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회. 필요한 놈 있으면 가져가라고 해
음풍묘군은 떨떠름한 얼굴로 연적하의 뒤를 따랐다.
돈만 건네주고 빠질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천하의 십이마군이 얼굴도 모르는 어린 계집애의 계례에 끌려가다니…….’
성질 같아서는 저 등짝을 음풍백골조로 찍어 버리고 싶다.
순간 오른손 손바닥이 욱신거리며, 악몽 같은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피 묻은 손가락이 꾸물거리며 접히는 동작에 맞춰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연적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우헤헤.
‘시펄. 똥인데 무서워서 참는다.’
쉬지 않고 주먹을 쥐락 펴락 하던 음풍묘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석장촌.
이우석의 집 마당에 웅크리고 있던 금검문 총관 서출량이 답답한 듯 기지개를 켰다.
반 시진(1시간) 넘도록 좁아터진 곳에서 멍하니 있으려니 좀이 쑤신 것이다.
“흐아암! 하는 일도 없이 피곤하네요. 그나저나 우리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금검문 문주 통배검 유경진이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우리가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은가? 그렇다면 창인문을 보게.”
“쩝, 솔직히 저는 문주님이나 창인 문주가 왜 칠리하촌으로 안 가고 여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칠리하촌의 정의맹은 패잔병들 모임이네. 정주 출신의 문파들도 자파로 돌아가고 있는 추세지. 하나둘씩 빠져나가서 이제는 사백 명도 안 남았다고 하더군.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럴수록 힘을 보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쯧! 순진하기는. 정의맹은 더 이상 유명교를 상대로 싸울 힘이 없네. 조금 더 지나면 정주뿐 아니라 하남성 출신의 방파들까지 자파로 돌아가겠다고 할 걸세. 그럼 몇이나 남을 것 같은가?”
“이대로 흐지부지 끝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유명교가 정의맹이 곱게 돌아가도록 둘 것 같은가? 모르긴 해도 정의맹은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네. 오죽하면 제갈 총사가 사파 고수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까.”
“그게 사실일까요? 저는 헛소문 같습니다. 제갈 총사가 사파 고수를 만나고 다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파 무관들이라면 모를까.”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이미 바닥난 쌀 항아리를 바가지로 박박 긁어 봐야 몇 알이나 주워 담을 수 있겠는가? 그보다는 풍성한 남의 집 곳간을 노리는 게 낫지.”
“설마 제갈 총사가 사파에게 협조를 요청하러 다닌다는 겁니까?”
놀란 서출량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사파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안달을 내던 정의맹 수뇌부가 정말 그럴까?
“나라고 가까이 지내는 사파 인사가 없으려고. 두고 보게. 정의맹이라는 난파선이 누구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는지. 그러고 보면 창인문주도 참 눈치가 빠른 사람이야.”
“허어! 정말 정의맹이 망했나 보군요.”
“요즘같이 어수선한 때에 연적하에게 잘 보여서 나쁠 일은 없네. 정의맹이 이대로 주저앉으면 삭풍회가 정파를 가만히 내버려 두겠는가?”
“그렇기는 합니다.”
서출량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주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칠리하촌에 대한 걱정은 씻은 듯 사라졌다.
때마침 대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한순간 삭풍회가 침묵에 잠겼다.
야수처럼 눈을 희번득거리던 자들이 얌전한 양 떼로 변해 버렸다.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유근식이 유경진에게 속삭였다.
“아버지, 지금 들어온 청년이 연적하입니다. 삭풍회의 인사가 끝나면 그에게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알겠다.”
유경진은 앳된 얼굴의 청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들에게 연적하가 어려 보인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했다.
한상을 필두로 삭풍회 고수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었다.
무려 오십여 명의 고수들이 그러자 마당은 한순간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연적하와 구면인 한상은 자기가 마치 그의 시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정사파 무림인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방에 있던 고관들까지 밖으로 나와 연적하에게 나아갔다.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장소미가 중얼거렸다.
“역시 조카님 손님들이었네요.”
이시화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엄마, 저도 연 오라버니 같은 낭인이 될 거예요! 그래도 되죠?”
“그래, 꼭 그렇게 되거라.”
장소미가 멍한 얼굴로 어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낭인으로 저렇게 성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말리고 싶지 않았다.
계례는 성황리에 끝났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관인들과 정사파 무림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손님들 배웅을 마친 이우석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세 배쯤 옆으로 넓어진 마당을 보니 괜히 실실 웃음이 났다.
꿈이 아니다.
문득 ‘촌장이 오늘의 일을 봤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별일이다.
조상님들의 제사를 지낸 적도 없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현령은 ‘돌아가는 길에 촌장을 잡아갈 테니 마음 놓으시라’ 했다.
안찰사 부사 호월비는 ‘조만간에 다시 찾아뵙겠다’며 손을 꼭 잡았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한 게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좁은 방 안에 네 사람이 둥그렇게 마주 보며 앉았다.
이우석은 조카를 볼 낯이 없어 괜히 손바닥으로 방바닥의 먼지만 쓸어 냈다.
이유화가 공손히 말했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무슨 그런 소리를. 남도 아닌데.”
이번에는 장소미가 한마디 했다.
“아니에요. 조카님이 아니었으면 정말 힘든 하루였을 거예요. 조카님 덕분에 이렇게 사람대접도 받아 보네요. 우리 시화 꿈은 조카님처럼 낭인이 되는 거래요. 그렇지 시화야?”
“네! 저는 오라버니 같은 낭인이 될 거예요.”
갑자기 인생의 목표가 생긴 이시화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자 이우석이 만류했다.
“아서라. 낭인은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직업인데. 그것도 계집애가. 적하야, 네가 안 된다고 한마디 해 줘라.”
그러나 연적하의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여자라서 안 될 건 없어요. 제가 아는 여고수들도 많거든요.”
이시화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부친을 보았다.
하지만 계속된 연적하의 말에 이시화는 금방 풀이 죽고 말았다.
“시화야. 낭인으로 살려면 무관에 다니면서 무공을 연마해야 해. 하루에 한 시진 이상은 칼 쓰는 연습도 해야 하고.”
“무관이 없으면요?”
“그럼 다른 일 찾아야지. 무공도 배우지 않고 어떻게 낭인이 되냐? 그랬다가는 바로 남들에게 맞아 죽어.”
“오라버니가 가르쳐 주면 안 돼요?”
“난 개봉으로 갈 건데? 따라오면 생각해 볼게.”
“개봉에서 뭐 하시는데요?”
“객점에서 일해.”
“진짜요? 말도 안 돼. 낭인이라면서요?”
“너 낭인들 꿈이 뭔지 알아? 외숙처럼 정착해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사는 거야. 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낭인으로 돈 버는 거라고.”
“저, 정말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냐? 나랑 같이 다니는 심 노인이라고 있는데, 그 노인네 꿈은 주루를 차리는 거야. 낭인이 꿈인 사람은 없어. 개봉의 화상촌에 있으니까 언제고 외숙과 함께 놀러 와. 여기보다 더 시골이라 빈 방 많아.”
이시화는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난 낭인 하지 말아야겠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이시화는 오락가락했다.
이우석은 딸이 또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서둘러 대화를 매듭지었다.
“그래, 시화야. 낭인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적하도 낭인이 꿈인 사람은 없다잖아.”
네 사람은 모처럼 여유 있게 다과를 즐겼다.
한참 사촌 동생들과 노닥거리던 연적하가 이유화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뭐예요?”
“내가 아는 분이 선물이라고 주더라.”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한 이유화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머, 천 냥이나 되네. 이거 정말 제가 받아도 되는 거예요?”
“어. 줘도 될 만하니까 주는 거야.”
“그럼 감사히 잘 쓸게요. 그런데 이거 주신 분이 누구예요?”
“넌 몰라도 돼. 어차피 나에게 뭘 부탁하려고 주는 거니까.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람은 아마도 가족밖에 없을걸? 난 잘 모르겠지만.”
물론 어디서 주워 들은 소리다.
하지만 그는 가족에게 뭔가를 받아 본 적이 없어 슬쩍 사족을 달았다.
***
정주.
정주제일루.
해거름 무렵, 삭풍회 고수들이 정주제일루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주제일루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십이마군이 정주에 진출한 정의맹을 의식해 삭풍회를 움직인 것이다.
정의맹이 파천마군을 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한편으로는 파천마군의 행보를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무림인들의 이목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파천마군에게 쏠려 있는 까닭이다.
삭풍회의 회주인 한상은 마치 석상처럼 정주제일루 정문에 버티고 섰다.
그렇게 한 식경(약 30분)쯤 지났을까?
멀리서 다가오는 청년을 본 한상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오셨습니까! 총순찰님!”
주변에 있던 삭풍회 고수들이 한상의 선창을 따라 하며 일제히 허리를 접었다.
“오셨습니까! 총순찰님!”
거리를 지나가던 행인들이 놀란 눈으로 한상과 청년을 번갈아 보았다.
연적하는 민망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 진짜. 왜들 그래요. 산채에서도 안 그러는데.”
“하하. 도시에서는 이렇게 뭔가 보여 줘야 정파 놈들 귀에 팍팍 들어갑니다.”
한상의 설명에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낼 일 있어요?”
“총채주님과 총순찰님의 만남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천하가 알고 벌벌 떨어야지요.”
“일은 무슨. 술이나 마시려고 만나는 건데.”
연적하가 안으로 들어갔지만 한상은 감히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칠 층에 오른 연적하는 어렵지 않게 파천마군을 발견했다.
중앙에 떡하니 혼자 앉아 있어 찾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구석에 모여 있던 십이마군들이 일어나 묵례를 하고는 다시 앉았다.
칠 층 입구에 서 있던 주인 장보옥이 머리를 조아렸다.
“총순찰님, 오랜만에 뵙네요. 자주 좀 오시지 왜 그렇게 뜸하셨어요?”
장보옥은 마치 사위라도 맞이하듯 살갑게 대했다.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데를 자주 와요?”
“어머, 제가 설마 총순찰님에게 돈을 받을까 봐 그러세요? 그냥 내 집이라 생각하고 오세요.”
연적하는 그녀의 입에 발린 소리를 흘려들으며 파천마군의 앞으로 걸어갔다.
파천마군이 웃으며 맞은편 자리의 빈 잔에 소흥주를 따랐다.
“어서 오거라. 소흥주를 즐겨 마신다지? 오늘 나와 함께 제대로 취해 보자.”
연적하가 잔이 놓인 자리에 철푸덕 앉으며 한마디 했다.
“저는 취할 때까지는 안 마셔요.”
“정말 취한 적이 없느냐?”
“예. 누가 그러더라고요. 강호에서 취하면 바로 목이 잘린다고.”
“그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소리니라. 대인배들은 목을 내놓고 마시는 거야. 아무나 필요한 놈 있으면 가져가라고 해. 그게 남자야. 앞만 보고 가야지, 대장부가 좀스럽게 앞뒤 좌우를 다 살피면 되나.”
“앞뒤 좌우 다 살펴보고 저에게 십두마병을 떠넘긴 거 아니었어요? 지난번에는 체면 따지고 뭐 따지고 하시더니.”
“내가 그랬다고? 다른 사람하고 착각한 거겠지. 자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일단 좀 마시자. 뭐 하고 있느냐? 건배 안 하고?”
파천마군이 서둘러 술잔을 들어 올렸다.
“아, 예. 오늘은 또 뭘 부탁하시려고 그러세요? 술 마실 때 일 얘기 하는 거 아니라고 하고서, 잔뜩 떠넘기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내가 근 일 년을 개고생했는데.”
연적하는 술잔을 잡고도 작정한 듯 쉬지 않고 구시렁거렸다.
파천마군을 향한 공치사를 곁들인 엄살이었다.
나 쉬운 사람 아니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