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683화 (683/1,339)

683회.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연적하는 메누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말처럼 ‘왕들의 하늘’이 죽어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감옥이라면, 어떻게든 자신의 생령을 취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그런 행동을 하다가 말았다.

도대체 왜?

메누아가 연적하를 등지고 돌아섰다.

“왜냐고? 나는 이 세계를 증오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만든 창조신을 증오한다. 그런 내가 창조신의 생령을 내 속에 받아들일 것 같으냐?”

“나한테는 잘된 일이네. 부디 그 마음 변치 마라.”

연적하는 자존감 드높은 메누아와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강한 것은 덤이다.

“너야말로 광명진천에게 당하지 마라. 너를 살려 둔 내 결정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전히 싸가지는 없지만 작별 인사 같은 느낌에 연적하가 물었다.

“이제 가는 거냐?”

“온 적이 없으니 가지도 않는다.”

메누아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녀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

연적하가 황당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메누아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데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도 방문도 닫혀 있는데 메누아는 어떤 수법으로 가 버린 것일까?

“뭐지? 내가 헛것을 봤나?”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심력이 약한 사람은 분명 꿈을 꿨거나 귀신에 홀렸다고 생각할 게다.

“분명히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나갈 때는 유령처럼 사라졌다.

메누아는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 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일까?

‘설마 나를 깨워 준 건가?’

문이 열릴 때 잠에서 깨지 않았다면, 깜짝 놀라서 소리라도 질렀을 게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연적하는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다.

메누아는 누굴까?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떠올리면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천검령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으면 달아나도 열두 번은 달아났다.

분명 지금껏 자신이 만나 보지 못했던 신들 중에 하나이리라.

창조신을 증오하는 신이라니!

‘왕들의 하늘’에 대한 실체를 알아서일까?

‘메누아가 잘못됐다’라기보다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든다.

자신도 이곳에서 아기를 낳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 세계가 싫었으니까.

***

다음 날.

여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심통 진인이 갑자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오늘도 메누아 님이 안 보이네요?”

심통은 언제부터인가 메누아에게 존대를 쓰고 있었다.

연적하가 뚱한 얼굴로 답했다.

“갔어.”

“갔다고요?”

“어.”

“갔다가 다시 온답니까? 아니면 영영 떠난 겁니까?”

“그야 모르지. 메누아가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갈 사람은 아니잖아.”

메누아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신기하게도 천지종의 누구도 그런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심통이 문득 물었다.

“메누아 님은 누굴까요?”

“누구냐니?”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대종사님에게 하대를 쓰는데 어색하다거나, 화가 나지 않아서요. 대종사님도 그래 서 그냥 두고 본 것 아닙니까?”

“심 진인이 보기에는 누구 같아?”

연적하는 심통 정도의 안목이라면 그녀가 누군지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이내 깨졌다.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보통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그런 소리는 누구라도 하겠다.”

그러자 연적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검지산 노조가 끼어들었다.

“종문에는 그런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홉 군주나 여덟 왕들 중 한 분이실 겁니다.”

연적하가 고개를 슬쩍 틀어 검지산 노조의 얼굴을 보았다.

“신이라고?”

“예, 마천이 이렇게 대규모로 침공한 적은 없었습니다. 구주의 운명이 달린 일이니 신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겁니다.”

“저렇게 어린 신이 있어? 이제 열두 살쯤 되어 보이던데.”

“신의 화신(化身)은 그때그때 신의 마음에 따라 변한다고 들었습니다.”

“열두 살은 어떤 의미려나.”

심통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가장 좋았던 때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좋았던 때라고? 심 진인은 그때가 가장 좋았나 봐? 나는 그때가 가장 나빴는데.”

열두 살이면 개처럼 창고에 갇혀 지낼 때다.

구천현녀경을 제외하면 좁고, 칙칙한 기억밖에 없었다.

창고를 생각하니 큰어머니 백미주와 배다른 형제들과 누이가 떠올랐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제는 그렇게 원망스럽지가 않네.”

검지산 노조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치만 살폈다.

심통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시원하게 복수를 해서 그런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복수를 할 때는 넉넉하게 해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고요.”

“과연 그래서 그랬던 거군.”

“당연하지요. 복수에 연연하지 마라, 그런 거는 다 개소립니다. 능력이 안 되니까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지요. 대종사님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가벼우십니까?”

“…….”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괴로워했으리라.

“메누아의 열두 살은 어땠을까?”

이번에는 심통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당장 눈앞의 연적하만 하더라도 그 시절을 힘들게 보냈기 때문이다.

젓가락으로 음식을 헤집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좋았으면 좋겠네. 나빴던 시절의 모습으로 다니는 거라면 끔찍하잖아.”

메누아가 ‘신은 감정이 없다’고 했지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만 해도 그녀는 창조신을 증오한다고 했었다.

“거짓말쟁이였네.”

어쩌면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연적하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

유월 초하루.

한산주 위례.

천지종 종산 원덕산.

정오.

연적하와 사십오 인의 천지종 고수들은 마침내 천지종 종산으로 돌아왔다.

천수각의 각주인 곡분조 노조가 산 초입에서 대종사 일행을 맞이했다.

“곡 노조가 웬일로 마중을 다 나오네?”

“안학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왜? 내가 길을 모를까 봐?”

연적하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 괜히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광명진천 하나에 천지종 제자들이 허둥지둥거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광명진천님께서 안학궁에서 대종사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학궁에서? 그럼 빙 제군은?”

안학궁은 빙설화와 자신의 거처였다.

아무리 광명진천이 최고신이라 해도 빙설화가 같은 공간을 쓰려 할 리 없다.

“빙 제군께서는 염화전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거야?”

그러자 곡분조 노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큰일 날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빙 제군님께서 염화전이 그립다고 하시며 잠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말이 그리운 거지 광명진천이 부담스러워 옮긴 것이리라.

그걸 뻔히 알면서도 광명진천을 위해 변명해 주는 곡분조 노조가 얄미웠다.

“곡 노조.”

“예?”

“줄 똑바로 서. 누구와 생활을 오래할지 잘 생각해 보라고.”

“예? 예.”

곡분조 노조는 고개를 숙일 뿐 변명하지 않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지금 자신의 상황이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대종사가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지금은 광명진천이 우선이었다.

안학궁.

곡분조 노조는 대종사인 연적하를 마치 손님인 것처럼 안학궁으로 모시고 갔다.

주객이 전도된 모습에 연적하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는 무려 이 세계 최고의 신.

곡분조 노조가 광명진천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잠시 후 대전 앞에 도달한 곡분조 노조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대종사님 도착하셨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곡분조 노조는 익숙한 듯 연적하에게 안쪽을 가리켜 보였다.

똥 씹은 얼굴로 서 있던 연적하는 쌩하고 곡분조 노조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상석에 삼십 대로 보이는 미중년이 앉아 있었다.

상대와 눈빛이 마주친 순간 연적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윽!’

수백 개의 화살에 전신이 관통당한 느낌이다.

연적하는 반걸음 뒤로 물러난 뒤에야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이런 걸 신격(神格)이라고 하는 걸까?

공포와 죄스러움, 수치 등의 기이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낯선 감정의 홍수 속에서 연적하가 당황해할 때, 광명진천이 말했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편히 앉거라.”

그의 음성을 듣고서야 연적하는 기이한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연적하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고작 눈빛 한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칼부림이라도 한 것처럼 등줄기가 축축했다.

연적하가 자리에 앉자 광명진천이 말을 이어 갔다.

“아데 살테나 항은 구주에서 삼대 미항(美港)으로 불리는 곳이지. 너의 눈에는 어떠해 보이더냐?”

“아름다웠습니다.”

불편한 마음과 달리 연적하의 입에서 존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광명진천이 내뿜는 기운은 만물을 압도했다.

“너는 누구냐?”

뜬금없는 질문에 연적하가 고개를 쳐들었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광명진천의 눈을 마주하자 가슴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저는 수약주…….”

“너의 진정한 내력을 묻는 것이다.”

순간 연적하는 불현듯 메누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했을 때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돌이켜 보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도 아는 걸 최고의 신인 광명진천이 모를 리가 없다.

‘다 알고 그런다 이거지?’

연적하는 어깨를 펴고 턱을 치켜세웠다.

“제 이름은 연적하. 남직례성 여강현에 있는 석경장의 장주입니다.”

광명진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구주에 남직례성이라는 성이 있느냐?”

“없어요.”

“허면 어디에 있는 성이냐?”

“다른 세계요. 이곳 ‘왕들의 하늘’보다 낮은 세계라고 하더라고요.”

“하계(下界)에서 왔다는 말이렷다?”

“예.”

광명진천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문 고수들이 오가다가 들었다면 기함을 할 일이다.

하지만 광명진천은 관심 없다는 얼굴로 다른 세계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연적하는 태양 같은 그의 눈동자보다 무심한 태도에 더욱 놀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닌가 봐요?”

“불가능한 일이 아닌데 놀라서야 되겠느냐.”

“아…….”

새삼 연적하는 광명진천이 최고신 중에 하나임을 깨달았다.

하기야 신에게 놀랄 만한 일이 있을지나 모르겠다.

생각에 잠겨 있는 연적하의 귓가에 광명진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마천의 구주 침공을 예견하였다지?”

“아니요. 제가 예견한 게 아니라 몰록이 죽기 직전에 말한 건데요?”

그러자 광명진천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종문 고수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다고 들었다.”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 아니었으니까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른 뜻요?”

연적하는 광명진천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광명진천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너에게 다른 뜻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마신과 동행을 하였느냐?”

“예? 제가 마신과 동행을 했다고요?”

연적하가 황당한 눈으로 광명진전을 보았다.

마신과 동행을 했다니?

그게 무슨 고약한 누명인지 모르겠다.

언젠가 ‘삼천의 신당’에서 본 마하수라천(마신)은 척 봐도 아수라였다.

자신은 맹세코 아수라를 닮은 존재와 동행을 한 적이 없다.

그랬다면 천지종의 고수들이 먼저 난리를 쳤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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