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704화 (704/1,339)

704회. 어느 편이 구주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느냐?

광명진천은 문득 천지종에서 처음 연적하와 만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날, 그는 다른 종문 고수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분명 신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비록 다른 종문 고수들처럼 굴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격이 다른 존재로 받아들였다.

최근까지도 그랬다.

광명안을 깨트린 뒤에도 그런 경외 감은 잃지 않았다.

잡스러운 일로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지만 저런 눈빛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이전과 달랐다.

‘흠! 며칠 전 백운호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동안 곡분조 노조를 사이에 두고 소소하게 신경전을 벌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동산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광천사 베레드와 달리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는 자신과 접점이 조금도 없는 마족이다.

연적하의 변화가 궁금했지만 자존감이 강한 광명진천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분수를 모르고 기어오르면 그때 가서 밟아 줘도 그만이니까.

“정말 심 진인을 치료할 수 있다고요?”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치료 방법이 있다면 처음부터 말해 줬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 전에 물었을 때는 분명히 치료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다.

그런 지 얼마나 지났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니?

가만 보니 심통의 목숨을 놓고 흥정이라도 하려는 모양새다.

“나는 방법이 있다고 했을 뿐이다.”

광명진천은 운만 띄우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본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연적하는 광명진천의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방법이 뭔데요?”

“천계의 중심에 ‘생명의 나무’가 있다. 그 열매를 취하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천계라면 천족들의 땅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

“천계가 어디 있는데요?”

“사벌주를 지나 북쪽으로 사막을 한 달쯤 가로지르면 천계의 입구가 나온다. 찾아가서 어찌해 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왜요?”

“‘생명의 나무’는 천족들에게 종문의 성물만큼이나 신성시된다. 그 열매 또한 성물과 같은 것으로 여기지. 종문에게 성물을 달라고 하면 뭐라고 할 것 같으냐?”

“…….”

연적하는 답하지 않았다.

그 열매가 성물 대접을 받는다면 달라고 한 순간 칼이 날아올 게 분명했다.

“그 열매를 구할 수 있나요?”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천족에게 내어 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성물처럼 신성시하는 열매와 맞바꿀 만한 게 뭐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물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주에 그런 게 있나요?”

“굳이 비슷한 것을 말하라면 한 가지가 있기는 하지.”

“그게 뭔데요?”

“천문(天門).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구주의 성물과 같은 것이라고.”

“…….”

연적하가 기막힌 얼굴로 광명진천을 보았다.

종문에서 천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면서도 저런 소리라니?

광명진천은 그런 연적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구주의 평화를 위해서도 천문은 없는 편이 낫다. 천문이 없다면 마천도 침공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천문을 천계에 내어 준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모두를 위한 최선을 생각해 보거라. 너는 ‘생명의 나무’ 열매가 필요하지 않으냐? 아, 그저 동향 출신이라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천문과 바꾸자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이 세계 존재도 아닌 네가 그토록 천문에 연연하다니 놀랍구나. 심 진인이 아니라 구주의 인간을 생각해 보거라. 천문이 종문에 없으면 마천의 침공도 없다. 천문이 종산에 있는 것과 천계에 있는 것, 어느 편이 구주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느냐?”

“…….”

그 질문에는 연적하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피난민들을 생각하면 그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아니 맞다.

구주에서 천문이 사라지면 마천도 더 이상 구주를 침공하지 않을 테니까.

머뭇거리고 있는 연적하의 귓가로 광명진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인간이 천문을 지킬 수 없다면 천계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너도 잘 생각해 보거라. 어느 것이 정말 구주를 위한 것인지. 가 봐라.”

이어지는 축객령에 연적하는 맥없이 돌아섰다.

심통과 천문.

모두 그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심통과 구주를 위해 천문을 포기하라니 기가 막힐 뿐이다.

터덜터덜 밖으로 나온 연적하를 곡분조 노조가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시간을 맞춰 왔는지 귀신같은 움직임이다.

“광성 존자께서 대종사님을 진천궁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벽력궁 다음이 진천궁이니 그러는 모양이다.

연적하는 심통과 함께 있으려다가 대종사의 신분을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광명진천에게 벽력궁을 내주고 무망각으로 가면 모양새가 이상해지는 까닭이다.

***

동산현의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의 군세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물과 마귀, 마족 들이 천관산맥을 넘어온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가 아니라 마신의 군세라 불렸다.

남대천과 북대천을 중심으로 동부 지역은 마천의 세상이 됐다.

영천주의 절반이 마천에 넘어간 것이다.

천뢰종에 모인 종문 고수를 빼면 서부지역에는 더 이상 인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종문 고수들은 마신이 군세를 끌어 모으느라 움직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그랬다.

마신의 군세가 영천주의 절반을 채우자 종문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

그에 맞서 광명진천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긴급회의를 열었다.

벽력궁.

이른 아침부터 대전에 이십여 명의 고수들이 모였다.

광명진천과 대종사 연적하, 세 종문(태상종, 천지종, 천뢰종)의 대표들이다.

여전히 인자한 광명진천과 달리 종문 고수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천뢰종 종사 광성 존자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말했다.

“이미 영천주의 절반이 마물로 뒤덮였습니다. 마신의 군세가 오십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뇌행각의 제자들에게 더 이상숫자를 세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대전을 짓눌렀다.

세 종문의 제자를 탈탈 털어 봐야 일천도 안 된다.

일천 대 오십만.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엄청난 숫자다.

태상종의 진표 존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 마신과 오십만의 군세라니. 구주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거늘…….”

세 종문의 대표들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중앙에만 오십만이지 북쪽과 남쪽의 상황은 아직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관산맥이 웅천주, 영천주, 수약주를 길게 휘감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쪽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천뢰종의 광성 존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광명진천님과 대종사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마천의 군세가 저리도 강한데……. 싸움이 되겠습니까?”

“…….”

대전에 모여 있던 종문 고수들의 이목이 광명진천에게 모아졌다.

그러자 광명진천은 연적하에게 질문을 돌렸다.

“대종사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이 싸움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죠.”

연적하는 솔직한 사람이라 자신의 느낌대로 말했다.

그러자 광명진천이 다시 물었다.

“허면 북으로 사벌주, 중앙의 하서주, 남으로 무진주까지 후퇴하면 승산이 있겠느냐?”

사벌주, 하서주, 무진주는 구주의 서쪽 끝이다.

그 뒤로는 더 물러날 곳이 없으니 종문의 마지막을 가정한 셈이다.

하지만 땅끝까지 후퇴한다고 종문 고수의 숫자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일천 대 오십만에는 변화가 없다.

역사 이래 이런 일이 없었다는 진표 존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과거 마천이 이 정도로 쳐들어왔다면 구주는 진즉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천은 지금까지 구주가 멸망할 정도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천계가 끼어들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천계가 끼어들면 자칫 구주에서 ‘태고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건 마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인간이 천계를 도우면 마천에도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런 이유로 마천은 적정선을 지켜 왔다.

마천의 구주 침공 이면에는 그런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수십만 년 동안 지켜 온 그 불문율이 깨졌다.

세 곳으로 치고 들어온 것도 부족해 그 숫자를 ‘태고의 전쟁’ 수준으로 늘려 버린 것이다.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구주의 끝까지 후퇴해도 마천의 압도적인 군세를 당해 낼 수 없어서다.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허면 어쩔 생각이냐?”

“모르겠는데요? 광명진천님에게는 묘수가 있나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뭔데요?”

연적하가 관심을 보이자 잠잠하던 광명진천의 눈이 한차례 번득였다.

“천계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 죽어 가던 종문 고수들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사실 이 세계에서 마천과 대등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곳은 천계뿐이었다.

천족 출신인 광명진천이 나서 준다면 천계도 움직일 게 분명했다.

광명진천이 천계를 거론하자 연적하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심통의 치료에 이어 벌써 두 번째로 천계를 들먹이고 있었다.

‘설마 천문을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불길한 예상은 왜 이렇게 어긋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천계가 개입하면 구주에서 ‘태고의 전쟁’이 벌어지는 셈이다. 천계가 나서면 종문도 마천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입게 될 천계의 피해는 종문에서 보상해야겠지. 그렇지 않으냐?”

“하등한 인간 세상에서 천계에 내 줄 만한 게 있을까 모르겠네요?”

“천문이라면 천계에서도 흔쾌히 받아 줄 것이다.”

“…….”

대전의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천문과 성물은 종문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주의 종문들이 피 흘리며 싸운 것도 천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최고신인 광명진천의 말이라 해도 그러겠다고 답할 종문 고수는 없었다.

광명진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종문은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은 종문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마천으로 넘어간 천문을 되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천문에 대한 마천의 집착을 생각하면 그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니 사태를 파악한 종문이 천문을 스스로 바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조만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회의는 흐지부지 끝났다.

벽력궁을 나간 세 개 종문의 고수들은 자연스럽게 진천궁으로 이동했다.

***

진천궁 대전.

세 종문의 고수들은 눈치만 살필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건 상석에 앉은 대종사 연적하도 마찬가지였다.

마천의 군세가 몇만 수준이면 들이대 보기라도 하겠지만 오십만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천문을 내어 줄 수도 없는 노릇.

남궁연과 강호로 돌아가야 하는 그의 속도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가장 먼저 천뢰종의 광성 존자가 입을 열었다.

“허어! 광명진천님께서 천문을 요구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아홉 종문에게 천문이 어떤 의미인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텐데.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기분입니다.”

광성 존자는 동조를 구하듯 태상종의 진표 존자를 보았지만 진표 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광성 존자는 모두가 자신의 마음과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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