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576화 (576/1,339)

576회. 무공 외에 중요시하는 게 있나요?

갈마산맥.

죽음의 회랑.

대화는 인간관계를 더 나아가게 만들어 준다.

지난밤 곽상문과 연적하의 대화로 양측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해소됐다.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곽상문은 오십 장 앞서가는 연적하 일행을 보고도 더 이상 노여워하지 않았다.

가장 무공이 뛰어난 그의 태도는 다른 소요종 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죽음의 회랑’이 끝나갈수록 야수들의 등급은 낮아졌다.

곽상문은 중독된 ‘연허’의 고수들을 위해 야수 퇴치에 앞장섰다.

어지간한 야수들은 그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해독에 집중하면서 ‘연허’의 고수들 상태도 점차 좋아졌다.

독액에 직접 맞지 않은 것도 있지만, 소요종의 약이 워낙 뛰어나서다.

오시 초(오전 11시).

독에 중독돼 축축 늘어져 있던 ‘연허’의 고수들이 하나 둘 기력을 되찾았다.

가장 먼저 체력을 회복한 사람은 원요였다.

그는 다리가 부러져 마차로 옮겨 간 이휴를 대신해 곽상문의 옆을 지켰다.

“진인, 초목급(草木級) 야수만 보이는 걸 보니 출구에 거의 도달한 모양입니다.”

종문 제자들은 단계마다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

예컨대 연단을 방사(方士), 연허를 노사(老師), 원영을 진인(眞人), 독요를 노조(老祖), 현인을 제군(帝君), 종사를 존자(尊者)라 한다.

원요의 말에 곽상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곡에 들어온 지 하루 반나절 지났으니 거의 종착지에 왔다고 봐야 했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하루 반나절 왔다.

출발이 조금 늦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생각보다 야수가 많았다.

힘들게 금급 야수까지 잡았지만 운은 따르지 않았다.

내단은 구경도 못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연적하의 단검 말입니다. 신수를 불러내는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방법이라. 그는 자신의 심법과 상성이 잘 맞아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종문의 법기(法器)만 해도 심법과는 무관하지 않습니까? 후배가 보기에는 단검을 지키기 위해서 둘러댄 말 같습니다.”

“그럴지도. 아무려면 어떠냐. 그가 아니면 평범한 단검에 불과한 것을.”

말하다 말고 곽상문은 원요를 힐끔 보았다.

단검에 마음이 동한 걸까?

하기야 신수가 들어 있는 단검이면 그럴 만도 하다.

종문 제자들 간에 뺏고 빼앗기는 일은 일상다반사라 주의를 줄 일도 아니었다.

“연적하가 ‘비승과해’의 참가자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적당히 하라는 소리다.

“예.”

원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연적하를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너는 무슨 검공을 익혔느냐?”

원요는 단번에 곽상문이 자신의 경지를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깨를 펴며 답했다.

“천동굉지(天動轟地)를 팔 성까지 익혔습니다.”

그것은 ‘연허 팔 성’이라는 말과 같았다.

오십 대 중반에 ‘연허 팔 성’이면 자랑할 만한 성취였다.

“더욱 정진하거라. 세월은 살같이 흐른다[光明似箭].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원영에 들지 못하면 진토(塵土)가 되고 말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이 있느냐?”

종문의 제자라고 다 스승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승의 눈에 들기 전까지 종문 제자들은 스스로 갈 길을 개척해야 했다.

“제가 부족하여 아직 스승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정진해라.”

“예.”

원요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곽상문은 소요종에서 한창 웃어른이다.

그런 그가 스승이 있는지를 묻고, 정진하라고 하니 괜히 가슴이 설렜다.

***

수미성.

원양현.

미시 초(오후 1시).

연적하 일행은 마침내 ‘죽음의 회랑’을 통과했다.

협곡을 빠져나가 한 식경(약 30분) 가량 걸으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의 낡은 푯말에 망우촌(忘憂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상인들로 북적거리던 양도와 달리 망우촌은 작고, 무덤처럼 적막했다.

마을을 휘둘러보던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양도는 너무 화려했어. 그렇지 않나요?”

“그러게요. ‘죽음의 회랑’으로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정말 작네요.”

“이거 식사할 데나 있는지 모르겠네. 정 형의 요리도 슬슬 질리는데.”

연적하의 말에 정덕행은 흠칫 몸을 떨었다.

거리에서 해 먹는 요리라고 해 봐야 몇 종류 되지도 않는다.

설상가상, 재료도 한정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연적하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억울했지만 부지런히 주위를 살폈다.

뒤쪽이 소란스러운 걸 보니 상단도 마을에 들어온 모양이다.

‘이거 서둘러야겠는걸?’

마을 크기에 비해 상인들이 너무 많았다.

음식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있다 해도 소수의 사람들만 혜택을 보리라.

연적하도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정 형, 빨리 음식점을 찾아! 전에 말했지? 움직임에는 때가 있다고. 절체절명의 순간이야! 누가 먼저 음식점을 찾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절체절명’에 ‘삶의 질’까지 거론됐다.

정덕행은 속으로 ‘그래 봐야 나는 어차피 국수가 아니냐!’고 빈정댔다.

그래도 그는 쉬지 않고 눈알을 좌 우로 굴렸다.

지금은 국수라도 좋았다.

너무 피곤해서 남이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때 공지유의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거 아니에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허름한 전각에 ‘옥류관(玉流館)’이라는 낡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녀가 자신 없게 말한 이유는 관(館) 자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 탓이다.

“맞네요. 가요.”

오감이 발달한 연적하가 음식 냄새를 맡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옥류관에는 점원이 따로 없었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이 튀어나와 두툼한 허리를 굽실거렸다.

“어서 오십쇼. 저희 옥류관으로 말씀드리자면…….”

“아, 됐고요. 잘하는 음식으로 이 인분 가져오세요. 국수 한 그릇 하고요.”

“예, 예.”

연적하 일행이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소요종 고수들과 세 개 상단의 상단주, 상단 대장(大將), 부장(副將)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갑작스럽게 손님들이 몰려오자 주인은 주문을 받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몇몇 부장들은 자리가 없어 다시 나가야 했다.

뒤늦게 조장(組長)들이 들어왔다가 입맛만 다시고 돌아 나갔다.

그걸 본 연적하가 정덕행에게 말했다.

“봤지? 모름지기 사람은 움직일 때를 잘 알아야 돼. 한순간에 생사가 갈린다니까.”

‘이게 생사가 갈릴 일이냐!’

정덕행은 속으로 구시렁대면서도 동감이라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연적하 일행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휴가 연적하에게 말을 걸었다.

“‘비승과해’에 참가한다고?”

“예.”

연적하는 신선풍의 노인이 묻자 공손히 답했다.

강호에서 만났다면 신선인 줄 알았을 정도로 노인의 기도는 대단했다.

“추천서가 없다고 들었다. 시험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것이 있느냐?”

“없는데요?”

“흠! 종문에서는 단지 무공의 고하로 제자를 뽑지 않는다. 그랬다면 ‘비승과해’가 아니라 그냥 ‘비무대회’를 열었을 게다.”

“아.”

연적하는 노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점점 낭떠러지로 다가가는 느낌이 랄까?

가만히 듣고 있던 공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야(老李), 무공 외에 특별히 중요시하는 게 있나요?”

공지유는 소요종의 원로 고수를 뭐라 부를지 몰라 일단 ‘노야’라고 했다.

그러자 이휴가 피식 웃으며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진인이라고 부르거라.”

순간 공지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진인은 ‘원영’의 경지에 이른 신선들로 민간에서는 반선(半仙)이라 했다.

“지, 진인, 몰라뵈었습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공지유는 이휴에게 절을 올리려 했다.

이휴가 접인술로 공지유를 잡아 세웠다.

“수행 중인 종문의 제자에게 절을 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다. 그냥 앉거라.”

공지유는 감히 이휴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무공 외에 중요시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겠다? 그것은 한마디로 영기라고 할 수 있다.”

“영기요?”

공지유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하다. 영기야말로 구주, 아니 이 세계의 근원이니라. 사람이 가진 영기는 천하 만물의 기운과도 같다. 가볍고, 무겁고, 밝고, 어둡고, 차고, 뜨겁고, 마르고, 습하고……. 그 모든 기운은 결국 청적황백흑(靑赤黃白黑)의 오행(五行)으로 요약된다. 오행의 위에는 음양(陰陽)이 있고, 가장 귀한 것은 태극(太極)이지. 혹자는 태극 위에 혼돈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건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휴는 오행이 양(陽)의 영기며, 오행의 사이[五行間]에 음(陰)의 영기가 있음은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기의 중요성만 알면 되기 때문이다.

공지유는 물론 옥류관의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구주에서 ‘비승과해’와 관계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당연하다.

이휴는 말이 나온 김에 슬쩍 추도영법(追到靈法)을 사용했다.

그것은 사물에 내재된 영기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공법.

영기를 두 눈에 모으자 천하 만물이 흑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휴의 시선이 공지유를 향했다.

그녀는 흑백의 세상에서 홀로 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행 중에서도 양에 속한 목(木)의 영기였다.

이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양에 속한 오행의 영기는 중품(中品)이다.

소요종 제자 중에는 하품(下品)인 오행간(五行間)의 영기를 가진 자가 태반이었다. 그러니 이변이 없는 한 그녀는 소요종 제자가 될 것이다.

‘연적하라고 했던가?’

이휴는 연적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응?’

짙은 회색이었다.

흑백의 세상에서 짙은 회색이면, 영기가 없거나 약하다는 뜻이다.

이휴는 즉시 추도영법을 거두었다.

세상이 빠르게 본래의 화려한 색깔을 되찾았다.

공지유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

“저어, 영기는 모든 사람에게 있겠죠?”

“그야 이를 말이냐. 영기가 없는 것은 시체뿐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영기를 가지고 있다. 초목(草木)에도 영기가 있지 않더냐.”

그건 영지 선초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약초학에 밝은 공지유의 입에서 뒤늦게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너무 긴장한 탓에 알고 있던 것도 잊었다.

“그, 그럼, 종문에서 원하는 영기가 따로 있나요?”

“영기는 크게 하품, 중품, 상품, 천품으로 나뉜다. 하품만 돼도 종문의 제자가 될 수 있지. 그 말은 하품에 들지 못하면 절대 종문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

“‘오행’의 영기가 양이라면, ‘오행간(五行間, 오행의 사이)’의 영기는 음에 속한다. ‘오행간’의 영기가 하품이고, ‘오행’의 영기는 중품이다. 그 위로 ‘음양’의 영기인 상품(上品)이 있으며, 그 위로 ‘태극’의 영기인 천품(天品)이 있느니라.”

“아까 말씀하신 혼돈은요?”

“그건 아직 이 세상에 나온 적이 없는 전설이라, 등급 외라 생각하면 된다.”

때마침 연적하 일행의 음식이 먼저 나왔다.

끝을 모르던 이휴와 공지유의 대화는 음식 앞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곽상문이 이휴에게 말했다.

“수고했네. 영기를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하더군. 그런데 자네는 영기와 승급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나?”

“‘독요’까지는 더러 ‘오행간’의 영기를 가진 분이 계시지만, ‘현인’부터는 ‘오행’의 영기뿐이지 않습니까? ‘종사’는 음양의 영기라고 들었습니다.”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은 영기가 좋아야 승급에 유리하다는 소리였다.

“그렇지. 그런데 말일세.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네. 오행과 태극처럼 영기가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면, ‘혼돈’은 하품보다 낮은 자리에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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