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407화 (407/1,339)

407회. 삼년지약을 어기기로 한 건가요?

처음 ‘천외검선’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린 사람은 황가(皇家)의 일원이었다.

종친 모임에서 ‘무림인들의 분쟁으로 나라가 뒤숭숭하다’는 말이 나왔을 때란다.

누군가 무심코 한마디 했다.

황상에게 숨겨 둔 특별한 검이 있으니 너무 걱정들 하지 마시라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연회장에서 나온 말임에야 오죽할까.

종친의 발언은 호위대 입을 통해 알음알음 무관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그러던 중에 묘한 소문이 퍼졌다.

-건국사에서 유명교 현장 법사가 암살당할 뻔했다!

뒤이어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유명교 관계자들이 한날한시에 사라졌다.

조정(朝廷)의 문무백관들은 드러내 말하지 않았지만 꽤나 통쾌하게 여겼다.

특히나 무관들의 경우 더 그랬다.

평소 유명교 고수들이 문관보다 무관의 경계심을 더 자극한 까닭이다.

‘천외검선’이라는 신비스러운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이때다.

무관들은 그 고수가 황궁에서 유명교 고수들을 청소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를 ‘황상의 숨겨진 검’ 혹은 ‘천외검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황궁에서 시작된 이 신비한 이야기를 정천호 황부승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그저 황권의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겼다.

황상에게 강한 힘이 있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성 설화(說話)쯤으로.

그랬는데 도지휘사가 달려와 연남천이 황상의 숨겨진 검이란다.

저 기괴한 몰골의 청년을 말이다.

이건 무슨 지독한 농담인지 모르겠다.

도지휘사 신명휘가 반신반의하고 있는 황부승에게 동유수를 소개했다.

“인사 올리게. 금의위 남진무사 동유수 대인일세.”

황부승의 눈이 커졌다.

금의위 남진무사는 종이품.

정오품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맞대면하기 어려운 고관이었다.

아니, 금의위면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동 대인, 소관 정천호 황부승입니다.”

“동유수네. 연 공자의 신분은 절대 비밀이니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주의하게. 자네가 이번 일에 연루되지만 않았어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걸세.”

동유수의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그것은 권유가 아니라 강요였고, 그런 그의 뜻은 황부승에게 제대로 전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황부승이 결연한 어조로 답했다.

금의위에게 정오품인 정천호를 처리하는 건 식후 입가심거리도 안 되니 바짝 긴장한 것이다.

그때 후방으로 물러나 있던 양호주 현령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는 분위기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연신 눈치만 살폈다.

“소관은 죽산현 현령…….”

양호주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동유수가 호통을 쳤다.

“너 이놈! 감히 사사로운 일에 천호소의 군사를 동원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양호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금의위의 정확한 직급은 몰랐지만 정천호 황부승이 먼저 인사 올리는 건 봤다.

꼭 먹어 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건 아니다.

양호주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나으리,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연남천이라는 자가 먼저…….”

“미친놈.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라. 설령 네놈의 아들이 연 공자에게 맞아 죽었어도 너는 천호소를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천호소를 움직인 것은 소관이 아니라…….”

“그래, 안찰사 부사 한경대. 네놈에게 뇌물을 받고 병부에 상신(上申)한 죄를 자백했다. 네놈에게는 뇌물 상납죄가 추가될 것이다.”

“요, 용서해 주십쇼!”

양호주가 허리를 굽히며 빌었지만 동유수는 도리어 인상을 찌푸렸다.

“대상이 잘못되었다. 용서는 내가 아니라 연 공자에게 구해라. 네놈이 나에게 한 잘못은 없으니까.”

양호주가 급히 연적하를 향해 신형을 돌렸다.

아무래도 똥을 밟은 모양이다.

얼마나 대단한 뒷배를 가졌기에 금의위까지 움직이게 만든단 말인가.

그는 새로운 실세에게 허리를 접었다.

“연 공자님! 미천한 자가 자식의 일에 눈이 어두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봐요. 군사까지 동원했어야 하는 내 죄를 좀 압시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양호주는 더 이상 ‘자식의 몸을 상하게 했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요.”

연적하의 거듭된 질문에 동유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연 공자의 물음에 속히 답하지 못하겠느냐!”

“공자께서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제가 분을 이기지 못해 한 부사를 이용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연적하가 냉소를 쳤다.

“흥! 왜? 아까는 국법을 어긴 죄인이라면서? 무림 문파들의 방종이 도에 지나쳐 천호소 장졸들까지 지원 나왔다며? 말 한마디에 무당파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무당파는 찍소리 말고 있으라고 했잖아!”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내가 평범한 무당파 제자였으면 국법을 어긴 죄인으로 끌려갔겠지?”

“…….”

양호주는 고개를 떨구었다.

연적하가 동유수와 신명휘, 황부승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일이 왜 이렇게 커졌는지 모르겠죠? 양 현령 아들이 오룡궁에서 내 사저를 욕하고, 협박했다가 나에게 몇 대 맞았어요. 그 일로 양 현령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거고요. 양 현령이 황제라도 되나요? 도대체 이게 나랍니까!”

녹림 출신인 그가 할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설에 도취되어 그걸 알지 못했다.

상대의 과거를 모르는 도지휘사 신명휘와 정천호 황부승이 얼굴을 붉혔다.

비록 병부의 명을 받았다지만 군권의 책임자인 까닭이다.

속으로 웃던 동유수가 슬며시 나섰다.

“연 공자, 이번 일은 확실하게 법대로 처리하겠으니 화 푸시오. 뭣들 하느냐! 죄인을 포박하지 않고!”

금의위 위사들이 바람처럼 달려와 양호주를 포박하여 끌고 갔다.

“연 공자! 용서해 주십쇼! 윽!”

공포에 사로잡힌 그가 소리치자 위사 중 하나가 그의 입을 후려쳤다.

뒤늦게 양호주는 이들이 금의위임을 새삼 인식하고 침묵했다. 금의위 앞에서 소란은 더 큰 화를 부른다는 걸 깨달아서다.

일이 얼추 정리되자 무당파 장문인 영결상인과 오룡궁 궁주가 관리들에게 다가갔다.

“빈도는 무당파 장문인 영결입니다.”

“오룡궁의 궁주인 천명입니다.”

도지휘사 신명휘가 도사들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도지휘사 신명휘요. 수하를 관리하지 못해 불편을 끼쳤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리다.”

그러자 정천호 황부승이 급히 나섰다.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소관의 잘못입니다. 도사님들께서 넓으신 마음으로 해량(海量)해 주십시오. 앞으로 더욱 주의하겠습니다.”

고위 무관들이 사과하자 영결상인과 천명 도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꼬일 대로 꼬인 일이 이렇게 해결될 줄이야!

“허허, 군문이야 본래 명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 아닙니까? 빈도도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일이 잘 마무리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영결상인이 흐뭇한 눈으로 연남천을 보았다.

금의위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 답답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금의위에서 연남천이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리라.

금의위의 정보력이면 연남천의 과거를 모를 리가 없다.

본래 관부, 그중에서도 황실과 녹림은 상극이다.

지방에서 황실로 진상되는 물건을 녹림에서 종종 강탈해 가곤 해서다.

‘그럼에도 황실에서 그를 중히 쓰는 걸 보면 남천이 보통은 아니야.’

녹림의 태상호법을 속가제자로 받아들인 무당파에는 잘된 일이었다.

이제는 연남천의 신분이 드러나도 파문 운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사람이 어떠한지 황실에서 인증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오룡궁에서 벌어진 ‘현령 아들 구타 사건’은 막을 내렸다.

***

팔월 말.

이른 아침.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무당산으로 올라갔다.

산문을 지키고 있던 현 자배 도사들이 흠칫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힘차게 휘날리는 네 개의 깃발에 각각 적힌 글자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

유명교였다.

현청 도사가 황급히 상청궁으로 내달렸다.

동시에 현송 도사가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빈도는 현송이라 합니다. 무슨 일로 무당파를 방문하셨는지요?”

깃발 뒤에서 중년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유명교 사자가 왔으니 장문인에게 안내하세요.”

현송 도사가 정중히 답했다.

“장문인께 고하러 사람을 보냈으니 곧 기별이 올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닥치세요. 당장 안내하지 않으면 당신의 사지를 찢어 산문에 걸어 둘 거예요.”

말과 함께 깃발 뒤에서 암경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악물고 저항하던 현송 도사는 결국 풀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지 암경을 더 쏟아 냈다.

현송 도사의 머리가 지면을 향해 서서히 내려갔다.

“으으으……. 큭!”

마침내 현송 도사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그제야 암경이 씻은 듯 사라졌다.

“당장 안내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말대로 하겠어요.”

사지를 찢어 산문에 걸겠다는 소리다.

벌떡 일어난 현송 도사는 검 손잡이를 움켜잡고 깃발 뒤쪽을 노려보았다.

수치심에 달려가 사생결단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 공포에 잠식당한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리기만 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실로 수레바퀴 앞의 사마귀 같은 놈이로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그냥 안내하는 게 좋을 게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확인할 일이 있어서 왔느니라.”

현송 도사는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이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최대한 느릿느릿 산을 올랐다.

현청 도사가 먼저 갔으니 유명교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거라 믿으면서.

역시나 상청궁 앞은 도사들로 가득했다.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던 현송 도사는 장문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영결상인은 이마에 흙이 박힌 현송 도사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장문인, 유명교에서 장문인을 찾아왔습니다.”

“수고했다.”

그제야 현송 도사는 사형제들과 합류했다.

만에 하나 싸움이 일어나면 검진(劍陣)을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영결상인이 복잡한 눈으로 유명교 고수들을 보았다.

숫자는 스물에 불과하지만 하나하나가 절정고수라 마음이 무거웠다.

“무슨 일로 빈도를 찾으셨소?”

노인, 십두마병 혈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거두절미하고 묻겠다. 올해 초 건국사에서 본교의 법사를 암습한 무당파 제자가 있었다. 그가 누구냐?”

“금시초문이오. 더구나 무당파 제자들은 금년부터 강호행을 나가지 않고 있소.”

“흰소리하지 마라. 이미 그가 너희 무당파의 제자라는 걸 알고 왔다.”

“허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려. 정말 올해는 강호행을 내보낸 제자가 없소.”

영결상인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영결상인의 안색을 관찰하던 여자, 독심귀랑 양소란이 말을 바꿨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모르는 눈치군요. 하지만 무당파 제자가 금의위와 손잡고 본교 법사를 암습한 것은 사실이에요. 최근 금의위나 관부와 얽힌 제자가 누구죠? 설마 그런 사람도 없다고 하지는 않겠죠?”

“…….”

영결상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양 현령의 일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서 감추기가 어려웠다.

음모와 계략에 능한 양소란은 찰나 지간의 변화를 간파해 냈다.

“후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무당파가 삼년지약을 어기기로 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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