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회. 야수가 죽은 고기를 뜯어 먹는 것과 같다.
수약주.
수미성.
소요종 종산 불우산.
소요궁.
천뢰종의 사자가 다녀간 직후 태을 존자는 제군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천지종이 태상종과 무극종을 병탄했음을 알 것이오. 그와 관련하여 연 제군이 천뢰종의 사자를 보내 왔소.”
태을 존자는 의도적으로 연적하를 제군이라 칭했다.
사실 구주의 종문에서 연적하를 대종사로 생각하는 곳은 천뢰종밖에 없었다.
제군들은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태을 존자의 입에 주목했다.
태상종과 무극종을 병탄한 천지종에 맞서려면 그에 버금가는 세력이 필요하다. 미우나 고우나 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은 연적하 제군밖에 없었다.
“천지종에 맞서기 위해 천뢰종을 중심으로 천태종과 소요종이 뭉치자 하더이다.”
제군들은 씁쓰름한 표정으로 듣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자의 대종사 짓거리에 동참하려니 착잡한 것이다.
“삼월 초하루까지 천뢰종 종산으로 와 주십사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초요산 제군이 불편한 얼굴로 물었다.
“모임의 제안이 아니라 날짜를 지정해서 오라고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는 천뢰종뿐 아니라 소요종과 천태종에도 대종사 행세를 하고 있소. 그의 요구를 거부하자니 천지종을 상대할 방법이 없고. 제군들은 이 문제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
세 명의 제군들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속없는 사람들처럼 허허 웃으며 따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거부하면 당장 천지종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
한참 만에 진곤 제군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천지종을 상대하려면 세 종문이 한데 모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요구에 불응하면 천태종과 무슨 불경스러운 일을 꾸밀지 모르니, 일단은 우리도 천뢰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산월 제군이 동감을 표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불참하면 천뢰종과 천태종 입장에서는 등 뒤에 소요종을 남겨 두고 천지종과 싸워야 합니다. 지난번 천리포의 일로 우리는 천태종, 천뢰종과 서먹한 관계가 되지 않았습니까? 광성 존자와 혜문 존자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태을 존자가 눈을 찡그렸다.
“그 말은 천뢰종과 천태종이 칼끝을 소요종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소리요?”
“저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대종사로 받드는 연적하가 우리 소요종의 제군인데 설마 소요종을 치겠소?”
“연 제군은 스스로를 대종사라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솔직히 저는 그에게 소요종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요산 제군도 한마디 했다.
“그건 한 제군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연 제군의 마음은 이미 소요종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천문을 핑계로 천뢰종에 눌러앉은 게 아니겠습니까? 광성 존자가 그에게 벽력궁을 내어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의 말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실려 있었다.
천리포에서 연적하가 자신과 천태종의 비무 기회를 빼앗아 갔다고 여긴 탓이다.
태을 존자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그의 소집에 응해야 한다?”
제군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건 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뢰종에 가서도 문제다.
연적하 제군이 대종사 행세를 할 때 그걸 제지할 수 있을까?
자신은 못 한다.
혜문 존자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 터.
결국 천뢰종에 모인 종문들은 좋든 싫든 그를 대종사로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럼 빙설화와 연적하 중에 하나가 구주의 주인이 된다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기가 막혔다.
장구한 종문 역사상 누구도 성공한 적 없는 종문 통합을 그 애송이들이 할 수도 있다니.
***
같은 시간.
완산주 신주성.
천태종 종산 태백산.
적멸궁.
천태종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적멸궁에 혜문 존자와 네 명의 제군이 마주 앉았다.
천태종의 분위기도 뒤숭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삼월 초하루까지 천뢰종 종산으로 오라’는 천뢰종 사자의 말 때문이다.
하지만 연적하를 향한 제군들의 반감은 소요종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얼마 전 천리포에서 보여 준 연적하 제군의 의리와 뛰어난 무위 탓이다.
그렇다 해도 협의가 아닌 일방적인 통보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경허 제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록 형식에 문제가 있다고는 하나 천지종과 상대하려면 천뢰종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름에 응한 뒤에 형식의 문제를 따지시지요. 이참에 세 종문 간 질서를 세우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고묘 제군이 끼어들었다.
“좋은 말씀이시나 천뢰종 종산으로 간들 종문 간 질서가 세워지겠소?”
“그렇다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끌려다닐 수만은 없지 않소이까?”
경허 제군의 말에 고묘 제군은 반박하지 못했다.
확실히 지금과 같은 천뢰종의 태도는 엄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두 번 다시 연적하 제군의 검령에 맞서고 싶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대종사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 역시 ‘그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손을 썼기에 알 수 있다.
그날 보았던 그의 검령에는 자비가 없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의 귓가로 혜문 존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묘 제군의 말대로 지금 당장 질서를 바로 세우기는 어려울 게요. 그 문제는 내가 따로 태을 존자와 상의해 보도록 하리다. 우리보다는 소요종이 더 곤혹스러울 게요. 천뢰종의 소집에 응하자는 게 대세인 것 같으니 그렇게 하겠소. 그리고 진인과 노조들 중에 연 제군을 ‘대종사’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고 하더이다.”
“…….”
네 명의 제군은 혜문 존자의 시선을 회피했다.
사실 그건 혜문 존자의 책임이 컸다.
천리포 강변에서 연적하 제군을 ‘대종사’라고 부른 사람은 혜문 존자였다.
물론 천뢰종 광성 존자가 압력을 넣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눈치 없게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뢰종을 제외한 누구도 연 제군을 대종사로 인정한 곳이 없소. 나 또한 마찬가지요. 그러니 이후로 대종사라는 호칭을 입에 담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시오.”
“예.”
네 명의 제군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그날 이후로 천태종에서 연적하의 호칭은 제군으로 굳어졌다.
***
소요종과 천태종에 사자를 보낸 연적하는 슬그머니 산을 내려갔다.
광성 존자에게는 ‘천지종을 염탐하러 간다’고 했지만, 실은 남궁연과의 만남이 목적이었다.
그가 남궁연을 찾아가야 할 이유는 많았다.
당장 천지종 연합과 천뢰종 연합의 전쟁이 목전에 닥쳤으니 계획을 들어야 했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물론 보고 싶다는 게 가장 컸다.
다행히 천지종 종산은 소요종보다 천뢰종에서 더 가까웠다.
연적하는 운종술로 부지런히 날아가 하산한 지 보름 만에 이포진에 도달했다.
이포진.
해거름 무렵, 이포진에 도착한 연적하는 느긋하게 번화가를 거닐었다.
무심코 초반객잔으로 걸어가던 연적하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멍청이. 거긴 가면 안 되잖아.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쉬어야 한다고.”
지난번 초반객잔에서 천지종의 제자 하나를 죽였으니 분명히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이포진은 원덕산(천지종 종산)에서 한 시진(2시간) 거리니 천지종의 앞 마당이라 할 수 있다. 적진 앞에서 자신의 행적을 노출할 수는 없었다.
연적하는 초반객잔에서 멀리 떨어진 객잔을 골랐다.
그리고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잠시 여독을 풀었다.
원덕산.
옥녀봉.
밤하늘을 날아가던 야조(夜鳥)가 염화전 지붕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연적하였다.
그는 처마에 거꾸로 매달려 남궁연의 방 창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일월의 차가운 바람이 방 안을 휘저었지만 이내 온기에 스르륵 사라졌다.
남궁연이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천뢰종에서 오는 길이니?”
“네, 소요종보다 훨씬 가까워서 좋네요.”
이윽고 남궁연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연적하 앞자리에 내려놓았다.
“대종사는 어떻게 된 거야?”
“아, 혜문 존자가 자꾸 광성 존자의 영기를 취하라고 하더라고요. 말이 좋아 영기를 취하라는 거지, 나더러 죽이라는 소리잖아요.”
“그렇지.”
남궁연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며 맞장구를 쳤다.
강호에 있을 때나, 구주에서나 한결같이 생명을 중히 여기는 그가 보기 좋았다.
“아무런 은원도 없는 사람을 내가 왜 죽여요. 종사보다 윗 사람이 되면 굳이 그를 죽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서 대종사라는 걸 만들어 봤어요.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잘했어. 그의 영기를 취했으면 득보다 실이 많았을 거야.”
“게다가 그의 영기는 나하고 맞지도 않아요. 난 천애불문비의 생령을 취했잖아요. 생령 때문인지 종사들의 영기가 좋아 보이지 않더라고요.”
“맞아. 그들의 영기는 엄밀히 말하면 사령(死靈)이야. 취하면 취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지게 돼.”
“사령요?”
“이곳 ‘왕들의 하늘’은 범천 욕계의 일부로 욕망에 이끌려 사는 존재들의 세계지. 이곳에서 타인의 영기를 흡수하는 건, 야수가 죽은 고기를 뜯어 먹는 것과 같아.”
“아!”
연적하는 남궁연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도 심통에게 흡자결로 영기를 취하지 말라고 했어요. 왠지 업(業)을 쌓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맞아. 사령을 취하면 업이 돼. 그걸 소멸하려면 애 좀 먹을 거야.”
“누님도 흡자결을 쓰지 않았죠?”
“영약과 내단은 복용했지만 다른 종문 제자의 영기를 취한 적은 없어.”
“참, 누님이 불귀곡에서 태상종과 무극종을 병탄했다죠? 그것 때문에 천뢰종이 발칵 뒤집어졌었어요. 소요종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낄 거예요.”
연적하는 안절부절못했을 태을 존자를 떠올리고 실실 웃었다.
“운이 좋았어. 불귀곡의 지형이 아니었으면 조금 더 애를 먹었을 거야.”
“그래도 누님은 결국 해냈을 거예요.”
“좋게 봐줘서 고마워.”
연적하의 칭찬에 남궁연은 배시시 웃었다.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연적하가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누님, 좀 피곤한데 침상에서 얘기하면 안 돼요?”
“그럴까?”
남궁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피곤하다던 연적하는 그녀를 덥석 안아 올렸다.
***
빙설화 제군의 방에 불이 꺼지자 무결단 단주 무천 진인이 처선 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 즉시 대륜 제군께 알려라. 정체불명의 외인이 빙설화 제군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지난번에 놓친 그 괴인이 다시 찾아온 것 같다.
-예.
처선 진인이 사라지자 무천 진인은 빙설화 제군의 방 창문을 노려보았다.
수호각의 명예를 걸고 이번에는 침입자가 누군지 알아낼 생각이다.
아직은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지만 대륜 제군이 오면 알 수 있으리라.
‘누군지 몰라도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무천 진인은 광명단과 여의단에도 사람을 보냈다.
잠시 후 수호각의 세 개 단이 염화전 뒤편 숲에 모여들었다.
이로써 수호각이 모두 모인 셈이다.
침입자 하나를 잡겠다고 수호각 전체가 동원되었으니 수호각에서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지 알 만하다.
수호각 진인들이 천라지망(天羅地網)의 법진을 완성할 즈음 대륜 제군이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