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1177화 (1,177/1,339)

1177회. 그때는 후작님이 도와주셔야지요

‘벤젤을 조사해 보라’는 말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경도 벤젤이 내 제안을 거부하는 걸 보지 않았나. 그녀가 보통의 평민이라면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였을 걸세.”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평민들의 꿈은 귀족이 되는 것이네. 기사와 마법사는 귀족이 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지. 그런데 그보다 더 빠르고 편한 길을 마다한다? 그런 건 영웅들의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야. 현실 속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게다가 벤젤의 얼굴에는 기품이 있어. 제도의 연회장에서 만났다면 귀족가의 숙녀라고 생각했을 걸세.”

“그렇기는 합니다. 소상히 알아보겠습니다.”

후작이 말한 ‘현실’과 ‘기품’ 앞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북부 귀족들은 언제쯤 돌아올 것 같다던가?”

“내일이나 모레쯤 돌아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경은 그들의 말을 믿나?”

“‘스쿠툼(빙벽)의 균열을 일으킨 배후가 천공성으로 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흑마법사들이 스쿠툼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 배후에 마그눔 오프스가 있고, 그가 천공성으로 돌아갔다는 부분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지?”

“그랜드 마스터보다 어려운 경지가 마그눔 오프스입니다. 그나마 그랜드 마스터는 각하의 선친이신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처럼, 물망에 오른 분들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아니죠. 아직 8서클에 오른 마법사도 없는데 마그눔 오프스라니요? 모든 일에는 과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마그눔 오프스는 그 과정을 무시한 일방적인 발언입니다. 천공성은 또 어떻습니까? 수천 년간 그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은 장소 아닙니까?”

“그렇다면 흑마법사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아니면 북부 귀족들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까?”

호색한처럼 여자 타령을 하던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솔직히 그는 후자이기를 바랐다.

크나우프 대공가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 가문이다.

제국전쟁에서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은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을 꺾고 그랜드 마스터라 불렸다.

그의 뒤를 이어 장자인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과 차남인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까지 모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황실 기사단장인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은 선친인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보다 뛰어나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대공의 그늘에 가려 존재감이 약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여색까지 밝혀 ‘형만 한 아우 없다’의 전형이 되었다.

물론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자신이 형보다 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후작의 질문 앞에서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왜 특무대를 따라왔는지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제국 기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속마음은 다를 것이다.

황실에서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그랜드 마스터에 근접한 기사로 추측하고 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특무대에 합류한 목적은 묻지 않아도 뻔하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제압함으로 자신이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 못지않은 검사라는 걸 증명하고 싶겠지.’

자신도 아는 걸 황실에서 모르고 있을까?

아니다.

어쩌면 황실은 후작을 통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경지를 확인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는 갑작스러운 후작의 합류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 없이 막 나갈 수는 없다.

제국 감찰부의 일원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흑마법사들의 증언은 사실일 겁니다. 정신 마법으로 확인했을 테니까요.”

“마그눔 오프스와 천공성에 대한 증언이 사실이다?”

“예, 적어도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알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흑마법사들을 조종한 자가 마그눔 오프스라든가, 그가 천공성으로 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배후 인물이 흑마법사들에게 거짓말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북부 귀족들은?”

“지금으로서는 반반입니다. 흑마법사들의 배후를 추격해 왔을 수도 있고, 다른 목적으로 왔을 수도 있습니다.”

대화가 빙빙 돌아 원점으로 오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눈을 찌푸렸다.

“감찰부는 항상 그렇게 모호한 태도를 취하나?”

“전쟁 중에 저희가 이곳까지 온 것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진실을 알아내려면 대화나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다.

결국 아닌 척하면서 자신의 등을 떠미는 것이다.

‘책임질 일은 피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겠다? 과연 감찰부로군.’

“경이 납득할 만큼의 진실을 상대가 토해 내지 않는다면?”

“그때는 후작님이 도와주셔야지요.”

“내 언변이 화려하지만 늘 먹히는 것은 아니네. 경도 조금 전에 봤잖아. 평민에게도 거절당하는 것을.”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상대가 바라는 대로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북부 귀족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가벼운 신경전을 벌였다.

***

“고래다!”

탑캐슬에서 견시 선원 토트가 우측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나 선원은 물론 북부 귀족들도 반응하지 않았다.

토트는 뻘줌한 얼굴로 다시 쪼그려 앉았다.

‘제길! 지겹다, 지겨워.’

라이트가 꾸벅꾸벅 조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북부 귀족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기상이변 현상뿐이었다.

하지만 마의 해역은 평화로웠다.

마의 해역이라는 단어가 왜 생겼는지조차 이해가 안 될 정도다.

항해를 시작한 지 팔 일째 접어들지만 며칠 전 새벽에 안개가 잠깐 낀 것 외에는 고요했다.

북부 귀족들은 운이 없다고 한탄하겠지만, 선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날씨였다.

뱃머리의 차양막 아래.

파비안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힐끔 보았다.

“자작님, 고래 보신 적 있습니까?”

“고래가 뭐야? 물고기야?”

“물고기는 물고긴데 엄청 큰 물고깁니다.”

“얼마나 큰데?”

“우리가 탄 마력범선보다 큰 놈도 많습니다.”

“그래? 안개나 먹구름 소식은 없어?”

“없습니다.”

엘리오가 고래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파비안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잔잔한 바다를 보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그저 소문에 불과했던 걸까?”

“뭐가요?”

“마의 해역 말야. 두 번의 항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뱃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까?”

당장 마력범선의 선원들만 해도 마의 해역을 믿지 않았다.

“마탑의 기록물을 믿으십쇼. 그게 지어낸 이야기라면 마법사들이 천공성을 찾겠다고 오랜 세월 노력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왜 기상이변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그놈의 때, 지긋지긋하다. 나타나기만 해 봐라. 내가 아주 그냥…….”

엘리오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의 눈빛이 붉게 물들자 파비안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결국 그날 밤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엘리오 일행에게 알트헬름 선장이 다가갔다.

“내일은 회항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배를 돌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파비안이 되물었다.

“저녁이 아니라 아침부터 배를 돌리겠다는 건가?”

“사용하던 식수통 뚜껑이 열려 있었는지 쥐가 빠져 죽었습니다.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서로 아니라고 하니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알았다. 선원들에게는 따끔하게 주의를 줘라. 이번에는 봐주겠지만 다음 항해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면……. 그냥 안 넘어갈 거다.”

“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단속하겠습니다.”

허리를 조아리던 선장이 돌아갔다.

파비안이 허탈한 얼굴로 밤바다를 보고 있는 엘리오에게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라 다행이네요. 첫날 쥐가 빠져 죽었으면 꼼짝 없이 그냥 돌아가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선장에게 말해. 다음에도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 물 선원들에게 다 먹일 거라고.”

“알겠습니다.”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마력범선은 일찌감치 하데스 항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뒤이어 알트헬름 선장이 갑판 위에 선원들을 불러 모은 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다에서는 식수가 생명이야! 어젯밤 어떤 병신 같은 놈이 물통 뚜껑을 안 닫아서 쥐가 빠져 죽었다! 이번에는 처음이니 그냥 넘어가 주겠다! 하지만 두 번째는 용서 없다! 다음에도 또 쥐가 빠져 죽으면, 북부의 귀족님들이 너희들에게 그 물을 다 처먹일 거다! 그러니까 더러운 물을 먹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잘 관리해라!”

선원들은 북부 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항해 분위기가 식수의 오염으로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가고 말았다.

***

피에스트라.

하데스 항.

석양 무렵, 수평선 위로 마력범선 한 척이 나타났다.

항구에서 짐을 실어 나르던 잡부 하나가 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항구로 특무대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참모인 콜린 메스칼 자작의 지휘 아래 질서 정연하게 대오를 갖췄다.

한쪽에서는 항구 관리인들이 어부들을 항구에서 내쫓았다.

잠시 후 특무대 기사들이 장악한 항구에 마력범선이 들어왔다.

계류장에 접안하자마자 선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마력범선의 선원들은 항구 관리인들에 의해 모처로 보내졌다.

마지막으로 엘리오 일행이 배에서 내렸다.

북부 귀족들이 배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특무대가 빠르게 다가갔다.

이윽고 특무대 참모 콜린 메스칼 자작이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제국 감찰부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콜린 메스칼 자작입니다.”

그러자 파비안이 일행을 대신해 응대했다.

“우리는 북부의 귀족들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혹시 그대는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인가?”

“예.”

“감찰부 특무대 대장인 케이사 콜드월 백작님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님과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경의 뒤에 계신 분들이 백작님과 자작이신가?”

“그렇습니다.”

파비안은 그렇다고만 할 뿐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특무대 대장이 무슨 용무로 찾아왔는지 아직 듣지 못해서다.

끝내 파비안이 물러서지 않자 콜린 메스칼 자작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마지못한 얼굴로 나섰다.

“나는 제국 감찰부의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다. 오마르 백작과 라고아 자작을 만나러 왔으니 비켜나라.”

백작의 날카로운 눈빛에 파비안은 더 버티지 못하고 슬며시 옆으로 빠졌다.

케이사 콜드월 백작과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자신과 비등비등함을 알았다.

‘적어도 백작에게 패하는 일은 없겠군.’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를 알아본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미미하게 약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응?’

막대한 영기의 양이 느껴지지만 그뿐이다.

검사를 만나면 강한지 약한지가 느껴지는데,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마치 일반인을 보는 것 같았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사람을 살짝 긴장하게 만드는 반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경계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편안했다.

자신도 이 정도면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더 무시하는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슬쩍 돌아본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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