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103화 (103/1,339)

103회. 한 세대, 어쩌면 그 이상

개봉.

해원상방.

해원상방에는 세 개의 호위대가 있다. 함월대, 원명대, 천경대가 그것이다. 본래 상행에 동원됐어야 할 세 개의 호위대는 방주의 지시로 총단에 대기 중이다.

점심 무렵, 대행수 양승원이 자신의 집무실로 호위대 대주들을 불러들였다.

이 남 일 녀가 살짝 긴장한 눈으로 양승원의 입에 주목했다.

양승원이 들여다보던 장부를 내려 놓고 대주들과 눈을 맞추었다.

“여러분, 금선상방에서 진안야시를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오. 최근 와룡장 출신의 풍가와 탁가를 끌어들였소. 용희루의 소문은 들었을 테니, 그들이 누군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오.”

남자 둘이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참석자 중에 유일한 여자, 연설주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풍가’와 ‘탁가’라는데 그런 성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자로 들어온 낭인들의 이름을 좀 알아 둘걸…….’

와룡장에 있을 때는 밖으로만 돌아다녔지 그들과 어울릴 생각은 미처 못 했다. 설사 그럴 마음이 있었다 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제자들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으니까.

‘그래도 얼굴을 보면 알아보려나…….’

와룡장에서 땀 흘린 제자라면 오가는 길에 봤을 것도 같다.

그때 함월대 대주 갈홍이 물었다.

“연 대주, 그 정도의 고수라면 와룡장 내부에서 어느 정도 알려졌을 것 같은데. 아니오?”

“솔직히 저는 와룡장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아서……. 하지만 얼굴을 보면 알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내가 그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요?”

“아무리 낭인이라 해도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지 않겠소? 그 둘이 연 대주에게 한발 양보해 줄 수도 있을 거라고 보는데.”

갈홍이 동의를 구하듯 원명대 대주 상암을 힐끔 보았다.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강호 도의라는 게 있으니까요.”

상암은 갈홍의 편을 들었다.

사실 동문끼리 싸우지 않는 건 강호의 불문율이기도 했다.

갈홍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연설주는 부담스러웠지만 혼자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뭐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어떻게든 결과를 내야 하는 양승원이 한발 더 나아갔다.

“연 대주, 차라리 은밀하게 그 두 사람을 만나 보는 건 어떻겠소? 양보를 받아 내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의사만이라도 확인했으면 하는데.”

“네, 한번 자리를 만들어 볼게요.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낭인 출신들은 일반 제자들과 생각하는 게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연설주는 마지못해 풍가와 탁가를 만나 보기로 했다.

와룡장 출신들이 상방에서 주목받는 게 뿌듯하면서도, 내심 걱정도 된다. 일대제자인 자신과 이대, 삼대 제자일 게 분명한 그들과의 인연이.

‘부디 좋은 인연이면 좋겠는데…….’

같은 사문 출신들이 피 터지게 싸우면 그것도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

정주.

백가장.

백가장 장주 무천검 백승호가 시집 갔다 돌아온 딸 백미주를 쏘아보았다. 백미주는 무시무시한 부친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냈다.

“그러니까 정주에 와룡장을 다시 세울 터인데, 자금을 지원해 달라?”

“네.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와룡장의 검술은 진짜예요. 남궁세가에서도 탐을 냈을 만큼요. 조금만 지원해 주시면 금방 자리 잡을 수 있어요. 백가장에도 좋은 일일 거예요. 외손자가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테니까요.”

“…….”

뭔가를 한참 생각하던 백승호가 입을 열었다.

“월하선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 여자가 분탕질을 치면 또다시 파탄이 나고 말 텐데.”

“그 마녀에게는 따로 선물을 보내 보려고요. 남편의 뼈를 파헤치고 와룡장 위에 교당을 세웠으면 복수도 끝나지 않았겠어요?”

“그 말은 설마 유명교에 들어가겠다는 소리냐?”

“아니요. 그냥 피차 은원을 정리하는 선에서 매듭지어 보려고요. 우리가 그이에게 한 짓을 따져 묻지 않으면 문제 삼지 않을 거라고 봐요.”

“무백이와 승백이가 네 생각에 동의할 것 같으냐?”

“상관없어요. 어차피 와룡장이 유명교를 공격할 일은 없으니까요. 칠파이문도 하지 못하는 일인데 와룡장이 무슨 수로 그들과 싸우겠어요?”

“흠…….”

백승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딴에는 맞는 말이다.

유명교가 다시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와룡장이 유명교를 적대시할 일은 없다.

“먼저 월하선자와의 은원부터 청산해라. 그렇다고 유명교와 손잡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백가장이나 양가장, 와룡장은 모두 칠파이문의 혈맹들이니까.”

“네.”

“월하선자의 일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논의해 보도록 하자.”

“그건 저에게 맡겨 주세요.”

백미주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최근 유명교는 칠파이문과의 분쟁을 적극적으로 피하는 느낌이다. 칠파이문의 제자들이 도발해도 확대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한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어떤 이는 ‘이미 든든한 지위를 얻었기에 작은 싸움을 피하는 거다’라 했고, 또 다른 이는 ‘황실과 밀착했으니 잡음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느 게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유명교가 조금 부드러워진 건 사실이다.

물론 그런 막연한 추측만으로 낙관하는 건 아니다.

‘팔주령만 가져가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최근 만나고 있는 중원상방의 대행수 임해수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도굴꾼들 사이에서 유명교가 팔주령을 모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그걸 유명교에 가지고 가면 최소 만 냥, 돈이 아니라면 소원을 들어준단다.

그는 우연히 팔주령을 얻게 된 뒤 제법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딱히 유명교에 받아 낼 만한 게 없어 가지고만 있었다나.

나중에야 ‘칠파이문에서 알게 되면 곤란해질 것 같아 참았다’고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훗날 은자 만 냥의 값을 치르기로 하고 받아 두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은밀하게 전할 생각이다.

비밀이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으니까.

유명교가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라면, 은원과 맞바꿀 수 있으리라.

제 손으로 무림세가를 일궈 보고 싶은 백미주에게 은원 따위는 사치였다. 그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매달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

정주.

양가장.

객청에서 소가주 옥기린 양이선과 와룡검객 연무백이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양이선이나 연무백 모두 표정이 밝지 않았다.

“아우님, 요즘 정주도 낙양만큼이나 난리라네. 상방들이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변했어. 균형을 잡아 주던 칠파이문이 침묵하니 춘추전국시대를 보는 것 같아.”

“양가장에도 청탁이 들어옵니까?”

문득 연무백은 백세상방의 부탁으로 상방 간의 싸움에 뛰어든 일이 떠올랐다. 혹시나 양가장도 그런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일까?

“제자들이 속한 상방에서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고 있다네. 하지만 아직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지. 역사가 긴 만큼 제자들과 관계된 상방이 많아서.”

“아!”

“문제는 제자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상점들이야. 그들은 지금까지 양가장의 보호를 받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지냈다네. 그런데 최근 몇몇 사파에서 그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는군.”

“보호자요?”

“보호해 줄 테니까 상납금을 내라는 거지. 이제 양가장과 다투어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전에는 우리를 건드리면 자연히 칠파이문이 나섰는데, 이제 그들이 잠잠하니까.”

“하아! 대체 칠파이문은 언제쯤에나 이전의 모습을 보여 줄까요? 지난해 은하장의 혈겁 이후로 완전히 문을 닫아 걸은 것 같던데…….”

“그들은 지금 유명교 교당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걸세. 적이 너무 강하니 군소 방파들의 분쟁에 관여할 여유가 없는 거지.”

“하지만 유명교는 은밀히 이권 다툼에 개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

연무백의 지적에 양이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유명교가 뒤로 꾸준히 활동하는 데 비해 칠파이문은 움직임이 없었다.

“천하가 혼돈에 빠졌습니다. 이럴 때 칠파이문이 분연히 일어나 줘야 하는데,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연무백은 유명교가 와룡장을 집어 삼켰음에도 칠파이문이 침묵하는 게 화가 났다. 그들의 무림첩에 응해서 큰 희생을 치른 혈맹에 이런 대접이라니.

“아우님 말이 맞네. 이럴 때일수록 양가장이 제자들에게 힘이 되어 줘야 할 텐데……. 그래서 말인데. 아우님이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라도?”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사파에서 양가장 출신 제자들에게 보호비를 요구하고 있다네. 문제는 그들이 흩어져 있어 적시에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걸세.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터지면 수습할 수가 없다고나 할까.”

“아!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쇼. 부족하나마 저와 승백이가 한 손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리고 부족하다니! 천하의 와룡검객이 무슨 그런 겸양의 말을. 양가장의 제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걸세. 은혜는 잊지 않겠네.”

“은혜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입니까.”

“하하!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우리 이화가 남편 하나는 잘 만났다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오갈 곳 없는 저희를 받아 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연무백은 양이선의 부탁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사실 식객이라도 그 정도 일은 도울 것이다. 하물며 양가장은 처가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참! 요즘 사부인께서 와룡장 재건을 위해 애쓰고 계신다고 하던데……. 알고 있나?”

순간 연무백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 저에게도 몇 번 찾아오셨습니다. 월하선자와의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정리?”

양이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친의 유골을 뒷간에 처박았으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은원을 정리한다고?

“현실적으로 복수가 불가능하니 잊자고 하십니다.”

“헐! 아우님 생각은 어떤가?”

강호에서는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상대가 강하다고 고작 일 년 만에 잊자니 기가 막혔다.

“하아! 저의 생각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당신 뜻대로 하시는 분이시라.”

“하지만 장차 와룡장이 재건된다면, 그 주인은 아우님이 아닌가? 아우님이 결정할 문제 같은데.”

“…….”

연무백은 한숨만 푹푹 내쉴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반반이었다.

선친의 명예를 생각하면 복수가 답이지만, 현실을 생각해 적당히 타협하고도 싶다. 비난받을 고민이라는 걸 알기에 그런 속내를 밝히지 못할 뿐이다.

한참 만에 연무백이 물었다.

“형님, 당금 무림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지금은 유명교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지.”

“유명교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양이선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위로는 황실부터 아래로는 잡상인까지 유명교와 관계를 맺으려고 안달 난 세상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한 세대?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그러니 저도 어머니의 선택을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저는 정말 칠파이문이 밉습니다. 그들에게서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다는 게, 믿고 의지했던 만큼 싫어졌습니다.”

순간 양이선은 ‘자네가 그 희망이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나?’라고 말려다가 참았다.

자신도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다른 이들의 희망이 될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

개봉.

다정(茶精) 찻집.

정오 무렵.

해원상방 천경대 대주 연설주는 미리 자리를 잡고 손님들을 기다렸다.

지금 그녀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금선상방의 ‘풍가’와 ‘탁가’였다.

연설주는 따뜻한 찻잔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적당한 긴장과 설렘으로 정신이 점점 고양되는 게 느껴진다.

그들은 누구일까?

자신을 사문의 존장으로 대우해 줄까?

그녀가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을 때,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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