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회. 무엇이든 물어봐 주십시오
연적하는 뱃전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항구를 출발한 지 한 식경(약 30 분)쯤 지났지만 아직 백리하는 고요했다.
바다 같은 광활한 강물이 익숙한 걸 보니 자신도 구주 사람이 다 된 모양이다.
천문을 내주면서까지 구주를 지키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떨어진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만약 이 세계가 뒤틀린 욕망에 지배당하는 곳만 아니었다면, 그냥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구석이 하나씩 있었다.
어디 사람뿐이랴.
광명진천처럼 자타가 신이라 칭하는 존재들도 이상했다.
한마디로 위에서부터 밑바닥까지 정상이 아니다.
당연한 게 이상한 일이 되고, 이상한 일이 당연하다는 듯 통용됐다.
자신도 꽤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평범에도 들지 못하니 말 다 했다.
‘돌아가야 된다니까.’
자신의 아이를 이런 세계의 방식에 물들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이 전쟁을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연적하가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 앞에서 전의를 가다듬고 있을 때다.
천뢰종의 광성 존자와 천태종의 진표 존자가 그의 뒤로 다가왔다.
이윽고 광성 존자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대종사님.”
“왜요?”
연적하가 두 존자와 눈을 맞췄다.
가만 보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들이다.
광성 존자가 먼저 운을 뗐다.
“저희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말입니다. 뭔가 조금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잘못돼요?”
“저 대장기(大將旗) 말입니다. 저게 이곳에 걸려 있으면 마족들의 집중 공격을 받지 않습니까? 어째 종문이 이 전쟁의 중심처럼 돼 버린 것 같아서요.”
눈치를 보던 진표 존자가 설명하듯 끼어 들었다.
“노사와 진인 들은 마귀들의 상대도 못 됩니다. 마물이라면 겨우 평수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요. 마귀들과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노조들뿐인데 노조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이 전쟁의 중심에 설 수도 없거니와, 서서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죠.”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종족의 숫자나 능력을 봐도 천족이 중심이고 종문은 보조에 불과했다.
연적하가 동감을 표하자 진표 존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런데 저 대장기로 인해 저희가 수상전의 중심이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와 마신의 목표가 될 거라지만, 어디 그들만 오겠습니까? 온갖 마족들이 한 번씩은 찔러 볼 텐데……. 이러다 ‘태고의 전쟁’에 휘말려 저희들만 죽어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광성 존자가 한마디 덧붙였다.
“구주를 돕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실상은 저들이 오랜 세월 벌여 온 ‘태고의 전쟁’에 저희가 이용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
연적하의 입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것도 또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태고의 전쟁’에서 쓰던 대장기를 종문의 배에 달았으니 적들의 주요 목표가 될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 데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
자신이 광명진천의 날개를 자르지 않았다면 대장기는 그의 배에 걸려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신을 상대해야 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진표 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우리 종문이 이 전쟁을 이끌어 가는 모양새라……. 우려가 됩니다. 세 종문의 제자들도 불안해하고 있고요.”
광성 존자가 아쉬운지 한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천족이 이선으로 물러나면 천문을 다 내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천문의 이야기가 나오자 연적하도 공감이 됐다.
중요한 일은 종문이 다 하는데 천문까지 내준다는 건 좀 너무하다 싶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말을 꺼내기도 뭐했다.
무엇보다 천족의 협조가 없이는 마신과의 전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연적하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대장기를 천족의 배로 옮기라고 할까요? 그럼 나도 그쪽으로 옮겨타야 할 텐데. 괜찮겠어요?”
“음…….”
“그건…….”
두 사람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머뭇거렸다.
솔직히 대종사가 없는 수상전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종사는 종문의 상징이자 천족과 인간 중에 최고 고수인 까닭이다.
하지만 대장기를 걸면 적의 집중 공격을 받는다.
고민하던 광성 존자와 진표 존자는 결국 종문의 안전을 택했다.
머뭇거리던 광성 존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장기를 천족의 배로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광성 존자와 진표 존자는 차마 대종사에게 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내가 대장기와 함께 천족의 배로 옮길게요. 나도 우리 배가 마족에게 집중적으로 노려질 것 같아서 불안하기는 했어요.”
연적하가 조금 떨어져 있던 곡분조 노조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곡 노조.”
“예.”
“우리가 하는 얘기 들었지?”
“예. 대장기를 천족의 배로 옮기기로 했다고요.”
“사령선으로 가서 총참모 벨 소니아에게 그대로 전해. 천족의 배로 대장기를 옮기면 나도 그쪽으로 옮겨 간다고.”
“예.”
곡분조 노조가 즉시 사령선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천족 하나가 와서 대장기를 회수해 가까운 천족의 배에 내걸었다.
연적하는 뱃전에서 멋쩍은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천족이 종문을 ‘태고의 전쟁’에 이용하려 한다는 건 그저 존자들의 오해였던 모양이다.
연적하가 뒤쪽으로 고개를 힐끔 돌렸다.
돛대 위 휘날리던 대장기의 자리가 휑해 보인다.
잠시 잠깐 대장기가 매달렸던 자리 인데도 빈자리가 커 보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눈에 띈다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세상사의 오묘한 이치가 담겨 있다.
저 혼자 감상에 빠져 고개를 주억거리던 연적하는 새 대장선을 향해 훌쩍 날아올랐다.
잠시 후 연적하는 대형 목선의 뱃머리에 가볍게 내려섰다.
미리 언질을 받고 갑판에 나와 있던 천족들이 그를 향해 우르르 몰려 갔다.
연적하는 천족의 선두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원정군 서부군 사령관 아나타시오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종사님을 저희 배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부군 사령관 아나타시오는 까칠하던 전과 달리 매우 정중했다.
그는 어리석은 고집쟁이가 아니다.
대종사는 총참모 벨 소니아가 마신의 맞상대로 특별히 선정한 사람.
광명진천을 대신한다는 것은 즉, 대종사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그의 환대에 화답했다.
서부군 사령관 아나타시오가 어깨 높이로 손을 들어 살짝 까닥였다.
그러자 서부군 사령관 뒤쪽에 서 있던 은발의 미녀가 연적하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서부군 사령관 아나타시오가 웃으며 소개했다.
“부관인 블레이즈라고 합니다. 대종사님이 승선해 계시는 동안 곁에서 시중을 들어줄 겁니다.”
연적하가 힐끔 쳐다보자 은발의 미녀가 묵례를 올렸다.
“블레이즈입니다.”
“연적하예요.”
두 사람의 통성명이 끝나자 서부군 사령관 아나타시오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하던 일이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제가 필요하면 부관을 통해 연락 주십시오. 그럼 이만.”
서부군 사령관 아나타시오는 잡을 틈도 없이 묵례를 하고 돌아갔다.
그를 따라왔던 천족 고수들이 블레이즈만 남기고 우르르 떠나갔다.
밀물처럼 몰려온 천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한순간 허전할 정도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연적하에게 블레이즈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봐 주십시오. 아는 것이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적하가 곁에 남아 있는 블레이즈를 보았다.
딱딱한 말투에 어울리게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마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이 배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나 돼요?”
종문의 전투력이 약해서 천족의 배로 갈아탄 연적하는 그것부터 물었다.
“전투력이라고 하심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그에 맞는 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음, 그러니까 마족이나 마귀들과 싸워도 문제 없는 전투력인지 궁금해서요.”
“저희 서부군은 강군(强軍)으로 마족과의 전쟁에 선봉을 서 왔습니다. 더구나 이 배에는 서부군의 정예가 타고 있습니다. 마귀와 마족이 떼로 몰려와도 격살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혹시 대장기 때문에 승선원들의 안전이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인간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아…….”
연적하는 멋쩍은 얼굴로 돌아섰다.
아무래도 종문이 안전상의 이유로 대장기를 포기했다는 게 알려진 모양이다.
같은 사람이라고 조금 민망했다.
그는 뱃머리에 우뚝 서서 강바람을 정면으로 받았다.
화끈하던 열기는 이내 식었다.
이런저런 잡념들도 세찬 강바람에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마침내 머리가 명경지수처럼 맑아졌을 때, 수평선에 까만 점들이 나타났다.
뒤쪽에서 블레이즈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신의 선단(船團)이군요.”
왠지 긴장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오랜 세월 ‘태고의 전쟁’을 치러 온 천족도 막상 마신의 군세를 보니 긴장이 되는 걸까?
사방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뿌우우우-.
뿌우-.
적막하던 갑판이 갑자기 발소리로 뒤덮였다.
천족들이 창칼을 들고 갑판 위에 도열하자 발소리는 이내 사그라졌
‘강군’에 ‘정예’라더니 정말 움직임 하나는 일사불란(一絲不亂)했다.
반 시진(1시간)쯤 지나자 마신의 선단은 백 장(약 300미터)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때 사령함의 돛대에 녹색 깃발이 올라왔다.
그러자 절반에 가까운 이십 척의 배가 천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배의 측면이 전방으로 향하자 갑판 위에 있던 화포(火砲)가 불을 뿜었다.
펑! 펑! 펑! 펑-!
그러나 기세 좋게 날아간 포탄은 아쉽게도 마신의 선단에 미치지 못했다.
스무 개의 포탄이 백리하에 퐁퐁 처박혔다.
“아!”
연적하가 탄식하자 뒤에서 블레이즈가 말했다.
“포신을 조금 세우면 될 겁니다. 지금은 각도를 계산하기 위해 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화포가 불을 뿜었다.
펑! 펑! 펑! 펑-!
과연 포신을 세웠는지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날아가는 게 보였다.
‘응?’
연적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포탄이 보인다.
보이는 건 쳐 내거나 막을 수 있다는 소리다.
쐐애애액-.
꽝! 꽝!꽝! 꽝-!
마신의 선단에서 날아오른 마귀들이 고유의 병장기로 포탄을 박살 냈다.
마귀들은 쳐 내지도 않고 보란 듯 아예 포탄을 부숴 버렸다.
포탄이라고 해 봐야 쇳덩어리에 불과한지라, 마귀들의 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보고 있던 연적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 쪼개 버렸는데요?”
“…….”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으라던 블레이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사실 화포는 있는 거니까 써 본 걸 겁니다. 그보다는 충격(衝激)이 더 효과적이지요.”
“충격요?”
“한눈에 봐도 마신의 배들은 급조해서 만든 티가 납니다. 이쪽에서 들이박으면 손쓸 틈 없이 깨지고 말 겁니다. 그럼 끝나는 거죠.”
“아하!”
연적하는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보십시오. 붉은 기가 올랐습니다.”
블레이즈의 말에 연적하는 사령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언제 교체했는지 돛대 위로 피처럼 붉은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스무 척의 배가 다시 전방으로 선수(船首)를 돌렸다.
이윽고 돛을 올린 마흔네 척의 배가 쾌속하게 정면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