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819화 (819/1,339)

819회. 뜻대로 살기 어렵네요

청성파 산문 앞 서촉관(西蜀館).

청성산에서 동유수 남진무사와 작별한 연적하는 곧바로 객잔으로 돌아갔다.

언제 나왔는지 식당에는 심통과 당운망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별채로 가려던 연적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당운망은 얼른 심통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적하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심통이 말을 걸었다.

“공자님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면서요? 주인에게 물으니 풍채 좋은 중년 남자와 나갔다고 하던데.”

연적하가 빈 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동유수 남진무사가 찾아왔더라고.”

“아! 개봉에 있던 그 금의위요?”

“어.”

그러자 당운망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개봉의 금의위가 여기까지는 왜 왔답니까? 개봉이면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

청성산에서 개봉까지의 거리는 이천오백 리(약 천 킬로미터) 이상이다.

단지 얼굴만 보러 왔을 리가 없다.

당운망은 그가 청성산에서 도지휘사의 군대를 격파한 일로 찾아왔다 생각했다.

“황제의 심부름으로 온 거야.”

연적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차를 후후 불며 홀짝거렸다.

당운망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왜요? 황제가 뭐랍니까?”

“자기를 좀 도와 달라네? 그럼 나한테 생사여탈권을 주겠대.”

“예에?”

뜻밖의 답에 놀랐는지 당운망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러자 연적하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한마디 했다.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 하마터면 차 엎지를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 제가 흥분했나 봅니다. 황제가 투항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도와 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나중에 자세히 가르쳐 줄게. 이런 데서 할 말이 아니야.”

연적하는 말을 아꼈다.

아무리 그라도 황제와 천외이선에 대한 비사를 이런 객잔에서 떠벌릴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른 심통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 말까지 나올 정도면 금의위나 도지휘사와 더는 싸우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러겠지. 설마 도와 달라고 하면서 공격하겠어? 그럼 사람도 아니지.”

“잘됐네요.”

심통은 한시름 덜어 낸 표정이었다.

사실 그도 죄 없는 위소의 군사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적하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채.

별채로 돌아간 연적하는 아기가 잠든 틈에 모녀를 잠시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동유수 남진무사가 한 말을 남궁연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생각해 보고 답해 주겠다고 했어요. 누님과 아기만 두고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황실과는 일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잘했어.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 줄 필요 없어. 이제 보니 너의 무위를 떠보기 위해 청성산을 공격하게 했던 것 같네.”

“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도지휘사를 보낸 것도 황제고, 지휘사를 보낸 것도 황제잖아. 네가 천외이선에 맞설 수 있는지 궁금했겠지. 그걸 알아 보겠다고 위소의 군사를 밀어 넣다니. 죽거나 다친 사람들만 불쌍하게 됐구나.”

“누님 말을 듣고 나니 더 도와주기 싫어지는데요? 그게 궁금하면 사람을 보내 알아봐도 되잖아요. 그런데도 도지휘사를 보내서 싸움을 걸다니. 진짜 어이가 없네.”

“황제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거겠지. 네 무위가 약하면 반역자로 토벌하는 거고, 강하면 도와 달라고 하면 되니까.”

“기분이 별로네요.”

연적하는 황제가 꼴도 보기 싫었다.

황제가 온건하게 접근했다면 한소양이 죽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한소양뿐이 아니다.

천산검영에 죽거나 다친 위소(衛所)의 군사들을 생각하면 화가 났다.

“에이! 괜히 생각해 보고 알려 주겠다고 했네. 그 자리에서 싫다고 할걸.”

그러자 남궁연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일은 아니야. 천외이선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먼저야. 유명교주가 데리고 왔는데 금군으로도 어쩌지 못한 존재라면……. 어쩌면 우리가 아는 사람들일지도 몰라.”

“우리가 아는 사람요?”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존재겠지.”

그제야 연적하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궁연이 ‘왕들의 하늘’로 가면서 ‘금사’가 왔다는 게 떠올라서다.

“누님이 가면서 금사가 왔으니, 나 때도 뭔가 강호로 넘어왔겠네요?”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 두 사람은 분명 금사와 또 다른 누군가일 거야. 확실히 금사 정도만 해도 금군으로는 무리지.”

“와아! 유명교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왕들의 하늘에서 넘어온 것들이 맞겠네. 맞아.”

연적하는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등가교환(等價交換)의 법칙이니 금사보다 뛰어난 신들 중에 하나가 왔을 거야.”

남궁연은 자신을 낮추었다.

강호에서나 구주에서나 연적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와 비슷한 존재감을 가졌다면 신들 중에 하나일 게 분명했다.

“누가 왔을까요?”

“‘팔왕(八王)’이나 ‘삼천(三天)의 신’들 중에 하나일 테지.”

연적하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구주에서 만났던 신이 강호에 왔다고 생각하니 반가운데요?”

“황제에게는 재앙일 거야.”

“흠! 애매하네요.”

연적하가 곤혹스러운 눈으로 남궁연을 보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황실의 문제에 일절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남궁연과 자신이 왕들의 하늘로 가면서 생긴 일이라 마냥 모른 체하기도 그랬다.

“동 대인에게 말한 대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 어차피 지금 당장은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세상 참! 뜻대로 살기 어렵네요.”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힘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

십이월 하순.

사천성.

성도.

월하주루.

늦은 밤, 한 사내가 기녀들에 둘러싸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북진무사 장사경이다.

꽤나 많이 마신 듯 그의 얼굴은 불콰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기녀들이 빈 잔에 술을 채울 때마다 지체하지 않고 비웠다.

“커허! 쓰다. 젠장. 역적이 대접을 받고, 충신이 손가락질당하다니. 썩어도 이렇게 썩을 수가 있나?”

기녀 하나가 웃으며 그의 말에 댓 거리를 했다.

“왜요? 누가 우리 나리에게 뭐라고 했나요?”

“나?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 없어. 그랬다가는 내가 죽여 버리지.”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내가 화가 난 이유는…….”

그때 누군가 장사경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분수를 모르고 나대다가 죽게 생겼기 때문이지.”

순간 화들짝 놀란 장사경이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쿠당탕.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란에 기녀들의 교성으로 가득하던 주루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앳된 얼굴의 청년 하나가 천연덕스럽게 장사경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연적하였다.

뒤늦게 그의 얼굴을 본 장사경이 덜덜 떨었다.

“다, 당신은…… 나를 죽이기 위해 왔소?”

그의 말에 놀란 기녀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다.

연적하가 빈 잔을 하나 찾아 옷소매로 쓱쓱 닦으며 말했다.

“그쪽 찾는다고 개봉의 금의위들이 고생 좀 했대. 동료들도 못 찾게 잘도 숨어 지냈네?”

“그, 금의위가 날 넘긴 겁니까?”

“세상이 진짜 썩었나 봐. 금의위가 아침저녁으로 찾아와서 필요한 게 없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북진무사를 내놓으라고 했지.”

“사, 살려 주십시오.”

“인과응보라고 생각해.”

“저, 저는 나랏일을 열심히 한 죄밖에 없습니다. 금의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모르겠는데? 당신이 말해 봐. 유명교를 비난했다고 사람을 죽여서 불에 태워야 했어? 고문까지 했다면서? 유명교 그 씨발 것들이 뭐라고, 그거 비난 좀 했다고 사람을 죽여서 불태우냐고! 이 개새끼야!”

연적하가 버럭 소리 지르자 주루는 한순간 싸한 적막이 흘렀다.

이윽고 손님들까지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떴다.

갑자기 유명교 욕이 나오니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피하는 것이다.

한참 침묵하던 장사경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 이거 어쩌나. 나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너를 죽일 건데. 그만 가 봐.”

연적하가 손가락 끝으로 술을 찍은 후에 가볍게 튕겼다.

퍽-.

장사경의 이마 정중앙에 구멍이 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사경은 휘둥그렇게 치뜬 눈으로 사망했다.

장사경의 이마에서 피가 주루룩 흘러내리자 기녀들이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연적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앉아 묵묵히 술을 마셨다.

잠시 후 누가 포방(捕房)에 신고를 했는지 포두와 포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나 이문청 포두는 살인범을 눈앞에 두고도 선뜻 추포하지 못했다.

술 한 방울로 사람의 머리에 구멍을 내서 죽이는 것은 어지간한 고수들은 흉내 내지 못할 절기였다.

그래도 살인범을 눈앞에 두고 구경만 할 수도 없는 노릇.

한참 만에 이문청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당신이 저 사람을 죽였소?”

연적하는 대답하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예전에는 사람 같지 않은 십두마병, 백두마군을 죽여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왕들의 하늘’을 겪은 뒤로는 무덤덤했다.

자신이 반신(半神)의 반열에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많이 죽여 무뎌진 것이리라.

어느 쪽이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마두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이문청은 살인범이 침묵하자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조개처럼 입 꾹 다물고 있을 거면 달아나지, 왜 자리에 남아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어물쩡 넘기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럴 수도 없다.

그가 전전긍긍할 때, 거칠게 문을 열고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난입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돌아보던 이문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금의위다!’

범인이 유명교를 욕했다고 하더니 기어코 금의위까지 온 모양이다.

그가 금의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막 돌아설 때다.

금의위가 한발 먼저 그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사천성의 금의위다. 너는 어디 포방에서 나왔느냐?”

“소인은 홍문 포방에서 나온 이문청 포두입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고 그만 가 보거라.”

“예.”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이문청은 이때다 싶어 급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금의위의 하는 짓이 묘했다.

살인 용의자를 잡는 게 아니라 마치 보호하듯 사방으로 흩어져 바깥을 경계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이문청의 귓가로 믿기 어려운 음성이 들려왔다.

“대협. 이곳의 정리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믿기지 않는 말에 이문청은 저도 모르게 신형을 돌렸다.

세상에!

금의위가 살인범 앞에-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공손하게 서 있었다.

얼핏 보면 주루의 일꾼이 손님에게 주문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멍하니 보고 있는 그의 등을 금의위가 다가와 떠밀며 나직이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본 것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라.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병풍 뒤에서 향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금의위의 협박에 이문청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본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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