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1117화 (1,117/1,339)

1117회. 모든 길은 제도(帝都)로 통한다

엘리오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전에서 좁쌀 한 톨만 한 마력이 느껴졌다.

빅풋의 심장을 섭취한 뒤로 생겨난 씨앗에 샤모스 군주의 마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는 구천기를 끌어 올려 좁쌀만 한 마력을 휘감았다.

마력은 구천기의 그물을 피하지 못하고 갇혔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엘리오는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구천기로 짓뭉갰다.

그러나 마력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서 부서지지 않았다.

흡수할 수 없으면 방출해야 한다.

그는 구천기를 이용해 마력을 왼쪽 어깨 부위로 밀었다.

손가락까지 밀어낸 후에 외부로 방사하거나, 삼매진화로 태울 생각이다.

그런데 잘 밀려가던 마력이 빨려가듯 다시 심장으로 돌아갔다.

한순간 엘리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구천기에 흡수되지도 않고, 심장 주변에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은 심장과 상성이 맞았다.

마나 유저들이 심장에 마나를 모은다는 건 알지만, 마력도 그런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의 심장은 이미 마력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마나가 아니라 마력과 동화되다니, 자신의 몸이지만 기가 막혔다.

‘제기랄. 마나와 영기는 한집에 있지 못한다는데…….’

하필 마력이 자신의 심장에 똬리를 틀다니!

기분은 더럽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자신은 스스로 마력을 섭취했고, 심지어 더 흡수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늦었다.

마력은 자신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정확히는 좁쌀만 한 마력이 심장에 자리를 잡았다.

이젠 싫다고 내버릴 수 없으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족의 기운이라는 선입견을 버리면 마력도 꽤…… 씨발.’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딱히 장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마력은 구천기와 상극이기까지 하다.

구천기가 ‘허무’라면 마력은 ‘뜨거운 불덩어리’다.

그냥 불덩어리가 아니다.

바다 같은 자신의 영기로도 끌 수 없는 지옥의 겁화였다.

구천기를 연성한 엘리오에게 그런 마력은 ―불필요를 넘어― 없애야 할 기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싫다고 해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 불쾌한 마력과 평생 동고동락해야 한다는 것을.

엘리오가 마력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자 마력은 자연스럽게 심장에 녹아들었다.

‘응?’

좁쌀만큼 뭉쳐 있던 마력이 사라지자 엘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주천까지 해 가며 몸을 샅샅이 뒤졌지만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심장에서 녹아 사라진 것 같았다.

심장을 이 잡듯 뒤져도 마력이 느껴지지 않자 엘리오는 눈을 떴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파비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작님! 드디어 마력을 없애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저는 자작님이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파비안의 설레발에 엘리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심장에서 눈 녹듯 사라진 마력을 그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사람 얼굴 같냐?”

“예.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균열을 통과하시지요?”

“그러자.”

엘리오는 침상에 길게 드러누웠다.

한참을 마력과 심장에 대해 생각하던 엘리오가 문득 물었다.

“파비안. 마나의 축복을 받으면 심장에 마나가 모이지?”

“예.”

“느낌이 어때?”

“느낌요? 심장이 전체적으로 딴딴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거 말고 마나가 느껴져?”

“물론 느껴지죠.”

“심장 전체에서? 아니면 일부에서?”

“전체죠. 처음에는 마나의 밀도가 낮지만 경지가 올라갈수록 밀도가 높아집니다. 마법사들은 고리의 형태로 알 수 있고요.”

“그러니까 심장에서 마나가 느껴진다는 거지?”

“예.”

엘리오는 눈을 감았다.

심장에 마력이 녹아들었지만 역시나 마력의 느낌은 없었다.

심장에 흡수가 된 것일까?

‘그럴 리 없지.’

구천기에도 끄덕 않던 마력이 심장에 녹아 들어갈 리가 있나.

분명히 자신이 모르는 일이 심장과 마력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마수와 마물의 심장에 마력이 구 할(90%) 정도 모인다고 했다.

심장에 녹아든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파비안.”

“예?”

“너는 아무거나 먹지 마라.”

“당연하죠. 요 며칠 자작님 보고 깨달은 게 많습니다.”

“알면 됐다.”

“그런데 자작님?”

“왜?”

“영기와 마나는 한 몸에 공존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흑마법사들의 마나도 흑마법을 익히면 변질된다고 들었습니다. 자작님의 영기는 괜찮은 겁니까?”

“어. 마력이 있을 때는 혈기가 자주 치밀어 올랐는데……. 그것 빼면 다른 변화는 없었어. 지금은 이전처럼 편안한 상태고.”

“아! 그래서 코디악에 있을 때 쉽게 화를 내고 그러셨던 거군요?”

“내가 그랬어?”

“그랬냐고요? 마족들과 눈만 마주쳐도 주먹질을 하셨습니다.”

“그거야 나를 불쾌한 눈빛으로 쳐다봐서 그랬던 거고.”

“에이! 아닙니다. 저도 그때는 무서워서 자작님을 피해 다녔습니다.”

“아 몰라. 왜 그랬는지 기억도 잘 안 나.”

“그것 보십쇼. 코디악에 있을 때는 지금과 달랐다니까요. 저는 마력이 자작님을 자극해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자극이라…….”

“마물의 심장 한 조각이 자작님의 얼굴뿐 아니라……. 어쩌면 내면에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릅니다.”

“……..”

엘리오는 부인하지 않았다.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파비안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럴 것이다.

“본래의 자작님으로 돌아오셔서 저는 기쁩니다.”

“이제는 겁이 안 나냐?”

“예.”

“다행이네. 계속 무섭다고 하면 찜찜했을 텐데.”

마력이 심장에 녹아든 지금 엘리오는 파비안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다음 날.

엘리오와 파비안은 균열 인근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알아본 균열 감시 부대 중대장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라고아 자작님!”

라미노프 왕국의 나찰라 중대장 막심 체호프였다.

하지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엘리오에게는 그저 낯익은 기사일 뿐이다.

“아, 예, 그런데 누구……?”

“나찰라 중대장 막심 체호프 남작입니다.”

“아, 체호프 남작이시구나.”

“제도로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타메이온을 정찰하신 겁니까?”

막심 체호프 남작의 말에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로 가기 전에 안전한지 아닌지 확인차.”

“역시 다르시군요. 타메이온 안쪽은 좀 어떻습니까? 빙벽 인근의 마물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조용해요. 아마 한동안은 빙벽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균열은 좀 어때요? 차라트의 회수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차라트는 상태 악화의 저주가 새겨진 뼛조각이다.

엘리오는 그것과 균열이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히르헤라를 떠나도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예. 지금까지 균열 부근에서 차라트 백이십 개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균열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차라트를 제거하면 균열이 사라진다는 예측이 맞았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수고해요.”

“예! 살펴 가십시오!”

막심 체호프 남작이 엘리오에게 군례를 올렸다.

엘리오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파비안과 함께 균열로 다가갔다.

수백 명의 병사와 일꾼 들이 달라붙어 눈 속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차라트를 찾고 있는 것이다.

꽁꽁 언 그들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트를 제거해야 균열이 복구되니 말릴 수도 없다.

균열 중앙은 이미 수색이 끝났는지 텅 비어 있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균열을 통과해 히르헤라에 진입했다.

히르헤라에 들어서자마자 파비안이 호들갑을 떨었다.

“흠! 하아! 히르헤라는 공기부터가 다르네요. 공기는 이래야지요.”

“그러게. 균열을 넘어오니까 냄새가 다르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타메이온에서 내내 고생했는데 크리소페디오(여관 겸 술집)에 들렀다가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엘리오는 대답 대신 좌우를 둘러보았다.

과거 루퍼스 중대가 경계를 서던 곳은 텅 비어 있었다.

최전방의 균열 경계 부대 외에는 전부 차라트 회수에 투입된 것 같았다.

“쯧쯧! 히르헤라에 오자마자 술집 타령이냐? 갔다가 아는 얼굴 만나면 피곤해진다.”

“어차피 주둔지로 내려가면 자작님이 온 줄 알 텐데요?”

“주둔지로 안 간다.”

“그럼 뭐 하늘이라도 날아가시게요?”

의미심장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던 엘리오가 운종술을 펼쳤다.

스스스―.

엘리오와 파비안의 주변으로 구름이 몰려들었다.

“어? 어? 자작님? 이거 뭡니까?”

엘리오가 놀라는 파비안의 팔을 잡아끌고 구름에 올라탔다.

뒤이어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어어어어!”

까마득히 치솟은 구름이 남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1시간 후.

히르헤라 외곽 산기슭에 구름 한 덩어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윽고 구름에서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엘리오와 파비안이다.

설원을 밟자마자 파비안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살았다. 사람은 역시 땅을 밟아야 해.”

“이게 무슨 땅이냐? 눈밭이지.”

“자작님! 자작님은 사람입니까? 마족입니까?”

그러자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사람이지 인마. 내가 어딜 봐서 마족이야?”

“사람이 어떻게 구름을 타고 다닐 수가 있습니까!”

“나만 탔냐? 너도 탔잖아. 그럼 너도 마족이냐?”

“저는 자작님이 태워 줘서 탄 거고요. 구름 뭡니까? 예에?”

“구름을 따라가는 기술[雲從術]이야. 내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그런 기술을 쓸 수 있어.”

“와아! 진짜요? 그게 사람이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요?”

“어.”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사람이 쓰는 기술이라니까 파비안은 바로 욕심을 부렸다.

“그랜드 마스터가 되거든 나를 찾아와라. 그때 가르쳐 줄게.”

“아, 그랜드 마스터는 돼야 익힐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보통 사람이 구름을 타고 다닐 수 있겠냐?”

“없죠.”

“그러니까 그랜드 마스터쯤 되면 찾아와. 나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지?”

“예, 예.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그랜드 마스터가 뉘 집 애 이름인 줄 아십니까?”

엘리오와 파비안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 걷던 엘리오가 문득 파비안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길은 알고 가는 거냐?”

“자작님이 모르셔서 그러는데요. 로디나 대륙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길은 제도(帝都)로 통한다.”

“그게 뭔 헛소리야?”

“그냥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언젠가 제도가 눈앞에 턱 나온다 이 말입니다.”

“모른다는 소리네? 너 제도에서 아카데미 다닌 거 아니었어?”

“에스카토스 왕궁 아카데미 졸업생입니다.”

“어우! 이 말만 번지르르한 새끼. 내가 너 얼음숲에서 헤맬 때 알아봤다. 그때도 몬타노사 산맥의 레인저 부대 출신이라고 큰소리 팡팡 쳤었지?”

“제가 몬타노사 산맥의 폰티악 중대 출신인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길치지.”

“한번 갔던 길은 잘 압니다. 안 가 본 길에서 헤맬 뿐이지요. 그런데 자작님은 길을 꺾는 순간 방향조차 잃어버리잖습니까?”

“에혀! 말을 말자.”

그래도 엘리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일단 강호와 달리 길이 잘 뚫려 있었고, 길옆 눈 덮인 숲 사이로 드문드문 인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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