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회. 여기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해원상방에 연설주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허임달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건 연적하도 마찬가지였다.
연적하와 배다른 형제들 간의 사이가 소원한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원상방 상인들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닌 까닭이다.
심지어 남궁연조차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연설주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우님, 여기까지 왔는데 산채 구경은 하고 가야지?”
“당연히 그래야죠.”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봉산채는 그에게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 꼭 들러 볼 생각이었다.
***
오봉산채.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산채로 통하는 목책이 나왔다.
연적하가 감회 어린 얼굴로 목책을 올려다보았다.
오봉산채에서 지내던 시절, 상단 무사들과 무당파 장로 천지상인이 쳐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아빠가 예전에 말야…….”
연적하는 지안에게 목책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다.
눈을 반짝이며 듣던 지안은 목책 너머 어린아이들이 보이자 달려 나갔다.
월아와 금아가 지안의 좌우로 따라붙었다.
“아니, 아빠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지안아!”
그러나 지안은 아빠 이야기보다 또래가 더 좋은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뻘쭘하게 서 있는 연적하에게 오봉산채 채주 마형도와 산채에 남아 있던 의형제들이 다가왔다.
짧은 인사 후에 연적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큰형님과 아우님이 워낙 기초를 잘 잡아서 그래. 그냥 하던 대로 하는데 잘 돌아가더라고.”
마형도는 공을 풍연초와 연적하에게 돌렸다.
사실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마형도는 오봉십걸의 명성을 생각해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덕분에 산을 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물론, 관군과 상방 무사들의 토벌 시도도 없었다.
산채는 평화로웠고, 그건 도적들과 인근 과부들의 결합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가 안마당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이었다.
연적하는 흐뭇한 눈으로 산채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다 신시 말(오후 5시)이 되자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마형도와 의형제들은 그가 내일 갔으면 했지만 잡지는 않았다.
남궁연의 잠자리로 산채가 누추하다고 생각해서다.
하산한 석경장 식솔들은 산 아래 하가촌의 객점에 방을 얻었다.
그날 밤.
연적하가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자 남궁연이 말했다.
“왜? 기분이 싱숭생숭해?”
“그러네요.”
“나도 남궁세가에 가면 그래. 특히 천람소축(天覽小築)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뭉클해.”
“오봉산채에서야 비로소 내가 지난 십 년간 갇혀 지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됐어요. 너무 오래 그 생활이 계속되면 사실 잊어버리거든요. 갇혀 있다는 자체를.”
“사람들 참 못됐지? 네가 창고에 십 년 동안이나 갇혀 있다는 거 다들 알았을 텐데. 누구 하나 너를 위해 나서 주지 않았다는 게 참 화가 난다.”
“내가 그래서 사람을 안 믿잖아요.”
“나도 안 믿어?”
“누님은 믿죠.”
“얼만큼?”
“얼만큼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생각도 안 되고. 그냥 누님은……. 무조건이라고나 할까?”
“훗! 고맙네.”
두 사람은 지안을 사이에 두고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이어 갔다.
***
하남성.
정주.
호천맹.
통천각.
호천맹 이 차 지원부대가 돌아와 전한 말에 호천맹이 발칵 뒤집혔다.
호천맹 맹주 무극상인은 이 차 지원부대를 해산한 뒤 따로 칠파이문의 대표들을 소집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하여 이 차 지원부대가 남경에서 돌아왔습니다. 현재 남천 대협은 ‘이후로 호천맹이 남직례성에 발을 디디면 남맹이 포기했던 남직례성 밖의 일백오십 개 방파를 되찾아 주겠다’고 공언한 상태입니다.”
총사 공손일랑 공손기의 말이 끝났음에도 한동안 칠파이문 대표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무림에서 남천 연적하의 존재감은 강했다.
한참 만에 무극문의 문주인 천공도 장학이 입을 열었다.
“일단 무극문은 이문사방에서 손을 뗐습니다만……. 정녕 이대로 끝내도 되겠습니까?”
장학이 뜨거운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칠파일문 대표들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의천문의 오행검객 이후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순전히 노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이대로 넘어가는 것은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무림을 어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명교주나 마교주가 그렇게 하려다가 죽었다.
문제는 그들을 죽인 사람이 남천이라는 사실이다.
점창파의 도천 진인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머릿속으로는 안 될 일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남천이 하는 일을 제지하기가 쉽지 않으니……. 험.”
어느새 호칭이 ‘남천 대협’에서 ‘남천’으로 격하됐다.
뒤이어 공동파의 월명상인이 입을 열었다.
“남천의 일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우리 내부부터 점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남천이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반대하십니까?”
공손기 총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월명상인께서는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닌 말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어떤 대책을 세웠다 칩시다. 그 대책이 남천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서 그럽니다.”
“그건 칠파이문의 대표를 믿지 못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무당파가 남천의 사문이라, 지금까지 매사에 남천을 옹호해 왔으니 하는 말입니다.”
월명상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당파 천성 도사를 향했다.
사람들의 의혹 어린 눈초리에 천성 도사가 눈을 찌푸렸다.
“우리 무당파는 단 한 번도 대의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남천이 비록 무당파의 속가제자이기는 하지만……. 우리 무당파는 언제나처럼 중지를 따를 것입니다.”
천성 도사는 남천과 무당파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의 말에 다른 육파이문 대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남천이 고금제일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칠파이문의 연대는 그보다 더 강하고 끈끈했다.
만약 다른 문파에 남천과 같은 고수가 출현해 물의를 일으킨다면, 그들도 결국 무당파와 같은 소리를 할 터였다.
칠파이문은 개인보다 문파의 이익을 더 앞세웠고, 그 방침을 개파 이후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었다.
공손기 총사가 월명상인에게 확인하듯 말했다.
“월명상인, 이제 대책을 의논해도 되겠습니까?”
“무당파의 입장을 들었으니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이제 남천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공손기 총사의 말이 끝났음에도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공손기 총사가 채근하려는 순간 청성파의 덕양 존자가 말했다.
“솔직히 아무리 칠파이문의 제자라 해도 남천을 상대할 수는 없소. 남천 정도 되는 고수를 상대하려면……. 천하십대고수들은 돼야 한다는 게 빈도의 생각이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오행검객 이후락이 덧붙였다.
“한두 분만으로 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칠파이문에 속한 천하십대고수 전부가 힘을 합쳐야 할 겁니다.”
그 말에 칠파이문 대표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칠파이문에 속한 천하십대고수들은 일곱이나 된다.
칠파이문이 괜히 무림 종주로 불리는 게 아니다.
그중 화산파의 무극상인과 무극문의 무상도제 장무덕, 의천문의 의천검존 이의정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소림사의 원공 선사, 무당파의 태허 진인은 비록 은거를 했지만 사문에서 부르면 움직일 사람들이었다.
전진파와 청성파에도 각각 한 사람씩 있지만 언제 우화등선할지 모를 정도로 나이가 많아 청하기가 민망한 상황.
결국 동원 가능한 천하십대고수는 다섯인 셈이다.
총사 공손기가 맹주이자 천하십대고수 중에 한 사람인 무극상인을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맹주님. 덕양 존자와 오행검객의 말씀처럼 칠파이문의 일반 제자들로는 남천을 견제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칠파이문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천하십대고수들은 다섯 분이십니다. 그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이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총사와 눈이 마주친 무극상인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천하십대고수이신 맹주님이 보시기에……. 다섯 분의 천하십대고수들로 남천을 제압하실 수 있겠습니까?”
“…….”
한순간 통천각이 조용해졌다.
칠파이문의 대표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무극상인의 입만 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무극상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남천의 무위가 고금제일에 이른 것은 맞습니다. 허나 천하십대고수 다섯이 연수합공하면 무신(武神)도 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아!”
“오오!”
칠파이문 대표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십대고수 입에서 나온 소리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로써 ‘다섯 명의 천하십대고수가 연수합공하면 남천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무극상인의 말에 고무된 칠파이문 대표들은 너도 나도 대책을 쏟아 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비록 사파에게 ‘위선자’라 손가락질당하고 있지만 사실 칠파이문은 궤계나 계략에 능하지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보다 못한 청성파의 금양 진인이 손을 번쩍 쳐들었다.
공손기 총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금양 진인은 방문좌도(旁門左道)에 조예가 깊다고 알려진 기인이다. 그런 만큼 그의 머릿속은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금양 진인, 무슨 묘책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내놓은 대책들을 잘 들었습니다. 빈도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묻고 싶습니다. 호천맹은 남천과 비무라도 하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림에 군림하려는 그를 처단할 생각입니까?”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에 좌중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공손기 총사의 비정한 음성이 침묵을 깼다.
“비무를 할 요량이었으면 무당파의 입장을 묻지도 않았겠지요. 설마하니 비무나 하자고 다섯 분의 천하십대고수님들을 한자리에 모시겠습니까? 그리고 천하십대고수 다섯 분이 연수합공하는 비무가 있습니까?”
그는 노골적으로 ‘처단’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뜻만은 분명했다.
처단이었다.
그러자 금양 진인이 칠파이문의 대표들을 둘러보았다.
“칠파이문의 동도들께서도 총사와 한마음 한뜻입니까?”
칠파이문의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확인한 후에 금양 진인은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먼저 포공사에서 천하십대고수인 검왕을 제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검왕과 남천이 화해를 했으니 검왕은 분명 남천을 도우려 할 것입니다. 그가 남천의 편에 서면 우리 쪽 다섯 분의 우위도 불확실해질 수 있습니다. 불확실의 요소를 제거함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자는 겁니다. 그리고 포공사로 남천을 끌어들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것이지요.”
‘검왕을 제거하자’는 말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남천을 물리치면 그다음은 검왕의 차례인 까닭이다.
정원현에서 검왕에게 제자들을 잃은 문파들이 가장 먼저 동의를 표했다.
“좋은 생각이오.”
“노부도 찬성이오.”
“가장 현실적이고 성공 가능한 계책이라 생각되오.”
칠파이문의 대표들이 모두 찬성했다.
공손기 총사가 상기된 얼굴로 무극상인을 돌아보았다.
“맹주님. 칠파이문은 금양 진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맹주님께서 가부를 결정해 주십시오.”
통천각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검왕을 제거하는 것도 천하십대고수들의 몫인지라, 무극상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