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94화 (94/1,339)

94회. 엿들은 게 아닌데요

때마침 점소이 홍적소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오자,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겼다.

술이 일 순배쯤 돌았을까?

비봉 전서린이 다시 개봉의 일을 입에 올렸다.

“고 사형, 기루의 그 낭인들 말이에요. 알려진 게 좀 있어요?”

철협 고지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 신 행수 말로는 와룡장 출신이라고 하더라.”

“어머? 설마 언사에 있던 그 와룡장요? 참월검객이 세웠던?”

“맞아. 그 와룡장.”

“세상에! 와룡검객 말고도 그런 고수들이 있었다고요? 정말 믿어지지가 않네.”

전서린이 옆에 앉은 절검 양만승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양 사제, 들었어? 와룡장이래. 그게 말이 돼?”

“쩝, 안 될 건 또 뭐예요.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다’는 말 몰라요?”

“사형, 그 낭인들 말이에요. 연씨예요? 연씨라면 뭐 가능할 것도 같고.”

“아닌데?”

“네?”

“에?”

전서린과 양만승이 거의 동시에 되물었다.

깜짝 놀라는 걸 보니 두 사람 모두 낭인들이 연씨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연씨가 아니라 풍 뭐라고 하더라.”

전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풍씨라고요? 그럼 와룡장이 끌어 모은 낭인 맞네!”

“와아! 사저, 저 순간 소름 돋았어요. 기루나 지키는 낭인이 사람을 두 쪽 냈다니…….”

두 사람이 호들갑을 떨자 고지석이 혀를 찼다.

“쯧쯧! 그래 봐야 아무 소용 없다.”

“왜요? 그 낭인들이 벌써 죽기라도 했어요? 정말 그런 거예요?”

반전에 대한 예감으로 전서린의 음성이 높아졌다.

옆자리 여자의 호들갑에 연적하와 구천노도 심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성은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사매, 목소리 좀 낮추자. 여기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 응?”

고지석이 흥분한 전서린을 살살 달랬다.

평소 영웅담에 관심이 많은 그녀인지라 감정 이입을 좀 심하게 한 것 같다.

‘아차’ 싶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전서린이 작게 속삭였다.

“왜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반으로 쪼개진 자가 죽기 전에 풍 모라는 호위에게 독침을 박았단다.”

“독침요?”

전서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루에서 일어난 싸움에 독침이 등장하다니?

일단 독침은 다루기가 까다로워 특별한 수련을 거친 사람들만 쓴다.

살수들 말이다.

그건 즉, 기루에서 호위무사와 싸운 사람이 살수였다는 소리다.

“그래서요?”

“중독된 호위가 위독한 모양이더라.”

“아! 다른 한 사람은요? 살수 머리통에 구멍을 냈다는 사람요.”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풍 모라는 사람은 죽었을 게다. 쌍단검의 살수가 풍 모라는 사람을 죽이려고 뛰어든 걸 막아 냈다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양만승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가만! 두 살수가 풍 씨라는 호위를 죽이려고 한 거네요? 독침 쓰는 자와 쌍단검 쓰는 자. 그 호위는 독침에 맞아 위독해진 거고. 맞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지.”

“와우! 고 사형 말씀대로 정말 흥미진진하네요. 기루의 호위무사에게 누가 자객을 보냈을까요? 낭인들은 자기가 직접 손쓰고 말지 살수를 고용하지는 않잖아요? 그럴 돈도 없을 테고.”

“글쎄다. 원한이라는 게…….”

고지석이 한창 말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연적하였다.

“잠깐만요. 지금 살수들이 풍 씨라는 호위를 죽이려 했다고 그랬나요?”

고지석, 전서린, 양만승이 황당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것도 기분 나쁜데, 심지어 끼어들기까지 하다니?

전서린이 불쾌하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뭐야! 지금까지 우리 얘기를 엿들은 거야?”

“엿들은 게 아니라 그냥 들린 건데요? 심 노인, 가만있었는데 들린 거 맞지?”

연적하가 가만히 있는 심통을 끌어 들였다.

“그러믄요. 옆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 놓고 안 들었기를 바라면 미친 거지요.”

심통의 과격한 발언에 고지석 일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낙양에서 의천문 제자들에게 저따위로 말하다니?

최근 유명교로 인해 위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천문은 낙양의 절대 강자였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주변에 있던 술손님들이 슬금슬금 뒤쪽으로 물러났다.

괜히 무림인들의 싸움에 휘말려 다치면 자신만 손해인 까닭이다.

비릿한 시선으로 이 남 일 녀를 쓸어 보던 심통이 말했다.

“흐흐, 노부가 올려 보게 만들다니. 당장 자리에 앉지 않으면 다리를 잘라 버릴 테다.”

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소리다.

감히 의천문의 코앞에서 의천문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다니?

그래도 셋 중 가장 연장자인 고지석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우리들은 의천문의 이대제자요. 우리 다리를 자르겠다고 협박하는 노선배의 존성대명을 알고 싶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들어나 봅시다.”

순간 심통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으흐흐흐. 군자검이면 모를까? 고작 의천문의 이대제자가 노부의 이름을 묻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이 몸이 십 년 전만 해도…….”

그때 연적하가 심통의 말을 끊었다.

“심 노인, 그만해. 십 년 전에 나 아홉 살이었어. 거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그냥 ‘소리가 커서 잘 들렸다’까지만 해야지.”

“예, 공자님. 험, 험, 엿들은 게 아니라 소리가 커서 잘 들린 거다. 알겠느냐?”

“…….”

고지석은 전서린, 양만승과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소년과 노인의 저급한 언행은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문주님까지 거론했으니 사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칼을 뽑아야 했다.

고지석이 막 검 손잡이를 잡아갈 때다.

‘챙’ 소리와 함께 전서린의 검이 연적하를 찔러 갔다.

전서린은 처음부터 이 어린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화 중에 불쑥 끼어든 것도 그렇고, 저 성질 더러운 늙은이를 끌어들인 것까지.

자신이 먼저 이 녀석을 점찍으면, 사형과 사제의 검은 늙은이를 향할 게 틀림없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사형제들보다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갈 때가 있다고 하던가?

지금이 그때인가 보다.

나아가는 검의 속도가 속 터지게 더뎠다.

꾸물꾸물.

어느 정도냐 하면, 검을 쥔 자신의 손등에 있는 솜털이 다 보였다.

세상에!

오행무산검의 검결을 두 번이나 암송했음에도 검은 아직 녀석의 목에 닿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낀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빠르게 돌아갔다.

녀석의 손가락이 느려터진 검 날을 잡자, 몸이 ‘홱’ 하고 뒤집어졌다.

‘어?’

낯선 주루의 천장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누군가 주먹으로 등짝을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철퍽.

삐이이이-.

머리에 벼락을 맞으면 이럴까?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아! 고 사형과 양 사제가 죽으면 안 되는데…….’

엉뚱하게도 전서린은 그 혼란의 와중에 사형제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고지석과 양만승의 상태는 그녀보다 훨씬 나빴다.

그들의 상대가 구밀복검, 또는 하남이흉이라 불리던 심통인 까닭이다.

고지석은 이마가 깨졌고, 양만승은 팔이 부러졌다.

심통이 회심한 덕분에 그 정도로 끝났다는 걸 그들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이 남 일 녀를 자리에 앉힌 연적하가 정중하게 말했다.

“자아, 형제자매님들. 차분하게 다시 대화를 나눠 보자고요. 조금 전에 풍씨 성을 가진 호위가 살수에게 독침을 박았다고 했어요?”

고지석이 손바닥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를 누르며 답했다.

“아니, 그 반대요. 살수로 보이는 남자가 호위에게 독침을 박았소.”

“아, 그래서 풍씨 성을 가진 호위가 위독하고?”

“그렇소.”

“왜 살수라고 생각해요?”

“독침은 다루는 게 까다로워 훈련받은 살수들이나 사용하기 때문이오.”

“아하! 그럼 두 번째 질문. 쌍단검을 든 사람도 살수라고 했는데, 그건 왜죠?”

고지석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풍씨 성을 가진 호위를 죽이려고 방에 뛰어들어서 살수라고 한 것이오. 환자가 있는 방에 칼을 들고 뛰어드는 손님은 없지 않소?”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보니 우문현답이다.

독침이야 강호 생리를 몰라서 그랬다지만, 쌍단검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만사를 심통에게 맡기고 수동적으로 다니다 보니 바보가 된 기분이다.

자책하던 연적하가 다시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니까 잘 듣고 대답합시다. 짐작되는 살수 집단은 어디?”

“…….”

고지석은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살수 집단임에는 말할 것도 없다. 까딱 잘못하면 그들과 원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연적하는 이 남 일 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보내 주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으로 말이다.

양만승이 고지석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부러진 팔이 너무 아파서 빨리 돌아가 치료를 받고 싶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이 대화를 끝내야 했다.

“독침을 쓰는 자들은 적혈루와 죽방에 있다고 들었소. 쌍단검은 잘 모르겠지만…….”

그때 멍하니 앉아 있던 전서린이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알아요. 쌍단검의 고수는 삼도천과 죽방에 있어요.”

연적하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적혈루, 죽방, 삼도천 중에 하나다?”

“그럴 거예요.”

옆에서 듣고 있던 심통이 끼어들었다.

“공자님, 제가 적혈루에 아는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놈이라면 죽방과 삼도천도 알 겁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연적하가 심통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놈이라는 사람이 심 노인보다 나이가 많아? 적어?”

“비슷할 겁니다.”

“그럼 진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네. 심 노인도 오늘내일하는 나이잖아.”

“무림인들은 명줄이 기니까 살아 있을 겁니다. 저도 아직 생생하지 않습니까?”

“생생은 무슨. 빨리 적혈루에 있다는 사람 찾을 생각이나 해. 그리고.”

연적하가 고지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중독된 호위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니면 그 기루 이름이라도.”

“호위가 있는 곳은 모릅니다만, 싸움이 난 기루는 알고 있습니다. 용희루라고 개봉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곳이거든요”

전서린이 비꼬듯 중얼거렸다.

“……창녀들의 소굴이죠.”

“알았어요. 개봉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창녀들의 소굴 용희루라 이거죠? 이제 그만 가 봐요.”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풀려난 걸 실감하지 못하는 얼굴들이다.

엉거주춤하고 있는 그들보다 오히려 연적하가 먼저 자리를 떴다.

객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적하가 말했다.

“심 노인, 사합원은 취소야. 새벽에 출발할 테니까 이것저것 좀 챙겨 놔. 지난밤 꿈도 그렇고, 아무래도 큰형님에게 일이 생긴 것 같아.”

“예, 두 사람이라니 분명 풍 형제와 탁 형제일 겁니다.”

심통은 오봉십걸이 하산한 뒤로 그들에 대한 호칭을 바꿨다. 세상에 내려간 사람들을 녹림과 연관된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어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와룡장 출신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익힌 구천세법 때문일 것이다. 개봉에서 잘살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어쩌다 살수와 얽히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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