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회. 너는 누구냐?
말이 통하지 않자 답답함을 느낀 연적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계(上界)로 오자마자 유성우(流星雨)에 맞아 팔다리가 부러지고, 낯선 여자에게 냉대를 받으니 입맛이 썼다.
‘내가 이런 대접이나 받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닌데…….’
그나저나 심통을 떼어 놓고 오기를 잘한 것 같다.
자신이 이 정도면 심통은 이미 가루가 됐을 터였다.
‘하아! 내가 할 수 있는 일 맞아?’
오자마자 이 지경이 되니 불안했다.
마음 한편으로 창조신과 구천현녀의 실수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머리 위로 쏟아진 유성우가 자연현상이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 그게 이 세계 누군가의 소행이라면?
아니, 어쩌면 천외이선이 벌인 일일 수도 있다.
천외이선의 짓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자신이 경험한 천외이선은 저런 류의 술법과 거리가 멀었다.
유성우를 원하는 지역에 내리게 할 수 있다니!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왕들의 하늘’을 다스리던 ‘삼천의 신’들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일리아나와 앰버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여자들이 사라지자 연적하는 진기요상(眞氣療傷)을 시작했다.
공들여 대주천을 한 차례 마치자 내상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 속도라면 팔다리의 뼈가 붙을 즈음 내상도 낫게 될 것 같았다.
물론 내상이라는 게 부러진 뼈와 달라서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런 끔찍한 유성우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무기력하게 당한 것은 유성우를 처음 본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까닭이다.
구천검 팔 식 구룡번신(九龍翻身)은 신법이지만, 그 속에는 공간을 이동하는 술법의 묘용도 있다.
다만 ‘가 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제약 때문에 그날은 유성우를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네 번째 하늘’의 경험이 쌓이면, 유성우를 만나도 최소한 안전한 곳으로 달아날 수는 있다.
문득 오봉산에서 처음 의천검존을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천하십대고수인 그를 만날 때도 달아날 자신이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의 처지가 마치 창고에서 갓 탈출했을 때와 비슷한 것 같다.
“사람이 겸손해야지 까불면 안 된다니까.”
연적하는 내심 자존광대(自尊廣大) 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여기는 무림도, ‘왕들의 하늘’도 아닌, 자신보다 강한 강자들로 득시글거리는 상계 중의 상계.
무림에서처럼 행동했다가는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음 날.
거동이 가능하게 되자 연적하는 나무 작대기에 의지해 숙소 주변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산책 중에 만난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기만 할 뿐, 다가와 말을 건다거나 숙소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걸 보고 연적하는 자신이 보호와 관찰의 대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빙벽 앞에서 병사들이 보였던 적의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저들과 자신의 다른 점은 머리카락 색깔밖에 없었다.
‘내가 흑발이라 잡으려 했던 건 아닌 모양이네.’
연적하는 문득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본래 자신의 옷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이 찢어졌든지 해서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갈아입힌 모양이다.
‘설마 그 여자는 아니겠지?’
연적하는 어제 자신에게 물을 먹여 주던 괴팍한 여자를 떠올렸다.
“에이, 그럴 리가.”
다시 절룩거리며 길을 따라 걷던 연적하는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 그 괴팍한 여자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앰버는 괴청년의 앞에 도달하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이봐요! 부러진 다리로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면 어떻게 해요! 여기까지 나온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잖아요! 가요! 높으신 분이 만나러 온다니 오늘은 꼼짝 말고 방에 있어요!”
“…….”
연적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무슨 말이 저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곧이어 여자가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여 보인 후 홱 돌아섰다.
연적하는 절뚝거리며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연적하는 오전 내내 숙소에 머물러야 했다.
아침 나절과 달리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여자가 달려와 잔소리를 해 댔다.
그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갑자기 왜 저러지?’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돌변한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게 단지 저 괴팍한 여자의 변덕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마당에서 마주친 사람마다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걸 보면 ―자신에 대한― 방침이 바뀐 것일까?
밖으로 나가려던 시도가 번번이 막히자 연적하는 침상에 드러누웠다.
이럴 때는 말이 다른 게 무척이나 답답했다.
‘에라! 드러누운 김에 와식이나 하자.’
그는 반개(半開)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며 영기에 집중했다.
소주천을 마친 그가 ‘대주천으로 넘어갈까? 일어날까?’를 고민할 때, 마당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연적하는 상체를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제오늘 절간처럼 조용하던 이곳 분위기를 생각하면 저 소란은 자신과 관계된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돌보던 두 여자가 세 남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사십 대와 오십 대 남자들의 허리에는 중검(重劍)이, 그리고 육십 대 남자의 손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일리아나가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는 어제 오후에 깨어 났습니다.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내부 장기가 상했으나……. 정신을 차린 뒤로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습니다.”
“그 밖에 특이한 사항은 없느냐?”
“정신은 온전한 것 같은데 대륙공용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가끔씩 뭐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스타우로스 공작을 힐끔 보았다.
스타우로스 공작이 여자들을 내보내라는 신호를 보내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수고했다. 너희들에게는 따로 포상을 내릴 것이다. 그만 나가 보거라.”
“예.”
일리아나와 앰버가 물러나자 스타우로스 공작이 동행한 궁정 마법사 칼로스에게 물었다.
“칼로스 경, 어떻소? 내 눈에는 영기 수련자로 보이는데, 트레이더(Traidor)와 관계가 있는 것 같소?”
트레이더는 마족에게 영혼을 판 흑마법사를 뜻한다.
철두철미한 스타우로스 공작은 생존한 병사의 감별을 위해 궁정 마법사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마티아 테스 알리티아스(진실의 눈).”
마법 영창과 함께 칼로스의 지팡이에 박혀 있는 보석에서 한순간 빛이 번쩍였다.
이윽고 5서클 메이지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작 전하께서 보신 대로 영기를 수련한 야인(野人)입니다.”
스타우로스 공작과 베르나르도 후작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영기를 수련한 야인이라면 흑마법사의 적이니 트레이더와 관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그건 저 청년이 정말 운 좋게 살아 돌아온 영지병이라는 소리였다.
기쁨도 잠시, 스타우로스 공작이 눈을 찌푸렸다.
뒤늦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에게 얻어 낼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스타우로스 공작이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자 칼로스가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스타우로스 공작과 베르나르도 후작이 기대 어린 눈으로 궁정 마법사의 가죽 주머니를 보았다.
“마그눔 오프스(Magnum opus)의 출현이 의심되는 상황이니만큼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겠지요? 마침 저에게 성능이 조금 떨어지지만 통역을 해 주는 아티팩트가 하나 있습니다. 병사에게 들을 목격담의 가치를 생각하면, 비록 그가 야인이지만 이 정도 선물은 해 줘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칼로스가 가죽 주머니에서 청동 반지를 꺼내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부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메테오 스웜에서 살아나고, 야인 주제에 아티팩트까지 얻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은 자로군.”
아티팩트는 그 자체로 보물이라, 그것을 가보로 삼는 귀족도 많았다.
귀족들에게도 귀한 게 아티팩트인 만큼, 야인에게는 실로 과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야인의 입에서 나올 정보의 가치가 아티팩트에 버금가니 반대하기 어려웠다.
청년의 손에 반지를 끼워 준 칼로스는 단검으로 그의 손가락 끝을 살짝 찔러 피를 냈다.
“앗 따가워!”
묵묵히 노인이 하는 대로 따르던 연적하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노인이 호의를 내비치며 살살 얼러서 가만히 있었는데, 막상 피를 보니 후회막급이다.
단검에 낙월독정보다 강한 독이 발라져 있었다면 어쩌려고 순순히 응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 칼로스는 청년의 피를 반지에 묻힌 뒤 ‘각인’과 ‘통역 발동’의 주문을 연달아 외웠다.
“카라조. 메타프라토.”
순간 청동 반지에 붉은 빛이 맺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렇게 아티팩트에 새로운 주인을 각인시키는 절차를 마친 칼로스가 청년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
갑자기 노인의 말이 귀에 쏙 들어오자 연적하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반지에 무슨 주술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뜻이 통하는 게 분명했다.
“저요?”
“그래 너. 나는 에스카토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 메이지 칼로스다.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냐?”
“나는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인데요?”
성능이 떨어지는 아티팩트는 연적하(淵赤霞)의 이름을 적당히 의역했다.
그런데 그 괴상한 이름을 들은 칼로스는 오히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야인’의 이름인 까닭이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게 ‘굳센 숲[武林]’이라고…… 잘 모르실 거예요.”
“‘굳센 숲’의 부족이라고? 잘 알았다. 공작 전하, 베르나르도 경, 들으신 대로입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직접 물으시면 됩니다. 계속 제가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5서클 메이지는 자작이니 이중에 가장 신분이 낮았다.
그러니 야인에게 그날의 정보를 빼내려면 ―비록 궁정 마법사라 해도― 그가 직접 나서야 했다.
제3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 공작과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로스는 청년을 마주 보았다.
“우리는 네가 푸토코아 백작이 빙벽 수리에 동원한 야인임을 알고 있다. 너는 그날 빙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느냐?”
연적하는 저들이 자신의 정체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못 들은 척 넘어갔다.
괜히 하계에서 왔네 어쩌네 하는 소리로 자신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서다.
오히려 그는 어리숙한 노인이 알아서 만들어 준 자신의 신분을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대한 야수들이 빙벽 틈새에서 나왔습니다. 병사들이 한창 야수들과 싸울 때 하늘에서 유성우가 떨어졌고요. 하늘이 새빨갛게 불타는 걸 보다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유성우(流星雨)가 분명하냐?”
“예, 하늘이 온통 불타는 운석으로 가득했습니다.”
“역시! 잘 알았다. 너는 운이 좋았다. 너와 코드란테스 백작을 제외한 세 개 영지병 모두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네가 쓰러진 크레이터에 운석이 떨어지지 않아 살 수 있었다.”
“아!”
“내 왼편에 계신 분이 클루톤의 영주이신 베르나르도 후작이시다. 그분께서 너를 구해 주셨다.”
연적하는 중검을 차고 있는 사십 대 남자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화답했다.
궁정 마법사인 칼로스는 내친김에 스타우로스 에스카토스 공작도 소개했다.
“그리고 내 오른편에 계신 분은 ‘왕실의 수호검’이라 불리시는 에스카토스 공작 전하시다.”
“아, 예에.”
연적하는 ‘왕실의 수호검’이라는 말에 더욱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왠지 금의위에서 자신에게 붙여 줬던 ‘황상의 숨겨진 검’이라는 호칭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