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회. 내 이름은 연적하
개봉.
용희루.
월하교당의 장로 소수마검 진가희는 본래 호광성 사파 신검회 출신이다. 호광성의 소문난 마녀였던 진가희는 월하선자를 만나 유명교에 투신했다.
그녀의 절기는 신검회 출신답게 검이다.
특별히 소수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그녀의 희고 고운 손 때문이다.
신검회의 고수였던 그녀는 유명교 십두마병이 된 뒤로 더욱 고절한 경지에 올랐다. 그래서 다른 십두마병 들조차도 진가희 앞에서는 한 수 양보했다.
진가희가 혼자 사해상방의 대행수 이화수를 따라나선 것도 그래서다. 십두마병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 두려울 게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유명교, 특히나 월하교당에서 와룡장은 형편없는 무가로 찍혀 있다. 와룡장을 접수할 당시 지리멸렬한 것이 그 원인이다.
그러니 진가희가 혼자 욕심을 부릴 만도 했다.
그 자신은 십두마병 중에 고수요, 상대는 형편없는 와룡장의 생존자들이었으니 말이다.
해거름 무렵 진가희와 대행수 이화수는 용희루 앞에 도착했다.
소문난 기루답게 용희루 앞은 드나드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기녀들의 웃음소리와 금 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파의 여협들이라면 인상을 찌푸릴 일이지만 진가희는 도리어 웃었다.
단지 사파여서가 아니라 그녀는 기루를 자주 애용하는 흔치 않은 여자였다.
“물 좋다는 용희루를 이렇게 와 보네.”
중얼거리는 진가희에게 이화수가 말했다.
“장로님께서 원하신다면 공짜로 얼마든지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일만 잘 처리해 주십시오.”
“호호. 지금 그 말 기억해 두지. 나중에 다른 소리나 하지 마라.”
“예, 예. 그런데 그 늙은이는 언제쯤?”
“시간 끌 게 뭐 있다고. 얼른 처리하고 술이나 마셔야겠다. 호위들의 숙소에 머무르고 있다 했느냐? 앞장서거라.”
“예.”
이화수가 진가희를 모시고 용희루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을 지나 깊숙이 들어가자 기루가 아니라 절간에 온 것처럼 조용했다.
진가희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괜히 조용한 게 아니었다.
기녀들은 물론 잡부들까지 소리 내지 않으려고 뒤꿈치를 들고 살살 걸어 다닌다.
보통의 기루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흥! 여기가 황실도 아닌데 다들 내관처럼 걷고 있네?’
와룡장 출신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딱 그 꼴이다.
와룡장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친 놈들이 여기서 황제 행세라니.
‘갈기갈기 찢어 주마.’
재물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자신이 나서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걸음을 멈춘 이화수가 나직이 말했다.
“저곳이 바로 호위들의 숙소입니다. 그자들이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칼만 안 들었지 강도와 같은 자들입니다.”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일방적으로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방주가 허락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화수가 계속해서 험담을 늘어놓을 때다.
덜컹.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소년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연적하였다.
“거기 늙은이, 누구더러 강도래? 정말 강도 한번 만나 볼 테야?”
억울한 듯 말했지만 연적하는 내심 웃었다.
사실 저 늙은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녹림은 강도다. 그러니 자신들은 칼만 안 든 강도가 아니라 진짜 강도였다.
이화수가 찔끔 놀란 얼굴로 물러섰다.
그러자 진가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꼬마야, 안에 와룡장에서 도망친 어른들이 있지? 싹 다 나오라고 해.”
“없는데요?”
“없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진가희가 이화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화수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사이 연적하가 밖으로 나와 주섬주섬 신발을 꿰신기 시작했다.
마치 뒷간에라도 가려는 듯 한가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진가희는 그런 소년의 행동에 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화수의 말과 소년의 언행이 너무도 달라서다.
결국 보다 못한 이화수가 소년에게 따지듯 물었다.
“너희가 와룡장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냐?”
“응, 아니야.”
“허면 풍가와 탁가가 와룡장 출신이라고 한건 뭐냐!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냐!”
연적하가 이화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우리가 와룡장 출신이라는 말은 맞아. 하지만 와룡장 사람들도 아니고, 와룡장에서 달아난 적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화수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때 진가희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 무슨 소린지 알겠다. 사설이 긴데 결국 와룡장 출신이라는 거지?”
“그런데요?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이 누님이 월하교당의 장로거든. 그러니까 와룡장과 관계된 사람들은 전부…….”
“아! 월하교당에서 왔다고? 와룡장에 세워졌다는 그 유명교 교당? 맞지?”
연적하의 눈이 재밌는 걸 본 것처럼 반짝였다.
“그래, 그러니까 너희는 모두 내 손에…….”
“아줌마도 십두마병이야?”
순간 진가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까부터 자꾸 말을 끊는 것도 짜증 나는데, 아줌마라니?
그러는 동안 전각 안에서 두 남자가 나왔다.
풍연초와 탁고명이다.
두 사람은 신발을 신더니, 마치 구경꾼처럼 도로 마루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꼴을 본 진가희의 눈이 살기로 물들어 갔다.
“후후후. 그래, 이 몸이 십두마병이시다. 오늘 내 눈에 딱 걸렸으니 한 놈도…….”
“아줌마, 십두마병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뜻밖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진가희가 되물었다.
“어떻게 되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재가 되어 사라지더라고. 아줌마는 왜 그런지 알아?”
연적하가 진가희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휘우우우-.
연적하의 주위로 세찬 바람이 일어났다.
진가희는 소년의 기이한 박력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은 뭐지?’
이제 열다섯이나 됐을까?
왜소한 체구와 앳돼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녀석은 거침이 없었다.
작은 몸을 감싸고 있는 터질 듯한 기파가 아니었다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가희는 검 손잡이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녀는 한순간 소년이 반로환동한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십두마병과 같은 초능도 실재하는데 반로환동이라고 없을까!
“내 이름은 연적하. 너희들이 무덤에서 파내어 똥통에 처박은 참월검객의 아들이다.”
진가희는 즉시 검을 뽑았다.
차앙.
참월검객의 아들이라면 유명교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할 것이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문답무용.
진가희가 연적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이익. 쉭. 쉭.
그녀의 검이 현란하게 움직일 때마다 시퍼런 검기가 종횡으로 뻗어 나갔다.
초능으로 얻은 공력이 그녀의 검공을 몇 단계나 높여 주고 있었다.
연적하가 검을 좌우로 휘둘러 검기를 쳐 냈다.
쾅. 쾅. 쾅.
요란한 폭음과 함께 검기가 터져 나갔다.
이윽고 진가희와 연적하의 검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차차차차차창-.
진가희는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쳤다.
신검회의 추혼구절과 초능의 조합은 끔찍하다고 할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그걸 연적하는 아슬아슬하게 받아쳤다.
반각(약 7분)쯤 지났을까?
쉬지 않고 상대를 압박하던 진가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추혼구절의 아홉 초식을 두 차례나 시전했지만 상대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승기를 잡은 것 같았다.
연적하는 막기에 급급해 반격을 하지도 못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상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추혼구절을 받아 낼 만큼 뛰어난 검사였다. 그런 그에게 반격의 기회가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설마?’
진가희는 연적하의 얼굴을 보았다.
필살의 각오라기보다 뭔가에 열중한 표정이다.
“이런 미친!”
진가희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저 어린놈은 검술 연마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감히 소수마검 진가희를 상대로 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진가희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리고 전신의 공력을 검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은 완전하지 못한 신검합일을 시전할 생각이다.
아무리 광오한 놈이라 해도 신검합일을 상대로까지 정신 나간 짓을 하지는 못하리라.
우우웅-.
검신이 파란 빛을 뿌리며 울었다.
곧이어 몸이 검에 녹아드는가 싶더니 주변의 모든 게 사라졌다.
진가희의 의식이 검 끝에 서 있는 연적하에게 닿았다.
그 찰나의 순간.
“죽어!”
파랗게 빛나는 검과 진가희가 연적하를 향해 날아갔다.
연적하는 신검합일을 받아치지 않고 즉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상대를 지나친 진가희는 전각의 기둥을 발로 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허공에서 연적하의 몸이 부드럽게 돌았다.
머리가 아래로 향한 자세에서 연적하는 구천세법의 오 식 건곤번천을 펼쳤다.
꽈르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혔다.
미증유의 검력에 휘말려 진가희의 파랗게 빛나던 검이 터져 나갔다.
동시에 연적하의 검이 진가희의 가슴을 꿰뚫었다.
검에 꿰뚫린 진가희와 연적하가 한 데 엉켜 떨어져 내렸다.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 연적하는 검을 놓고 공중제비를 돌며 옆으로 빠졌다.
철퍼덕.
진가희가 가슴에 검이 꽂힌 채로 처박혔다.
그 옆에 부드럽게 착지한 연적하가 착잡한 눈빛으로 진가희를 보았다.
어찌 보면 첫 살인이다.
심통의 손에 죽고 되살아난 괴물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으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대상이 여자.
입버릇처럼 ‘노인과 아이와 여자를 싫어한다’고 했지만, 싫어하는 것과 죽이는 것은 또 다르다.
연적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들이 말하는 피륙을 찌르는 느낌 같은 건 없었다.
필사적으로 신검합일을 부수고 보니 여자의 가슴에 칼이 박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살인을 했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 온다면 또 죽일 것이다.
우두커니 서 있던 연적하는 검을 회수하기 위해 진가희에게 다가갔다.
생기가 사라진 여자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다시 착잡해진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으드득. 으득.
여자의 몸에 시커멓게 금이 가며 팔다리가 뒤틀렸다.
연적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청운관과 남양상방의 싸움에서 심통이 죽인 대력귀가 저러다 괴물로 변한 게 떠올랐다.
갈라진 금이 쩍쩍 벌어지며 시커먼 피부가 드러났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피부라기보다는 펄펄 끓는 용암 같았다.
‘대력귀 때와 똑같다!’
연적하는 급히 물러나며 손을 뻗었다.
휘리릭.
진가희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이 연적하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었다.
뒤이어 죽은 진가희가 두 배쯤 거대해진 몸을 주춤주춤 일으켜 세웠다.
“크르르르.”
진가희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울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가희의 검은 눈이 연적하에게 고정됐다.
“크르륵. 크륵.”
움찔거리는 입과 분명한 음절, 믿어지지 않지만 말이라도 하는 것 같다.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진가희의 몸이 ‘퍽’ 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