의 부모를 대신해…….”
가만히 듣고 있던 연적하가 강무덕의 말을 끊었다.
“보모님 욕은 하지 말지.”
그래도 한차례 산행을 경험했다고 연적하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태연한 것은 이유가 있다.
아까 강무덕이 화살을 자를 때, 왠지 천기덕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은 느낌적인 느낌 말이다. 풍연초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한 수가 연적하의 자신감을 키워 준 셈이다.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입만 살아가지고…….”
대뜸 강무덕이 검을 찔러 갔다.
동시에 연적하의 박도가 허공을 갈랐다.
쉬익. 채앵-.
‘응?’
강무덕이 놀란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경쾌한 금속성을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이 반 토막 나 있었다.
소년의 손에 들린 낡은 박도에서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나왔다.
‘고수다!’
조금만 움직여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강무덕은 반 토막 난 검을 들고 석상처럼 굳었다.
극한 긴장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미안해서 어쩌나. 아직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하마터면 목까지 자를 뻔했네.”
그제야 장무덕은 목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왼손으로 더듬어 보니 살갗이 베였는지 끈적끈적한 피가 묻어났다.
‘헉! 박도가 닿을 거리가 아닌데…….’
그렇다면 그 찰나지간에 유형화된 도기(刀氣)가 뻗어 나왔다는 소리다.
강무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강호에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는데 오늘 임자를 만난 모양이다.
“사, 살려 주십쇼.”
강무덕의 그 한마디 말에 모든 싸움이 정리되었다.
잠시 후 풍연초가 거들먹거리며 곽임생 행수에게 은자 사십 냥을 받아 냈다.
곽임생은 돈을 빼앗기고도 오히려 감사하다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산채로 돌아가는 길에 풍연초는 연적하에게 슬쩍 물었다.
“적하야, 아까 그건 뭐냐?”
“칼 자른 거요?”
“어, 그래, 그거.”
“둘째 형님이 가르쳐 준 항마도법이에요.”
“항마도법이라고?”
연적하와 탁고명을 힐끔거리던 풍연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천지도법이나 항마도법은 거기서 거기인 삼류도법이다. 그런 도법으로 섬전검 강무덕의 칼을 잘라 버리다니! 자기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풍연초는 산채로 돌아가자마자 연적하에게 항마도법의 시연을 부탁했다.
마당 한가운데서 연적하가 항마도법의 삼초식을 펼쳤다.
쇄에액. 쇄액.
박도가 움직일 때마다 경력이 사방팔방으로 뻗쳤다.
경력에 휘말린 나뭇가지가 뚝 부러지자 아홉 도적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건 장터의 항마도법이 아니다.
세상에 마귀가 있다면 혼비백산하고 달아날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도적들은 탁고명에게 항마도법을 가르쳐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
겨울이 되자 오봉산채는 근방에서 제법 유명해졌다.
남양상방에 이어 만수상방까지 통행세를 낸 이후로 상인들은 알아서 돈을 바쳤다. 대략 상인 한 사람당 은자 한 냥 정도만 내면 풍연초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지역 사회에 이름을 떨치자 관군에게 쫓기던 건달들이 하나 둘 찾아왔다.
해가 바뀔 무렵 오봉산채의 도적은 무려 스물에 달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대별산채에서 축하한다고 술까지 보내 줄 정도였다.
연적하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총 열다섯 번의 산행을 나갔다.
그동안 칼부림은 다섯 차례 일어났다.
상방의 호위무사들은 연적하의 일초를 당해 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오봉산을 넘나드는 상방 무사들 사이에 ‘오봉산에 칼 잘 쓰는 도둑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섯 번의 난투극 이후로 오봉산을 오가는 상방들은 조용히 통행세를 바쳤다. 그 바람에 더 이상 연적하가 박도를 쓰는 일은 없었다.
어느 날 밤, 여섯째인 장소봉이 조용히 연적하를 불러냈다.
눈 덮인 앞마당을 걷던 장소봉이 넌지시 물었다.
“적하 아우,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말을 잘 안 듣지?”
“별로요.”
장소봉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말을 잘 듣는다는 건지 안 듣는다는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다.
“큰형님이 조금 걱정하는 것 같더라. 네가 너무 심하게 대하지는 않을까 하고. 산행을 나가야 하는데 신입들 팔다리가 잘리면 곤란하지 않겠냐?”
최근 산채에 가입한 신입들은 하나같이 악명을 떨치는 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하남성에서 마두 소리를 듣던 자들까지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연히 서열 상승.
여덟째 이철산에서 열째 한채연까지는 알아서 굽히니 건드리지 않았다. 더 위로 치고 올라가려는 마두들의 일차 관문은 일곱째인 연적하였다.
얼마 전 연적하가 ‘형님들에게 도전하려면 나를 거쳐라’라고 선언한 뒤부터 그렇게 됐다. 그건 사실상 여섯째까지 건드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문득 장소봉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적하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고마웠다.
지난여름 풍연초와 탁고명이 다 죽어 가는 그를 주워 왔을 때, 당시 막내인 자신이 뒤치다꺼리를 했다. 그래서인지 연적하는 더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데도 굳이 일곱째에 머무르고 있었다.
‘떨지도 않고 잘한다’고 칭찬한 게 엊그제 같은데 연적하는 넉 달 만에 몰라보게 변했다. 고작 열일곱 살짜리 촌구석 산적이 유명해지다니!
장소봉은 ‘오봉산에 칼 잘 쓰는 도둑이 있다’는 다소 애매한 소문조차 너무 부러웠다. 별호라는 게 그러다가 생기곤 하지 않던가!
연적하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형님, 내일 비무 때문에 그래요? 그 싸가지 없는 늙은이들이 다칠까 봐?”
며칠째 눈이 내려 산행을 못 가게 되자 신입들은 비무를 요청했다.
이참에 서열이나 확실히 하자나 뭐라나.
“어? 어…….”
거침없이 나오는 욕설에 장소봉은 멈칫했다.
마두들의 입이 걸고 행동도 거친 건 사실이지만, 막상 어린 그의 입에서 ‘싸가지 없는 늙은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너는 그들이 싫으냐?”
“채연이가 그러는데 그 늙은이들이 뒤에서 큰형님을 욕했다고 하더라고요. 아휴! 나한테 걸렸으면 그 자리에서 이빨을 싹 다 뽑았는데…….”
“아!”
그제야 장소봉은 평소와 달리 연적하가 흥분한 이유를 알았다.
그는 누가 자신이나 의형제들을 무시하면 가만있지 않았다.
아직 그걸 모르는 신입들이 연적하의 눈에 단단히 찍힌 모양이다.
장소봉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런 문제라면 설사 큰형님이 나선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을 때라면 모를까…….’
얌전하던 그가 일단 작심을 하면 아무도 못 말렸다.
같은 시간, 다른 도적들의 숙소도 내일 있을 비무로 시끄러웠다.
사각턱의 장한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했다.
“일단 일곱째 어린놈만 때려눕히시면 그다음은 탄탄대로입니다. 풍 채주와 탁 부채주를 빼면 셋째부터 여섯째까지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니까요. 그들은 제 눈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잡놈들입니다.”
염소수염의 노인, 구밀복검 심양각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풍 채주와 탁 부채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느냐?”
“풍 채주는 천지도법을, 부채주는 항마도법을 익혔다고 들었습니다.”
“묘하게 귀에 익는군. 설마 떠돌이 약장수들이 장터에서 보여 주는 그 도법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습니까? 채주는 확실히 약장수에게 배웠고, 부채주는 절간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쯧쯧! 윗사람들이 그래서야 쓰나. 녹림의 체면이 있지.”
최근 입산(入山)한 사각턱의 장한, 독심낭인 황요명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봄이 오면 녹림대회가 열린다는데 이참에 싹 정리하고 가야 합니다. 서열 십 위까지 산에 오른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졌다는데, 이런 게 무슨 녹림입니까? 애들 다니는 서당도 아니고. 아무쪼록 산채의 정기를 바로 세워 주십쇼. 두 어르신들만 믿겠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또 한 늙은이, 무영신투 백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일곱째 연적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는 것 아니냐?”
황요명이 머뭇거렸다.
사실 그도 연적하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만만한 한채연을 잡고 몇 번 물어 봤지만 그녀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건 산채에서 오래 생활한 이철산이나 천기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듣기로 연적하는 부채주에게 항마도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개소리.”
백교의 입에서 바로 욕이 나왔다.
상방의 호위무사들이 그를 ‘오봉산의 칼 잘 쓰는 도둑’이라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항마도법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황요명은 자신이 말하고도 이치에 맞지 않는지라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심양각이 염소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흐흐.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연적하의 무위가 소문대로라고 해도 백 형에게는 미치지 못할 테니까. 무영신투라고 하면 오대세가의 고수들도 설설 기는데.”
“하하. 과찬의 말씀이오. 아무려면 구밀복검 심 형만 하겠소.”
심양각과 백교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은 연적하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채주가 돼야 하는데,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양보해 주기를 바랐다.
사실 두 사람의 명성을 생각하면 누가 채주가 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저희는 두 분 어르신만 믿고 있겠습니다.”
황요명이 새로 입산한 실력파 도적들을 대표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
날이 밝자 오봉산채에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바로 오늘 산적들의 서열 쟁탈전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산채의 인원은 총 스물다섯 명.
그중 스무 명은 두목인 풍연초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두목인 풍연초의 성질이 지랄맞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연적하의 뜻을 존중해서다.
그러나 최근 입산한 다섯은 달랐다.
그들은 아침부터 눈에 힘을 잔뜩 주고 굳은 얼굴로 돌아다녔다.
누가 봐도 한바탕할 것 같은 그런 몸짓들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심양각이 방구석에 있던 황요명에게 눈짓을 했다.
슬슬 바람을 잡으라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