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회. 전쟁과 토벌의 차이
세 명의 금의위 백호들이 하시진 천호를 살피기 위해 달려가려 할 때다.
연적하가 호랑이처럼 그들을 덮쳤다.
곧이어 주열화, 금서인, 반호상도 일 장(약 3미터)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연적하는 기절한 천호와 백호들을 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보다 못한 삼보절명 당운망이 슬쩍 다가가 말했다.
“아예 밟아 죽이시게요?”
“교훈만 내리는 거야.”
“곧 갈 것 같은데요?”
그제야 연적하는 금의위들에게서 떨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번만 더 밟으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다.
“도사님들에게 산문 밖에 내다 버리라고 해.”
“예, 예.”
산문 밖에 금의위와 천호소 군사들이 있으니 데려다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새롭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구천노도 심통이 금의위에 잡혀 있던 청성파 장문인과 청성오수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원양 진인이 청성오수들과 함께 연적하에게 다가가 고마움을 표시했다.
“연 대협.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 청성파를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에이, 별말씀을. 별궁을 빌려준 것으로도 충분해요.”
“그런데 저들은 누굽니까?”
원양 진인의 손가락이 마당에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금의위 놈들이에요. 마침 잘 오셨네요. 저놈들을 산문 밖에다가 버려 주세요.”
“예,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원양 진인이 곁에 있던 청성오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청성오수가 즉시 금의위들에게 다가갔다.
금의위를 일으켜 세우려던 자운산인이 원양 진인에게 말했다.
“장문인, 뼈가 부러져서 들것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청궁으로 가서 수습할 사람들을 보내주겠다. 그때까지 너희가 그들을 지켜보도록 해라.”
“예.”
잠시 후 상청궁으로 돌아간 원양 진인은 삼대제자들을 골라서 별궁으로 보냈다.
정오 무렵, 삼대제자들이 금의위를 들것에 싣고 청성산을 내려갔다.
***
청성파 산문 밖.
천호소 지휘 막사.
고종인 부천호를 비롯한 천호소 무관들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금의위 북진무사를 비롯한 금의위의 천호, 백호들이 모두 부상을 입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우리 천호소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황 장군님께서 거동은 물론 물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기탄 없이 의견을 말해 보거라.”
고종인 부천호의 말에 무관 양달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금의위와 우리 천호소의 군사들로는 연적하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금의위와 다른 천호소의 지원이 오 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곳에서 지원을 기다리자?”
“금의위는 백호 한 사람과 총기들을 빼고 거동조차 하기 어려운 형편이 아닙니까? 결국 우리 천호소만으로 연적하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천호소의 힘이면 칠파일문에 속한 문파 하나쯤은 무너뜨릴 수 있다. 너는 연적하가 칠파일문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머뭇거리던 양달화가 답했다.
“천호소 전체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겠습니다만. 보십시오. 연적하는 교활하게 지휘관들만 노려 금의위와 천호소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다음에 또 청성파로 진군하면 부천호님이 황 장군님처럼 될 것입니다. 지금은 무관들도 앞에 나서기를 꺼려 하는 상황입니다.”
고종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의 말처럼 그다음 목표는 자신이 될 게 분명했다.
“다른 천호소가 동원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그때는 연적하도 생각을 달리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천호소들이 출병하려면 병부(兵符)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가 되면 황실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될 겁니다. 연적하가 역도 하나를 감춰 준 게 아니라, 진짜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진짜 대역죄인이라…….”
고종인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천호소까지 동원됐지만 아직은 연적하에 대한 죄명이 불분명했다.
연적하는 여자 하나를 돌봐주었을 뿐이다.
무림인들의 호협한 기질을 생각하면 그건 역모가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불상사다.
하지만 황실에서 금의위와 천호소 무장(武將)을 상하게 한 죄를 묻는다면 말이 달라진다.
일개 천호소가 감당할 일이 아니게 된다.
그때가 되면 도지휘사, 아니 도독이 개입할지도 모른다.
양달화도 그걸 지적했다.
“도독이나 도지휘사가 나서면 연적하는 자신의 죄를 고하고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굳이 저희가 나서서 연적하의 칼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인가?”
“예, 연적하가 청성산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적하는 청성파의 사람이 아니다. 언제든 청성파를 떠날 수 있음을 모르는가? 그때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그와 싸워야 한다.”
어차피 연적하의 칼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러자 양달화가 히죽 웃었다.
“저희는 연적하의 움직임만 확인하면 됩니다. 북진무사와 황 장군께서도 실패한 싸움을 저희에게 강요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제야 고종인은 양달화가 말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연적하에 대적하려 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소리다.
생각해 보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결국 황 정천호의 전철을 따르게 될 터였다. 고종인이 무관들을 둘러보았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말하라.”
“…….”
그러나 무관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양달화처럼 나서지 않았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다.
이미 정천호와 북진무사까지 당한 터라 문책이 두려워 기피하는 것이다.
군문에서 닳고 닳은 고종인 역시 그런 무관들의 마음을 짐작했다.
‘쯧쯧! 한심한 놈들. 머리를 써도 꼭 그런 쪽으로만 쓰지.’
그러고 보면 양달화가 대단한 거다.
실패한 작전에서 하급 무관이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밝혔으니 말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당분간 양달화의 의견대로 하겠다. 병부에서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청성산을 봉쇄한다. 이 시간 이후로 도사들의 출입은 허하되 일반인의 출입을 금해라.”
그는 연적하가 생활에 불편을 느껴 하산할까 봐 도사들의 출입은 막지 않았다.
***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청성산에서 벌어진 연적하와 천호소의 대치는 이내 사천성에 퍼졌다.
연적하의 행보를 두고도 여러 말이 나왔다.
그의 호협함을 두둔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호천맹조차 유명교를 인정한 마당에 홀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천호소는 나라를 지키는 방패다.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천호소와 싸워서는 안 된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녹림 출신이 어딜 가나.”
그런 세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연적하는 청성파에서 귀빈 대우를 받았다.
한편 청성파는 연적하와 관부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금의위 북진의 태도는 완강해서 청성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십일월 보름.
마침내 도지휘사 구시우가 사천성의 천호소 네 개를 이끌고 청성산에 도착했다.
사천성에 주둔하고 있던 다섯 개 천호소가 집결한 셈이다.
오천오백여 명의 중무장한 군사가 청성산 일대를 빽빽하게 둘러쌌다.
도지휘사의 지휘 막사.
해거름 무렵, 다섯 개 천호소의 깃발이 세워진 도지휘사의 막사로 무장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팽주에 주둔하고 있던 정천호 황지원도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로 참가했다.
구시우가 정천호들 사이에 앉아 있는 황지원을 힐끔 보았다.
퉁퉁 불어 터진 만두 같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구시우는 저도 모르게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변방에서의 전투에서도 저렇게 흉한 꼴을 본 적이 없는데 사천성에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황 정천호. 아직 몸이 낫지 않은 것 같은데 좀 더 쉬지 왜 나왔나?”
“패장(敗將)이 무슨 염치로 쉬겠습니까? 백의종군이라도 할 각오로 왔으니 물러가라는 명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끙! 내가 너를 위해 그러는 줄 아느냐? 네 얼굴을 보고 다른 장수들이 겁먹을까 봐 그런다.’
하지만 구시우는 차마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본심과 달리 황지원을 칭찬했다.
“훌륭하군! 황 정천호야말로 장수의 표본이야. 실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하지 않던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게.”
“…….”
잠시 다섯 명의 정천호를 둘러보던 구시우가 허리춤에서 고색창연한 검을 뽑았다.
“황상께서 나에게 이 장군검을 하사하시며 말씀하셨다. ‘천호소는 나라의 근간이다.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자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나 역시도 황상의 말씀에 동의한다. 천호소를 해치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해치는 것과 같다. 하여 제장들에게 묻겠다. 우리 천호소가 무인 하나에게 농락당할 정도로 약한가?”
“아닙니다!”
다섯 명의 정천호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힘찬 대답에 구시우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장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다. 청성파를 가루로 만들어도 좋으니 만고의 역적, 연적하를 죽여라. 황상께서 연적하의 머리를 원하신다. 가능하겠는가!”
“가능합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소장이 앞장서겠습니다!”
공훈에 목말랐던 정천호들이 경쟁하듯 한마디씩 쏟아 냈다.
패장인 황지원만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락펴락 할 뿐이었다.
소란이 가라앉자 구시우가 황지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싸움에 앞서 적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상대가 비록 하찮은 한 사람의 무인일지라도 그렇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황 정천호. 지난번 연적하와의 싸움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듣고 싶군.”
“예.”
황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지휘사와 정천호들에게 그날의 일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그러나 양동작전은 십전무후 남궁연의 높은 무위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알려진 바와 달리 십전무후의 무위는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처음인지 정천호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도지휘사인 구시우는 이미 알고 있었던지라 놀라지 않았다.
황지원의 말이 계속됐다.
“지난 싸움에서 연적하는 지휘관을 노렸습니다. 금의위의 북진무사와 천호, 백호들, 그리고 소장을 이런 꼴로 만들었지요. 지휘관이 당하자 금의위와 천호소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 말에는 구시우도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싸움이 일어나면 자신도 황지원처럼 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황지원이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정천호들 모두 전쟁 경험이 많지만 무림 고수와의 싸움은 처음이다.
그런데 하필 상대가 어검비행과 이기어검의 고수라니!
당황한 정천호들이 술렁거릴 때 구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황 정천호가 싸움에서 패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뜻밖의 말에 정천호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지휘사를 향했다.
“전쟁에 준하는 자세로 임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황 정천호는 토벌하듯 연적하와의 싸움에 임했다. 제장들은 그 차이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