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회. 제물이 아니라 기회니라
육십 년 전.
사천성.
도강언 용지진.
백사하 강변의 허름한 가옥.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바싹 마른 사내아이가 툇마루로 기어 나왔다.
“누나, 더 늦기 전에 가.”
양여령은 대꾸하지 않고 구멍 난 그물을 꿰매는 데에만 집중했다.
물고기라도 잡아야 동생의 곡식을 구할 수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하던 일을 어깨너머로 보아 두기를 잘한 것 같다.
그물은 남매에게 남겨진 마지막 생계 수단이었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너덜너덜해진 그물을 한 땀 한 땀 깁고 또 기웠다.
아침에 시작한 일은 정오를 넘겨서야 끝났다.
쪼그리고 앉아 그물을 수선하던 양여령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처음 하는 일이라 시간이 더 걸렸다.
이제 손에 익었으니 다음에는 조금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흐뭇한 얼굴로 그물을 내려다보던 양여령은 뒤늦게 동생을 떠올렸다.
‘더 늦기 전에 가’라는 말 이후로 동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그녀는 천천히 툇마루로 고개를 돌렸다.
툇마루 끝에 동생이 엎드려 있었다.
“…….”
양여령은 머뭇머뭇 툇마루로 다가갔다.
하얗게 드러난 동생의 목덜미에는 벌써부터 파리 떼가 들끓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그랬다.
그 뒤로 아빠와 막내까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낯설다.
너무 낯설어서 무서울 정도다.
그래도 그녀는 동생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라면 나를 두고 갈 수 있겠어?”
“…….”
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
삼 년 전.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신당(神堂)에서 경전을 읽고 있던 팔황신모의 귓가에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누님은 돌아가세요.”
“너라면 나를 두고 갈 수 있겠니?”
그때 팔황신모는 백사하 강변의 어린 남매를 떠올렸다.
동생과 자신의 마지막을 보는 듯했다.
그저 우연일까?
아니 어쩌면 운명일지도.
잠시 후 태백 선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허락도 없이 선녀암에 오르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아이고, 힘들다. 사람이 보여야 허락을 받죠. 산 아래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녹림 총순찰 연적하가 교주님에게 해약을 얻으러 왔다고 전해 줘요.”
그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팔황신모는 피식 웃었다.
자신을 유난히 따르던 남동생이 꼭 저랬다.
연적하라고 했던가.
얼굴까지도 닮았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동생의 장성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
현재.
생명은 복잡하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사람은 복잡한 생명이다.
스승과 동문들까지 몰살한 팔황신모지만 기이하게 연적하에게는 관대했다.
처음 풍지산에서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연적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 호의는 연적하의 지인들에게까지 확장됐다.
구천노도 심통이 ‘이매망량’의 독에 중독되어 죽어 갈 때 살려 주기까지 했다.
연적하가 와룡장 출신이라는 게 알려졌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뒤에서 ‘교주의 혈육’이라고 수군거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무상(無上)의 존재인 그녀에게 욕을 했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십전무후에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다소 황당한 변명까지 했다.
삼두견과 흑기사의 어정쩡한 행동도 그런 교주의 영향 때문인지 모른다.
팔황신모가 이해를 바라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불로불사를 추구한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책은 돌려줬잖아!”
연적하가 눈을 부라렸다.
분위기는 흉흉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만 따로 보면 마치 할머니와 손자의 실랑이 같다.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 늙은이야! 고맙다면서 왜 괴롭히는 건데?”
연적하의 계속된 망발을 보다 못한 태백 선인이 버럭 소리쳤다.
“이놈! 정녕 죽고 싶으냐!”
“당신은 닥치고 있어! 진짜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연적하가 태백 선인을 향해 살기를 쏟아냈다.
깜짝 놀란 태백 선인은 전신 공력을 끌어 올려 살기에 대항했다.
그제야 겨우 숨통을 조르던 압박이 해소됐다.
‘미친. 저 나이에 이런 공력이 가능하다고?’
팔황의 수좌가 고작 살기에 이렇게 고전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그때 팔황신모의 귓가로 직일신장의 전음이 들려왔다.
-교주님, 제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급히 검은 염소를 구해 오라고 했더니 이제야 가져온 모양이다.
순간 팔황신모는 손에 잡고 있던 십전무후 남궁연을 힐끔 보았다.
“너에게는 미안한 일이다만, 아니 어쩌면 나쁜 일만은 아닌지도 모르지…….”
“설마 나를 제물로 쓰려는 건가요?”
“그래, 이제야 운명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아이야, 제물이 아니라 기회로 받아들이도록 해라. 실은 너도 불로불사의 세계가 궁금할 테지?”
“내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나를 제물로 쓸 거잖아요. 당신 속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팔황신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궁연을 제물로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를 원한 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지 자기가 아니다.
하지만 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과거 태일관의 때도 그랬다.
스승과의 잠자리와 태일관의 몰살, 그 모두를 원한 건 신이었다.
불로불사를 약속한 신언(神言)은 절대적이다.
팔황신모는 백두마군들과 태백 선인에게 전음을 날렸다.
-초혼제(招魂祭)를 시작할 것이다. 연적하와 그의 일행이 신당을 벗어나지 못하게 해라.
이윽고 그녀는 남궁연을 옆에 끼고 날아오르더니 밤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라 뒤쫓아 가려는 청운검 남궁천과 심통, 삼보절명 당운망의 앞으로 태백 선인과 육통존자, 비파선자, 구궁천녀가 떨어져 내렸다.
곧이어 일곱 명의 고수들이 난전을 벌였다.
연적하가 움직이자 잠자코 있던 삼두견과 흑기사 다시 앞을 막아섰다.
환영신마 웅재귀와 무산낭랑 이매화도 ‘산가지’와 ‘구절장’으로 술법을 펼쳤다.
잠깐 멈추었던 싸움이 재개됐다.
남궁연이 납치된 까닭에 양측의 싸움은 이전보다 더욱 격렬했다.
남궁천은 더 이상 ‘청운검’이라 불리기 어려울 정도의 기량을 보였다.
그가 창궁무애검법의 ‘소소천뢰(昭昭天雷)’를 펼치자 우렛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검기가 뻗쳤다.
처음에는 태백 선인이 홀로 상대했지만, 결국 비파선자까지 합류해야 했다.
띵- 띠잉-.
비파선자의 음공이 남궁천에게 집중됐다.
두 사람이 합공하자 남궁천은 다시 수세에 몰렸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신의 손해라는 걸 직감한 남궁천은 이를 악물었다.
연적하는 마물과 백두마군들에게 발목이 잡힌 상태.
자신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내가 부순다!’
이윽고 남궁천의 검 끝에서 눈부신 광원(光源)이 둥실 떠올랐다.
대연검법 일 식 천동망월(天動望月)의 검의(劍意)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빛 덩어리가 태백 선인을 덮쳤다.
깜짝 놀란 태백 선인이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거대한 달빛은 끝내 그를 집어삼켰다.
위기를 느낀 태백 선인은 황급히 검강으로 빛 덩어리를 후려쳤다.
꽈광!
폭발음과 함께 조각난 암경이 태백 선인을 휩쓸었다.
“쿨럭!”
태백 선인은 피를 토하며 비칠거렸다.
무리하게 ‘의형검기’를 쓴 남궁천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따당- 땅-.
두 줄기 강기가 남궁천을 노리고 날아갔다.
남궁천은 건곤무종보로 강기를 피한 뒤 비틀거리는 태백 선인을 뛰어넘었다.
신당에서 다수의 적과 싸우기보다 제사를 막는 게 우선인 까닭이다.
그런 그의 앞을 이번에는 십두마병과 유명교도들이 막아섰다.
“꺼져라!”
남궁천은 야수처럼 광폭하게 날뛰었지만 십두마병들을 떨쳐 내지 못했다.
십두마병과 유명교도들이 개떼처럼 그에게 몰려갔다.
비파선자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십두마병과 유명교도들 때문에 남궁천에게 음공을 쓰기가 어려워서
결국 그녀는 목표물을 바꾸었다.
띵- 띠딩-.
육통존자보다 눈곱만큼의 우위를 지키고 있던 심통이 날벼락을 맞았다.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강기에 심통은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 염치없는 연놈들! 팔황이라는 것들이 떼거리로 덤벼드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당운망과 구궁천녀의 싸움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싸운다기보다 당운망이 암기로 구궁천녀를 잡아 두는 형국이었다.
구궁천녀는 빨리 끝장을 보려 했지만, 당운망이 응하지 않았다.
“이 늙은이야! 뭐 하자는 짓이냐!”
구궁천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당가와의 싸움은 이기든 지든 속전속결인데 그러지 않으니 속만 타들어 갔다.
저 늙은이는 다가가면 독물을 뿌리고, 물러서면 뭔가를 중얼거렸다.
‘칫! 무작정 싸우려 하기보다 무슨 꿍꿍이인지 지켜보는 게 나으려나?’
구궁천녀는 당운망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당운망이 반개한 눈을 번쩍 떴다.
‘낙월독정’의 독기가 아직 다 모이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쓸 만은 한 것 같다.
그는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옷자락 안쪽에서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고슬취생(鼓瑟取生, 거문고를 타 생명을 취한다)’의 하독 수법이었다.
‘낙월독정’의 독기가 실린 잠력이 지면을 타고 구궁천녀에게 흘러갔다.
구궁천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낙월독정’은 대낮에도 발견하기 어려운 독기니 당연하다.
“윽!”
상대를 응시하던 구궁천녀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 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그녀는 심장의 격통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대비하고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눈 뜨고 독에 당했다.
곧이어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히고, 사지가 제멋대로 뒤틀렸다.
“어, 언제…….”
빨갛게 충혈된 눈에 피가 맺혔고, 머리카락은 하늘로 솟구쳤다.
그녀의 하늘하늘한 옷과 매끈한 피부가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당운망은 대답 대신 독질려를 한 움큼 집어 남궁천 주변에 뿌렸다.
“악!”
“윽!”
“뭐야!”
십두마병과 유명교도들 사이에서 짧은 비명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십두마병과 유명교도 들의 움직임이 한풀 꺾였다.
그 틈에 남궁전은 건곤무종보로 빠르게 마당을 벗어났다.
십두마병과 유명교도 들이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보고 있을 때다.
꽈르르릉! 꽈광!
천번지복의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태풍처럼 휘몰아친 끔찍한 경력에 신당이 폭삭 주저앉았다.
대경실색한 십두마병과 유명교도들은 머리를 움켜잡고 몸을 쪼그렸다.
뒤이어 암천 하늘에서 검기가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콰콰콰콰칵-.
구천구검(九天究劍) ‘산검멸지(散劍滅地)’와 ‘풍천소축(風天小畜)’에 이은 ‘현녀강우(玄女降雨)’였다.
십두마병과 유명교도들이 비명을 지르며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다.
심통과 당운망, 월아와 금아도 황급히 돌담 아래로 몸을 피했다.
선녀암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났다.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삼두견의 머리를 청사가 훑고 지나갔다.
투두둑-.
세 개의 머리가 지면에 나뒹굴었다.
흑기사는 창끝으로 연적하를 겨누었지만 충격이 컸던지 움직이지 못했다.
연적하는 기절한 두 명의 백두마군을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을 죽이면 더 강한 마물이 튀어나와 걸리적거릴 테니 내버려 둔 것이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연적하의 신형이 제비처럼 밤하늘로 날아갔다.
“으아아아아!”
섬뜩한 분노가 실린 장소성이 풍지산을 넘어 사방 십 리(十里)까지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