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633화 (633/1,339)

633회. 검령아! 내가 잘못했다!

‘천지종과 소요종으로 하여금 전쟁 중인 네 개의 종문들을 병탄하게 하자’는 남궁연의 말에 연적하가 애매한 얼굴로 물었다.

“좋은 생각 같은데, 천지종과 소요종에서 그렇게 할까요?”

“우리가 이번에 검령을 얻으면, 천지종과 소요종의 종사들도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설명이 생략된 말에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누님,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좀 풀어 줘요.”

“간단해. 천지종에서는 나를 선봉에 세울 거고, 소요종에서는 너를 세울 거야. 하지만 우리는 비경에서 이미 한차례 맞붙었지. 그걸 목격한 사람도 많고. 그렇지?”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지종과 소요종 진인들 앞에서 일각이나 비무를 했으니 소경도 알 게다.

“나는 너와의 싸움을 아직은 자신이 없다고 뒤로 미룰 거야. 그럼 추회 존자도 강요하지 못하고 다른 종문부터 병탄하자고 할 테지. 추회 존자는 가까운 태상종과 무극종부터 손에 넣으려고 할 거야. 천뢰종과 천태종은 소요종과도 접해 있어서 지금 건드리기 곤란하거든. 그럼 깜짝 놀란 소요종의 태을 존자는 인접한 천뢰종과 천태종을 손에 넣으려 할 거야.”

“태을 존자가 천뢰종과 천태종에 동맹을 맺자고 할 수도 있잖아요?”

“천뢰종과 천태종이 거부할 거야.”

“왜요?”

“그때쯤이면 천뢰종과 천태종은 동맹으로 맺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피를 흘렸을 테니까. 결국 태을 존자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너를 앞세워 그들을 병탄해야 해. 천지종의 마지막 목표가 소요종이라는 걸 알 테니까.”

“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태을 존자가 비경에서의 일을 빌미로 천지종에 복수를 하자고 할 수 있어. 그럼 나와 같은 이유를 대고 천지종을 뒤로 미뤄. 태을 존자도 네가 자신이 없다는데 억지로 시키지는 않을 거야.”

“정말 추회 존자와 태을 존자가 우리 바람대로 움직여 줄까요?”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천지종과 소요종이 초반에 맞붙지만 않게 하면 돼. 우리는 최소한 각각 두 개의 종문을 병탄한 뒤에 만나야 해.”

“만나도 문제네요. 추회 존자와 태을 존자가 천지종과 소요종의 통합을 순순히 지지해 줄까요? 종문을 병탄하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갈 텐데. 오백 년 전의 원한도 있잖아요.”

“우리 남궁씨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해. 너는 어때?”

“헤헤, 저는 누님에게만 약해요.”

“그럼 문제없겠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어요.”

“뭔데?”

갑자기 연적하가 남궁연의 허리를 손으로 휘감고 속삭였다.

“누님, 설마 그냥 이대로 갈 생각은 아니죠?”

그러자 남궁연이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홉 종문의 진인들이 바글거리는 이런 곳에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내 말 알지?”

“모르겠는데요?”

“게다가 우리는 검령을 얻어야 해. 검령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천지종과 소요종을 움직일 수 없어.”

“검령이야 얻으면 되죠.”

“너도 알잖아. 검령이 까다롭다는 거. 오죽하면 진인들이 벽곡단과 선단만 먹으면서 몸을 정결하게 유지하려고 할까. 절대 안 돼.”

남궁연의 단호한 태도에 연적하는 슬그머니 감았던 팔을 풀었다.

그녀의 말이 백번 맞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뭔가 억울한 느낌에 가슴이 답답했다.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자 남궁연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검령을 얻으면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약속한 거예요! 그때 가서 다른 말 하기 없어요.”

“나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여자 아니야.”

“진짜! 그때 가서 또 다른 소리 하면 내가 아주 천지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

“그러렴.”

씩씩거리는 연적하를 보며 배시시 웃던 남궁연이 갑자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누님.”

달아오른 연적하가 남궁연의 팔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사라져 버렸다.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검령, 짜증 나네.”

***

연적하가 청해 진인과 증관일 진인을 통해 천지종에 경고를 보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그들과 만난 천지종 진인들이 몇 되지 않아서다.

깊고 넓은 고산준령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됐다.

그래도 눈에 띄는 변화는 있었다.

남궁연이 소요종 진인을 살려 둠으로 소요종의 피해가 확연하게 줄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녀가 사막에서처럼 행동했다면 소요종 진인들 대부분이 사망했을 터였다.

연적하와 헤어진 뒤로 남궁연은 홀로 고산준령을 헤집고 다녔다.

그녀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검령을 얻어야 연적하와의 삶도, 강호로의 귀환도 가능한 까닭이다.

산꼭대기에 오른 남궁연은 잠시 멈춰 섰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는 곳인지라 피로가 쌓이면 그때그때 쉬어야 했다.

조바심으로 무리를 하면 피로가 육체에 쌓이고, 그러다 한순간 신체의 균형이 깨어질 수 있다. 그럼 더더욱 검령과 만나기 어렵다.

잠시 숨을 돌리던 그녀는 선단(仙丹)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공복감과 더불어 피로는 풀렸지만, 막막함은 여전했다.

도대체 검령이 뭔지 그녀의 총명한 머리로도 알 수가 없었다.

영기가 종사의 수준을 뛰어넘은 자신이라면 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귀에 집중해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검령이 부른다고 했는데…….’

바람에 온 산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자신을 부르는 음성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점차 사라져 갔다.

비경에 든 뒤로 벌써 열 개의 선단을 먹었으니 열흘쯤 지났으리라.

그녀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경이 닫히는 것은 하늘의 색깔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저 붉은색이 점점 짙어져 사위가 검게 물들기 전에 다시 사막을 건너야 한다.

‘적하는 잘하고 있을까?’

그녀는 연적하가 심히 염려됐다.

자신도 이렇게 막막한데 젊은 혈기의 그는 오죽할까.

단 한 번의 입맞춤에 이성을 잃은 그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났다.

검령을 얻어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났다.

연적하를 떠올리고 마음이 급해진 그녀가 막 산 아래로 내려가려 할 때다.

아득히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에서 오색찬란한 서기가 솟구쳤다.

오색의 서기는 찰나지간에 사라졌다.

남궁연은 즉시 어검비행의 수법으로 산봉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남궁연.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남궁연은 흠칫 놀라 멈췄다.

구주에서 자신의 진명(眞名)을 아는 이가 없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검신을 밟고 까마득한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귓가로 다시 한번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 기다림이었구나.

“당신은 누구죠? 혹시 검령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소리가 답했다.

-본래 나는 너에게 속해 있었다. 검령이라 불리지만 나는 너의 일부

“나의 일부였다고요?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지금의 너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을 알지 못하니 당연하다. 나를 취하면 네가 누구인지 알게 되리라. 어둠이 머지않으니 속히 오거라.

‘어둠이 머지않으니 속히 오라’는 건 비경과 관계된 것이 틀림없다.

남궁연은 즉시 아래로 내려갔다.

산 정상에 이르자 아래쪽에서 강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검에서 내린 그녀는 경신술로 일각(15분)쯤 달렸다.

산길을 달려 작은 협곡에 도착하자 돌연 사방에서 안개가 일어났다.

남궁연은 망설임 없이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그녀는-마치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아는 것처럼-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길을 열어 주듯 자욱하던 안개가 걷혔다.

한참 걸어가자 거대한 석벽이 나타났다.

석벽 중심부에 손잡이만 남긴 채로 박혀 있는 검 한 자루가 있었다.

남궁연이 검을 바라보자 예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를 취하라.

그녀가 검 손잡이를 움켜잡는 순간이다.

석벽에 박혀 있던 검이 오색 서기를 발하더니,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남궁연의 몸에서 오색 서기가 뻗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검령을 취했다는 걸 깨닫고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반개한 그녀의 눈앞으로 윤회전생의 시간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남궁연은 담담하게 자신의 전생(轉生)을 관조했다.

윤회전생을 지켜보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영겁과도 같은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검령과 하나가 된 남궁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연의 발아래에 구름이 뭉글뭉글 일어나더니 그녀를 떠받쳤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운종술이다.

이윽고 구름을 탄 남궁연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구름을 타고 부드럽게 날아가는 그녀의 운종술은 어딘지 구천현녀를 닮아 있었다.

***

공복감이 느껴지자 연적하는 다시 한 개의 벽곡단을 꺼내 물었다.

혀끝으로 살살 벽곡단을 굴리던 그는 자신이 먹은 숫자를 세어 보았다.

무려 스무 개나 됐다.

비경에 든 지도 벌써 스무날이 지났다는 소리다.

“아! 젠장. 뭐지?”

천여 명의 진인들로 북적이던 고산준령도 이제는 한산해졌다.

여섯 종문의 싸움 통에 태반이 죽었지만, 검령을 얻고 돌아간 자들도 많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검붉은 기색이 완연했다.

저기서 붉은 기운이 완전히 빠지면 캄캄해지는데, 그 전까지 비경을 빠져나가야 한다.

검게 변해 가는 속도를 대충 계산해 보니 짧으면 오 일, 길어도 칠 일이면 끝날 분위기다.

몸이 달아오른 연적하는 두 팔을 쳐들고 외쳤다.

“검령아! 내가 잘못했다! 이제 좀 만나 주라! 내 앞에 나타나면 안 되겠니?”

그러나 사위는 고요했다.

심지어 시도 때도 없이 들리던 야수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신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이른 연적하는 쉬어 갈 곳을 찾기로 했다.

그는 적당한 나무를 찾아 위로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굵은 가지들을 넝쿨로 엮어 허공에 임시 잠자리를 만들었다.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로 누워 검붉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신세가 처량했다.

처음에는 날붙이 소리만 들어도 달려갔다.

소요종 진인들이 천지종 진인들에게 당하는 거라면 구해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도 벽곡단 열다섯 개를 먹을 때까지만이다.

열다섯 개 이후로는 더 이상 남을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와도 가던 방향이 아니면 외면했다.

내가 먼저 살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거니까.

당장 검령을 얻지 못하면 내 인생이 절단 나게 생겼으니 오지랖 떨지 말자!

그렇게 독하게 마음먹고 검령을 찾아다녔다.

심지어 그 좋아하는 잠까지 아껴 가며 죽기 살기로 매달렸건만, 소용없었다.

벌써 며칠을 못 잤는지 눈알이 뻑뻑하고 정신도 몽롱했다.

“아흐! 내가 미친 거지. 비경에 들어온 놈이 누님을 만났다고 껄떡거렸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자기가 잘못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주체 못 할 정욕을 자책하던 연적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런 반성의 효험일까?

-연적하.

연적하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비몽사몽간에 답했다.

“누님? 검령은요? 얻었어요?”

-연적하.

거듭된 부름에야 연적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누님?”

그러나 눈에 띄게 어두컴컴해진 하늘 아래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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