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회. 이 진언(眞言)을 전심으로 외워라
일월 중순.
산서성.
령석현.
해거름 무렵.
허름한 관제묘 앞에 이두 마차가 멈춰 섰다.
“아이고! 춥다! 추워!”
초로(初老)의 마부가 호들갑을 떨며 마부석 아래로 내려와 마차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문앞에 이를 즈음, 마차 문을 열고 두 사람이 내렸다.
연적하와 적월 공취산이다.
“공자님, 오늘 밤은 이곳에서 묵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마을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몰라서요.”
연적하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연적하의 반응을 확인한 후 부랴부랴 야영 준비를 했다.
연적하도 공취산과 함께 관제묘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관리하지 않은 지 꽤 된 듯 관제묘 안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정면을 살피던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우와 관평(관우의 아들)은 있는데 우측에 있어야 할 주창(관우의 부하 장수)이 보이지 않아서다.
“여긴 주창이 없네?”
“추위가 믿음을 이긴 모양이다.”
말과 함께 공취산이 재로 뒤덮인 바닥을 가리켰다.
타다 남은 알록달록한 목재를 보니 누군가 주창을 부숴서 땔감으로 쓴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경악할 일이지만 공취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추우면 나무를 해다가 때지 왜 멀쩡한 신상을 뽀갔대? 하여간 사람들 심보 하고는.”
“관우를 섬기지 않는 사람에게 신상은 나무토막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귀찮았던 모양이지.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을 남겨 둔 게 어디냐.”
연적하가 공취산을 힐끔 보았다.
“안 추워?”
“폐인이 된 내가 안 춥겠느냐?”
“혹시 관우 믿어?”
“허, 너는 내가 유명교도였음을 잊었느냐? 명왕교와 유명교는 오직 염마왕만 믿는다.”
“잘됐네. 나도 안 믿거든.”
단위로 훌쩍 뛰어 올라간 연적하가 관우상을 발로 차서 쓰러트렸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관우상을 조각조각 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관우상이 땔감으로 변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끝으로 관우상의 파편을 한곳에 모으며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관우상은 몸을 덥히는 데라도 쓰지.”
공취산은 이어질 뒷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연적하는 파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싯돌을 탁탁 마주쳐 댔다.
불은 생각처럼 쉽게 붙지 않았다.
평범한 노인이 된 공취산은 입으로만 연신 훈수를 뒀다.
“좀 더 짧게 쳐라. 순간의 힘으로. 탁탁!”
그러나 관우의 저주라도 받았는지 불꽃은 일어났다가도 금세 사그라졌다.
결국 지친 연적하는 들고 있던 부싯돌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젠장! 못 해 먹겠네. 늙은이, 입으로만 하지 말고 직접 해 봐.”
그러나 공취산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그때 마부가 한 아름 가득 나뭇가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근방 숲에서 좀 주워 왔습니다. 생각보다 마른 나무가 아주 많더라고요. 어라? 그런데, 땔감이 있었네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마부는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부싯돌을 탁 맞부딪쳤다.
거짓말처럼 단 한 번만에 불씨가 만들어졌다.
마부는 콧노래를 흥흥 불며 불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공자님, 오늘은 저도 관제묘 한구석에서 자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는 바람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그러세요.”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영할 때마다 마부가 따로 떨어져 자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차라리 잘 됐다 싶다.
“아저씨, 밖에서는 같이 있어도 되는데 왜 항상 따로 지내요?”
“아! 말도 돌봐야 하고, 또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는 분들이 많아서요.”
“우리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다음부터 같이 있어도 돼요.”
“어이쿠!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역시 말들을 생각하면 저는 따로 있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연적하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마부는 마차에서 솥을 가져다가 불 위에 걸고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다.
요리라고 해 봐야 멀건 쌀죽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반점의 고급 요리 못지않았다.
세 사람은 죽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관제묘를 찬찬히 살피던 마부가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관제묘에는 관평만 있네요? 관우와 주창은 어디에 팔아먹었나?”
연적하가 못 들은 척하자 공취산이 나섰다.
“아까 보니 바닥에 타다 남은 나무가 보이더군. 팔아먹은 게 아니라 태워 먹었을 게다.”
“예에? 태워요? 누가 그런 벼락 맞을 짓을. 아무리 추워도 그렇지, 지천에 깔린 게 나문데. 몹쓸 사람들 참 많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관우를 믿지 않으니, 나에게 그런 소리 해 봐야 소용없다.”
그러자 마부는 즉시 연적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연적하의 대답은 공취산보다 더했다.
“아저씨, 주창은 모르겠지만, 관우는 내가 뽀갔어요. 관우도 자기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 걸 알면 좋아할 거예요.”
“아, 예. 하기야 그래 봐야 나무 아니겠습니까? 오래된 관우상은 불사르고 새로 만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공자님 덕분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네요.”
마부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었다.
감히 녹림의 이인자를 벼락 맞을 몹쓸 사람으로 만들 수 없어서다.
꾸벅꾸벅 졸던 마부는 피곤했던지 불가에서 잠들어 버렸다.
연적하는 문득 공취산을 보았다.
그는 령석현에 들어서면서부터 말수가 눈에 띌 정도로 줄었다.
교구현이 코앞이니 그럴 만도 하다.
늦어도 사흘 후면 유명교 성지인 풍지산에 닿는다.
사흘.
입만 열면 다 비웠다고 하더니 두려움만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알면서 뭘 물어.”
“나는 동정받을 정도로 착하게 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부담이 적어.”
“후후. 너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놈들 중에 가장 정직한 놈이다.”
“그렇게 보였어? 하지만 나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사람이야. 삼 푼을 감추라고 하는 말 몰라?”
“제대로 배웠구나. 그래, 삼 푼을 감추어라. 특히 유명교주 앞에서는 그래야만 한다.”
“당신도 좀 감추고 살지 그랬어? 왜 중간에 튀어 나가서.”
“음양고 때문이다. 교주를 만든 게 염매(魔魅)니, 염매로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성공한 것 같아?”
“명왕교에 있을 때만 해도 성공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를 데려오라고 한 걸 보면, 아무래도 헛된 바람이었던 것 같다.”
“설마 배신감 때문이 아니라는 거야?”
“배신감? 사저는 처음부터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다. 그랬다면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을 리가 없지. 사저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늙은이를 원하는 거야?”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겠지. 양고(陽基)를 쓴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에이 설마. 고작 늙은이를 조롱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 힘든 일을 부탁했다고? 백두마군을 살려서 데려가는 게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사저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건 좀 억지다. 다른 이유를 생각해 봐.”
“다른 이유는 없다. 사저는 나를, 내 인생을 파괴했다. 망가져 가는 나를 보며 즐거워했단 말이다! 내 손으로 스승을 죽이고! 사형제들까지 모두 죽였다! 그런데 뭐가 억지라는 말이냐!”
공취산의 음성이 점점 높아지더니 나중에는 절규로 변했다.
극도의 긴장 속에 평정심을 잃은 모습이다.
연적하는 황당했지만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공취산과 유명교주의 관계에서는, 그게 뭐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소란에 마부가 잠에서 깼는지 가볍게 몸을 뒤척였다.
한순간 연적하는 마부가 부러웠다.
그처럼 공취산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타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깊숙이 발을 담갔다.
‘풍지산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유명교주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피치 못해 만났더라도 약속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공취산도 그런 후회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지반 죽은 눈을 하고 있는 그를 보니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유명교주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지독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공취산에게 공포와 절망, 자기혐오를 심어 주기 위해 자신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성공했다.
초탈해 보이던 몇 달 전과 달리 지금의 그는 나락에 떨어진 모습이니까.
***
산서성.
교구현.
신시 초(오후 3시).
연적하와 공취산을 태운 마차가 마침내 교구현에 접어들었다.
풍지산까지는 마차로 반 시진(1시간) 거리.
피가 마르는 공취산의 심정과 달리 마부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기나긴 여행의 끝이 보이는 까닭이다.
비록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몇 달간 쉬지 않고 일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평소라면 가끔씩 쉬어 갈 법도 한데 마부는 오히려 말을 재촉했다.
공취산의 핼쑥한 얼굴을 보다 못한 연적하가 슬쩍 물었다.
“어떻게, 좀 쉬었다가 갈까?”
“괜찮다. 망나니의 칼춤이 길어져 봐야 고통스럽기만 하니까.”
“그런가.”
연적하는 더 권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어서 다른 방도가 생긴다면 모를까?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번민의 시간을 줄이는 게 나으리라.
마침내 마차가 풍지산 초입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마차가 멈추자 연적하와 공취산이 밖으로 나왔다.
“마부 아저씨는 여기서 기다려 줘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예, 예.”
겁이 나는지 마부는 아예 마부석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가자고.”
연적하가 앞서 나가자 공취산이 느릿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산을 오른 지 일각(15분)쯤 지났을까?
장년의 남자 하나가 허공에서 두 사람 앞으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듯한 그의 등장에 연적하는 멈칫했다.
무공인지 진법인지 알 수가 없다.
팔황의 일인인 태백 선인(太白 仙人)이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교주님의 명으로 두 사람을 마중 나왔소. 팔문팔상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게 팔문팔상진에 빠지든 말든 관계없다는 투였다.
연적하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공취산을 부축해 그의 뒤를 따라갔다.
태백 선인은 갈림길이나 부적이 붙은 장대가 나올 때마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
직선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지라 시간이 꽤 소요됐지만 연적하는 불평하지 않았다.
의지할 만한 우군도 없이 팔문팔상진에 빠지는 것보다 백배 나은 까닭이다.
그렇게 반 시진(1시간)쯤 산을 오르자 ‘선녀암’이라고 쓰인 표시목이 나타났다.
멀리 암자가 보이자 태백 선인의 걸음이 빨라졌다.
한 번쯤 당해 보라고 어깃장을 놓는 게 아니라면 팔문팔상진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리라.
거리가 점점 벌어졌지만 연적하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구차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공취산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늙은이. 부탁할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으로.”
“나를 데리고 달아나 줄 수 있겠느냐?”
“헛소리하지 말고.”
연적하가 진지하게 나오자 공취산이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생각하니 태일관의 정수는 ‘진구정단법(眞九鼎丹法)’이 아니라 ‘태상정일강림신주(太上正一降臨神呪)’에 있는 것 같다. 사저도 결국 그 주문으로 유명교주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 진언(眞言)을 전심으로 외워라. 그게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모든 인연을 내려놓고 털끝 하나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태어나기 이전의 선천(先天)이요, 진리인 무극(無極)이다. 태초의 텅빔[太虛]에 녹아들어 가면 성(性)과 명(命)이 들어가는 곳에서 의식을 잊게 된다. 의식을 잊은 뒤에야 신들과 만날 수 있으니 옥청(玉淸)에서 아홉 마리 용이 내려오리라.’”
그것은 신과 만나게 해 준다는 ‘태상정일강림신주’의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