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3회. 저는 자작님에게 충성하지 왕가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북부 귀족들은 자신을 크나우프 대공의 비위나 맞추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크나우프 대공은 능력 있는 사람을 우대한다.
여기사임에도 자신이 조사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그래서다.
만약 자신이 크나우프 대공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보고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크나우프 대공이 조사관에게 원하는 것은 진실 그 자체다.
그걸 바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전적으로 크나우프 대공의 몫이다.
예컨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등에 난 상처를 ‘스페라 오블리오(마나탄)’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저격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진실을 전할수록 크나우프 대공의 선택지는 많아진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북부 귀족들의 발언은…….
“조사관에 대한 편협한 선입견이라고!”
카티아 미켈 남작은 마치 자신의 앞에 북부 귀족들이 있는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씩씩거리던 그녀는 감정이 가라앉자 다시 선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 카티아 미켈 남작은 보리스 기사단과 벤젤을 만난 뒤 피에스트라를 떠났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북부 귀족의 결투’와 ‘크나우프 대공가의 조사’라는 광풍이 쓸고 지나간 뒤 피에스트라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
하데스 항.
바닷바람 태번.
해거름 무렵, 일 층에서 맥주를 즐기고 있는 엘리오 일행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마력범선의 선장 알트헬름이었다.
“저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파비안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항해 전날 저녁에 찾아온 걸 보면 꽤나 긴급한 일인 모양이다.
“수리를 하다 보니 몇 가지 문제가 더 발견되어서……. 항해를 며칠 늦춰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
항해를 늦춰야 한다는 말에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까지도 알트헬름 선장을 주목했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놓쳤는데 연기라니?’ 하고 따지는 듯한 표정이다.
“뱃머리 쪽 보조 돛대 하부에 금이 간 게 발견됐습니다. 주 돛대의 활대(가로로 걸린 긴 목재 기둥)도 조금 파손됐고요. 그것들을 전부 교체해야 하는데……. 빨라도 이틀은 걸린다고 합니다.”
“어이쿠! 그런 거라면 수리를 해야지. 이틀이면 되겠나?”
“예, 최근에 일거리가 없어 놀고 있는 기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선주가 수리비의 일부라도 좀 부담해 주셨으면 한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북부 귀족님들이 기상이변을 찾아다니다가 생긴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일이 생길 것 같다고…….”
돈 얘기가 나오자 파비안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돌아보았다.
“백작님, 선주가 수리비를 달라는데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알트헬름 선장에게 물었다.
“보통은 선박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 어떻게 하나?”
“일반적인 항해라면 선주가 알아서 수리를 합니다만……. 나으리님들이 마의 해역에서도 기상이변만 찾아다니시니…… 선주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알겠다. 그럼 절반을 부담하도록 하지. 그 정도면 되겠나?”
“예, 충분합니다.”
선주와 북부 귀족 사이에 끼어 있던 알트헬름 선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잠시 후 알트헬름 선장이 돌아갔다.
갑작스럽게 항해가 연기된 충격이 컸는지 엘리오 일행은 한동안 침묵했다.
한참 만에 파비안이 입을 열었다.
“예정에 없이 이틀이나 더 쉬게 생겼네요. 이제 자작님은 뭐 하실 겁니까?”
“나? 혼자라도 마의 해역에 가 보려고.”
“다른 배를 구하시게요? 왕복에만 이틀인데요? 수리가 먼저 끝날 겁니다.”
“누가 배로 간대? 나한테는 토르누비스(운종술)가 있잖아.”
“그럼 저도 데리고 가 주십쇼.”
“이틀이나 구름에서 지내겠다고? 안 돼.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내 옆에서 누가 똥 싸는 건 못 참아.”
일리 있는 말인지라 파비안은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좁은 구름 위에서 그건 못 할 짓이었다.
“참, 그거 아십니까?”
“뭐?”
“조사관 말입니다. 오늘 피에스트라를 떠났다고 합니다.”
“가든지 말든지.”
엘리오는 맺고 끊는 게 칼 같은 사람인지라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크나우프 대공가로 돌아가서 뭐라고 할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안 궁금한데?”
“그런 건 좀 궁금해하셔도 됩니다. 제국의 안위가 달린 일이잖습니까.”
“응, 내 제국 아니야.”
“아휴, 말을 말아야지. 백작님, 크나우프 대공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글쎄, 소문처럼 호승심이 강하다면 바로 비공정을 타고 오겠지만……. 자칫 그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제국이 흔들릴 테니……. 고민이 많을 걸세. 개인의 욕망과 제국의 안위 사이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군.”
“동생인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고자가 된 건 생각 안 하십니까? 저 같으면 복수를 하겠다고 바로 움직일 것 같습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후손이 없다면 모를까? 그동안 그가 뿌린 씨가 많을 테니 그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을 걸세.”
“대귀족들은 가족의 일도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까? 진짜 궁금해서 여쭤 보는 겁니다.”
“사건의 파장이 크면 클수록 개인 감정은 가급적 배제하려 노력한다네. 크나우프 대공 역시 다르지 않을 걸세.”
“높은 자리라고 다 마음대로 하지는 않는군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크나우프 대공도 이전처럼 쉽게 결정하지는 못할 걸세.”
“크나우프 대공이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오면 진짜 볼만하겠습니다?”
“그때는 전쟁의 불길이 북부까지 퍼지겠지. 나는 크나우프 대공이 현명한 사람이기를 바라네.”
“솔직히 말입니다. 남부와 북부 왕국이 손잡고 전쟁을 벌이면……. 제국이 패하는 것 아닙니까?”
“왜 제국이 패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야 우리 자작님이 북부 왕국의 기사니까요. 마족 군단도 박살 낸 분이신데 제국군이라고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라고아 경께서 확전을 막으려고 애쓰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보군. 나는 라고아 경께서 이 전쟁에 관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아 경?”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눈을 돌렸다.
엘리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세계의 전쟁에 눈곱만큼도 관여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내 적은 카마 데비아스(천자마)와 우샤스 운드라(금사)지 제국이 아니거든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파비안이 황급히 물었다.
“우리 에스카토스 왕국이 참전하게 되면요? 그래도 모른 척하실 겁니까?”
“어, 너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잊은 거야?”
“하지만 자작님은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작위를 받았잖습니까?”
“제국에서 작위를 주면 내가 안 받을 거 같냐? 난 뭐든 주면 다 받아.”
“와아! 자작님의 정신세계는 정말 놀랍군요!”
“그러니까 너도 북부 왕국들이 딴짓하지 않기를 기도해. 괜히 징집령 떨어지면 너만 개밥의 도토리가 될 테니까. 자칫 명령 불복종으로 작위까지 취소당하면 피눈물 날걸?”
“어이쿠!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쇼. 제가 어떻게 얻은 작위인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작위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너도 괜히 허파에 바람 넣지 말라고. 어디서 북부가 남부와 손을 잡는다는 소리를 해? 전쟁이 커지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대귀족들의 전쟁 노름에 시민들 죽어 나가는 게 좋아?”
“제, 제가 언제 전쟁이 나기를 바랐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북부 왕국 대귀족들이 주제를 모르고 너 같은 생각을 할까 봐 걱정이다. 그래서 크나우프 대공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거야.”
“…….”
“가만, 북부가 허튼짓하지 않게 아예 제국에다가 작위를 요청해 볼까? 내가 제국에서 작위를 받으면 북부 왕국들도 다른 생각 하지 않을 거 아냐? 백작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가까운 아라곤 공국의 카디널 파가누스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확전을 원치 않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파가누스 백작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불패의 징표’까지 줄 정도로 호의적인 대귀족이니 좋아할 게 분명했다.
“괜찮네요. 그 문제는 백작님이 처리해 주세요. 크나우프 후작을 꺾었으니 제국에서 그에 걸맞은 작위를 주겠죠?”
“제국 대귀족들의 반발을 고려해도 백작의 작위 정도는 내려 줄 겁니다.”
뚱한 얼굴로 듣고 있던 파비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급히 끼어들었다.
“이왕이면 영지도 달라고 해 보십쇼. 피에스트라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요.”
“왜? 제국 동부가 마음에 드냐?”
“어디라도 슬래시 랜드보다는 백배, 천배 나을 겁니다.”
“에스카토스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그게 무슨 소리야?”
“자작님, 저는 자작님에게 충성하지 왕가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아하! 그러니까 내가 제국에서 영지를 받으면……. 나중에 그 영지를 물려받겠다 이거네?”
“그게 정당한 제 권리라면 받아야지요. 달리 물려줄 사람이 자작님 주변에 있습니까?”
“와아! 이 빠른 태세 전환 봐. 조금 전까지 에스카토스 왕국을 위해서 전쟁터로 달려갈 것처럼 굴더니……. 금방 제국의 영지에 눈독을 들이네?”
“저는 자작님의 기사잖습니까. 자작님이 왕국으로 가자면 왕국으로 가고, 제국으로 가자면 제국으로 갈 뿐입니다.”
“네 부모님이 누구신지 한번 뵙고 싶다.”
“아무리 자작님이라도 가족 욕은 하는 거 아닙니다.”
“욕한 거 아냐. 진짜 궁금해서 그래. 너는 내 가족들 안 보고 싶냐?”
“보고 싶죠.”
“마찬가지야. 나도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런 거야. 기분 나빠 하지 마. 나 남의 가족 욕하고 그러는 패륜아 아니다.”
엘리오는 생각 없이 말했다가 진땀을 뻘뻘 흘렸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필사적으로 변명하자 파비안도 더는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크나우프 대공가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왕국와 제국의 전쟁으로 갔다가, 가족 욕이냐 아니냐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
다음 날.
엘리오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으슥한 곳으로 이동해 운종술을 펼쳤다.
눈앞에서 놓친 녹색 섬이 아른거려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얀 구름을 타고 날아오른 엘리오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마력범선을 타고 한 달 넘게 다닌 곳이라 당연히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생각과 너무도 달랐다.
마의 해역을 찾아 날아가던 그는 반나절 만에 로도스 섬에 도착했다.
마력범선보다 운종술이 수십 배 빠른 탓에 발생한 일이다.
엘리오는 다시 지나쳐 온 바다로 두 시간 정도 돌아갔다.
최대한 천천히 날아가며 구름 아래를 살피던 엘리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깃배다!”
저건 마의 해역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배들이 분명했다.
엘리오는 구름의 속도를 더 늦췄다.
그렇게 조금 더 가자 마의 해역이라 생각되는 바다가 펼쳐졌다.
그는 텅 빈 바다 위를 운종술로 오락가락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한 시간도 못되어 문제가 발생했다.
내리쬐는 햇볕에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새카맣게 타고 만 것이다.
‘이거 안 되겠네.’
별것 아닌 차양막 하나가 이렇게 중요할 줄은 몰랐다.
구름 속에 들어가도 봤지만 문제는 그럴 경우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던 엘리오는 하루 만에 햇볕을 피해 하데스 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