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232화 (232/1,339)

232회. 궂은일을 담당한 사람이었구려

하남성.

정주 외곽의 허름한 사당.

점심 무렵.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정의맹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과 십이마군의 첫째인 귀영자군이다.

“녹림과 사파를 위해 새로운 연합의 이름을 ‘천지맹’이라 지어 보았습니다. 그 이름이라면 정사파가 함께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지요?”

제갈승운은 행여나 귀영자군이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할까 봐 전전 긍긍했다.

입춘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아직 사파로부터 확실한 답을 얻어 내지 못해서다.

“어떤 이름이라도 상관없소. 말했다시피 정의맹이라는 이름만 아니면 되니까.”

귀영자군은 마치 자신이 결정권자인 것처럼 행세했다.

“허면 언제쯤 합류를 하시겠습니까? 칠리하촌을 빠져나가는 인원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어서요.”

“녹림은 입춘에 맞춰 칠리하촌으로 갈 것이오.”

“아! 입춘입니까?”

제갈승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건만 드디어 움직일 모양이다.

“허면 입춘에 천지맹의 발대식을 하는 것으로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그날 파천마군께서도 참석하십니까?”

“총채주께서는 가지 않으실 거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를 통하면 되오.”

연적하도 파천마군만큼이나 앞에 나서는 걸 귀찮아했기에 귀영자군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그걸 모르는 제갈승운은 귀영자군을 파천마군의 대리인으로 생각했다.

“허면 녹림과의 일은 앞으로도 계속 귀영자군 님을 통하면 되겠군요?”

“그렇소.”

“이거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승운이 귀영자군에게 읍을 해 보였다.

다소 들뜬 제갈승운과 달리 귀영자군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

입춘을 앞두고 강호가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소문으로 무성하던 정사파 연합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녹림의 거마들이 하나둘씩 칠리하촌으로 모여들었다.

하남삼악으로 불리는 적룡채, 향산산채, 학산산채와 대별산채, 오봉산채, 흑사채, 적풍채, 영산채, 수룡채, 구룡채, 해룡채, 적사채, 삼도산채, 광풍채 등 이름만 들어도 살 떨리는 산채와 수채들이다.

덕분에 칠리하촌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동안 정파의 핵심들이 모여 살기 좋은 마을이었지만 그것도 옛말.

무려 삼백육십여 명의 도적들이 모여들자 마을 분위기는 바로 흉흉해졌다.

대의를 생각하면 잘된 일이지만 칠리하촌 주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열린 셈이다.

정사파 고수들이 뒤섞이게 되자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평소에 죽고 죽이는 관계였던지라 눈만 마주쳐도 시비가 일어났다.

부랴부랴 제갈승운이 마을 동편을 비워 충돌을 최소화시키려 했다.

자연히 정파의 고수들은 서쪽, 녹림과 사파 고수들은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동서로 나누었다고는 하나 같은 지역인지라 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정파의 고수들은 하루라도 빨리 천지맹을 발족해 사파를 통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귀영자군은 입춘이 되어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서른여섯 개 산채와 여섯 명의 마군이 다 모였음에도 계속 미루었다.

정의맹 정주 지부.

정오 무렵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가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정파 고수들은 이제 삼백 명도 남지 않았다.

현재 칠리하촌의 정파는 녹림에 완전히 기가 눌린 상태였다.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아무리 칠파이문과 오대세가에서 싸움에 휘말리지 말라고 당부해도 소용없었다.

눈만 마주쳐도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데 무슨 수로 싸움을 피한단 말인가!

회의의 주제는 항상 같았다.

종남파 장문인 무종상인이 애써 화를 누르며 말했다.

“대체 언제 발대식을 한다는 것이오? 서른여섯 개의 산채와 여섯 명의 마군이면 약속한 사람은 다 온 것 아니오? 혹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소.”

무당파 장문인 영결상인도 거들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조직을 만들어도 통제에 따를지 의문인데, 아예 천지맹을 만들지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총사, 저들이 발대식을 미루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제갈승운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답답하기는 자신도 마찬가지다.

더 올 산채도 없는 것 같은데 귀영자군은 발대식을 미루고 있었다.

“마군들은 발대식을 입춘에 하기로 했으니 그날 하겠다고만 합니다.”

“입춘을 기준으로 삼기는 했지만 그 전에라도 사람이 다 모였으면 시작해야 하지 않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고가 터지니 원. 발대식은 고사하고 이러다가 정사대전이 나지는 않을까 두렵소.”

“파천마군이 아무리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 해도 그런 짓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명교는 녹림에도 꽤나 큰 위협이니까요.”

이번에는 소림사 무법선사가 물었다.

“그나저나 천지맹에 저들에게도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하지 않소? 생각해 둔 것이 있소이까?”

“여섯 명의 마군들에게 호법의 직위를 내릴 생각입니다.”

제갈승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호법은 지위와 달리 딱히 권한을 행사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녹림 총순찰 연적하도 천지맹의 발대식에 참석하는 것이오?”

“그 부분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귀영자군이나 다른 다섯 마군들이 언급을 피해서요. 어쩌면 십이마군이 그를 견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이마군의 입장에서 연적하는 굴러 들어온 돌이니까요.”

“녹림에서 연적하의 실제 위치는 어떻소?”

“애매합니다. 파천마군의 후계자가 십이마군 아닙니까? 연적하의 무위가 뛰어나다 해도 도적들이 그를 따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허면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요?”

“그에게는 실권이 없습니다. 이번 천지맹의 추진도 귀영자군과 했으니까요.”

“그럼 귀영자군을 파천마군의 대리인으로 봐도 되겠구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십이마군 내에서 다른 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럴 것입니다.”

무극문의 문주 풍뢰도 장강호가 알은체를 했다.

“고작 스물한 살의 총순찰에게 무슨 힘이 있겠소? 오봉산채나 그를 따를까?”

무법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연적하는 궂은일을 담당한 사람이었구려.”

육파이문의 장문인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가 깊은 칠파이문의 경우 대체로 제자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궂은일을 맡기는 제자와 문파를 맡기는 제자다.

얼핏 두 개가 비슷한 것 같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무위만 뛰어난 제자는 쓰임이 많지만, 그에게 문파의 미래를 맡기지는 않는다.

그들은 연적하와 귀영자군을 그렇게 보았다.

연적하가 쓰임이 많지만, 후계자는 귀영자군이라고 말이다.

어느 정도 녹림의 일이 정리되자 화산파 장문인 무극상인이 물었다.

“총사, 이번에 새로이 만든 제마대의 모집은 잘되고 있습니까?”

맹주의 물음에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갈승운에게로 향했다.

제마대는 정파가 숨겨 둔 필살의 한 수다.

마물을 제압하기 위해 술법사들로만 구성한 조직이 제마대였다.

“지금까지 칠파에서 술사 삼십여 명을 모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법보만도 다섯 개나 됩니다. 다음 전투에서는 맥없이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술사들의 무위는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합니까?”

“아쉽게도 술법에만 정진해서 호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일단 마물이 등장하면 위험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술사라고 더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흐음!”

무극상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제갈승운의 말은 조금 무책임했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달리 마물을 상대할 방법이 없는지라 침묵했다.

술사들이 위험한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다.

잠시 뭔가 생각하던 제갈승운이 말했다.

“참, 그리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려야겠군요. 숙주와 부양의 안찰사가 찾아왔었습니다.”

‘숙주’와 ‘부양’이란 말에 군웅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숙주의 천문산과 부양의 서비하에 마물을 남겨 두고 온 일이 생각나서다.

아니나 다를까?

“천문산과 서비하 일대에 마물이 출현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마물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아 근처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빨리 처리하라고 합니다.”

무극상인과 무상도제는 시선을 회피했다.

그들이 어쩌지 못한 마물인지라 부끄러웠던 것이다.

의천검존 이의정이 한마디 했다.

“마물의 문제가 크니 다음부터는 술사들도 회의에 참석하게 합시다. 뭘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게 아니오.”

제갈승운은 선선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다음 회의 때부터는 술사들의 대표도 부르겠습니다.”

“대표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소?”

“곤륜파의 곤륜삼선이 무공과 술법 양쪽에 능하니 그들을 부를까 합니다.”

이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삼선은 마물을 처리한 경험이 있으니 괜찮겠다 싶어서다.

“숙주와 부양의 마물은 천지맹이 발족하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지맹과 제마대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군웅들은 제갈승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곳의 마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이번 싸움의 성패를 가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회의가 끝날 즈음이다.

모용세가의 가주 경천일검 모용황이 불쑥 말했다.

“녹림 도적들과 정파의 고수들이 매일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할 거요?”

“귀영자군과 상의하여 임시방편으로 정사연합의 순찰대를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지맹이 발족하면 자연히 정리될 테니 며칠만 더 참아 주십시오.”

사실 그 문제는 제갈승운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원수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싸움질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

입춘 하루 전.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을 받으며 칠리하촌으로 노인과 청년이 느긋하게 들어섰다.

구천노도 심통과 연적하다.

마을 초입을 둘러보던 심통이 한마디 했다.

“허! 생각보다 마을이 크네요? 이 정도면 거의 현급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정의맹 지부가 있어서 그럴 거야. 군소 방파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테니까.”

“벌써부터 마을이 북적거리는 게 빈방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심통이 근심 어린 눈으로 거리를 보았다.

무슨 장날처럼 도검을 찬 무인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조금 더 걸어가는데 멀리서 날붙이 부닥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심통이 고개를 빼고 내다보니 십여 명이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죄다 무인들이다.

“공자님, 싸움이 났는데요?”

“저런! 하필 반점 앞이네? 배가 고픈데.”

“흐흐. 제가 얼른 가서 창가 쪽에 빈자리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싸움을 구경하면서 먹는 게 또 별미거든요.”

“그래? 빨리 가 봐.”

연적하가 허락하자 심통은 바람처럼 반점으로 달려갔다.

열 명이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심통은 마치 유령처럼 유유히 지나쳤다.

반점 안으로 들어간 심통은 재빨리 창가 쪽 자리를 살폈다.

절반에 가까운 자리가 비어 있었다.

탁자 위에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걸 보니 식사를 하다가 싸운 모양이다.

심통이 그중 좋은 자리에 앉자마자 점소이가 달려왔다.

“저어, 손님. 이 자리는 좀 곤란한데요. 요리를 시킨 손님들이 저기 있어서…….”

점소이, 소청의 손가락이 창밖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자리에 주인이 어딨느냐? 앉는 사람이 임자다. 싹 치우고 주문이나 새로 받거라.”

소청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심통과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때마침 연적하도 반점으로 들어와 심통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도 점소이가 머뭇거리자 심통은 눈알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주문이나 받으라니까 왜 멀뚱히 서 있어? 저놈들만 손님이고, 나와 공자님은 거지로 보이느냐? 어깨 위에 달린 덩어리를 잘라 주랴?”

“어이쿠! 아닙니다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그러자 심통이 탁자 위를 가리켰다.

“이것들과 같은 것으로 새로 내오거라.”

“예, 예.”

굽실거리던 소청은 음식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하루에서 몇 번씩 반복되는 싸움인지라 놀랍지도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