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7회. 엑시티움은 양날의 검이네
헤드나르 공국.
로렌 공국 피에스트라를 떠난 특무대는 제도로 돌아가는 길에 헤드나르 후작성을 방문했다.
그날 밤,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특무대를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특무대는 임무의 특성상 제국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대귀족들의 의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헤드나르 후작성.
내성 만찬실.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이 케이사 콜드월 백작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피에스트라에서 벌어진 일은 들었네. 크나우프 후작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건가?”
“크나우프 후작님과는 아라곤 공국에서 헤어졌습니다. 크나우프 대공가로 가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쯧쯧! 그렇게 여자를 밝히더니 안됐다고 해야 하나, 그만하길 다행이라 해야 하나.”
“헤드나르 후작 각하께서도 라고아 자작과 검을 맞대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라고아 자작의 경지를 어떻게 보십니까?”
엘리오의 봉작 과정은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이루어져 아직 특무대와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조차 알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가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걸세.”
“그가 크나우프 대공 전하와 비슷한 경지라는 말씀이십니까?”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네. 라고아 자작은 크나우프 대공의 아래가 아니네.”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불멸의 방패’로 불리는 그조차 저렇게 말할 정도면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다.
‘이러다 크나우프 대공마저 패하면 제국군의 사기가 바닥을 칠 텐데…….’
황태자에게 필승의 묘책이 있다면 모를까? 이래저래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알아서 하시겠지.’
천재인 황태자가 자신의 눈에도 보이는 걸 모를 리 없다.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낸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말했다.
“후작님을 찾아온 것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에스쿠도 백작과 아에토스 백작의 영지전에 후작님께서 관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여는 무슨. 에스쿠도 백작을 도왔지만 끝내 아에토스 백작군에게 패했네. 에스쿠도 백작이 배상을 준비 중이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영지전 과정에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배상금을 청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이 황당한 눈으로 케이사 콜드월 백작을 보았다.
“중대한 문제라는 게 뭔가?”
“북부의 귀족을 영지전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제국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도 하셨습니다.”
“…….”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일순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엄격하게 말하면 황태자의 주장이 옳다.
제국의 영지전에 북부 귀족을 끌어들인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자신이 그것을 묵인한 것은 기사의 싸움이라 생각해서였다.
그 영지전은 ‘기사의 참전으로 보느냐? 정치적인 문제로 보느냐?’에 따라 갈릴 사안이었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던가?”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까지는 확대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만. 북부 귀족이 참전하였으니 배상도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쿠도 백작이 황태자 전하 쪽 사람이었던가?”
“제국의 귀족 중에 황태자 전하 쪽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까?”
케이사 콜드월 백작의 반문에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은 피식 웃었다.
감정에 휘둘려 황태자의 최측근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알겠네. 배상금 문제는 없던 것으로 처리해 주겠네. 그리고 노파심에 한마디 하지. 행여나 그 일로 아에토스 백작가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게. 라고아 자작과 만나고 싶지 않다면 그래야 할 걸세.”
“제국이 고작 북부 귀족 한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작은 나와 에스쿠도 백작군이 그 한 사람에게 패했다는 것을 잊었나? 헤드나르 후작가 정예와 에스쿠도 백작군이면 어지간한 왕국의 전력과 맞먹는다네. 북부나 남부에 주둔 중인 제국군 군단을 피에스트라로 돌릴 거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 말일세.”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특무대가 피에스트라에서 철수한 것도 사실은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특무대는 샤스트라 헤드나르 후작의 접대를 받은 다음 날 아침, 헤드나르 성을 떠났다.
그로부터 사흘 후.
포메른부르크 공국에 도착한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공국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전해 받았다.
그것은 ‘황제 폐하가 엘리오 라고아에게 백작의 작위와 봉토를 하사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급변한 사태에 갈팡질팡할 때 황태자의 심복이 그를 찾아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처음 계획대로 에스쿠도 백작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커트 피데스 자작의 말에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라고아가 제국 백작이 되었는데도 계속 진행하겠다는 말씀이신가?”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라고아 백작이 북부 왕국 편에 설 거라고 생각하나? 그랬다면 작위를 받지도 않았을 걸세.”
“황태자 전하께서는 통제를 벗어난 칼은 크나우프 대공가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라고아 백작이 황태자 전하의 편에 선다면 에스쿠도 백작가는 몰락할 테지만. 그게 아니라면 에스쿠도 백작이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묵묵히 커트 피데스 자작을 보던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물었다.
“엑시티움의 생산에 들어간 건가?”
“저도 모릅니다. 설사 안다 해도 말씀드리지 못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엑시티움은 양날의 검이네. 대귀족들이 오십 년 전에 그걸 폐기한 것은 너무도 위험해서였네.”
“하지만 크나우프 대공이나 라고아 백작과 같은 이를 통제할 방법이 그것뿐이라는 것은 백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인간을 믿는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네. 엑시티움을 가진 자가 배신하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말 걸세. 엑시티움이 사장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경도 알 텐데?”
“백작님의 염려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지 않습니까? 황태자 전하의 판단을 믿어 보십시오.”
“황태자 전하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커트 피데스 자작과 같은 이와 떠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엑시티움이 양산되면 기사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총사들 손에 소드마스터를 죽이는 마력탄이 쥐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어느 소드마스터도 전장에서 지금처럼 날뛰지는 못할 터였다.
소드마스터인 케이사 콜드월 백작에게 그건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
론디니움 제국은 ‘덱스터 프레이저 2세가 엘리오 라고아에게 백작의 작위와 봉토를 하사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북부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남부 왕국과 제국의 전쟁을 유심히 지켜보던 차에 그 소식은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깜짝 놀란 에스카토스 왕국에서는 작위 수여의 전모를 확인하기 위해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을 피에스트라로 보냈다.
그 일을 위해 비공정까지 동원할 정도로 에스카토스 왕실은 몸이 달았다.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이 피에스트라에 도착한 것은 11월 말경이었다.
하데스 항.
마력범선 한 척이 천천히 계류장으로 진입했다.
엘리오 일행이 세를 낸 마력범선이었다.
녹색 섬 발견 이후 한 달 가까이 허탕을 쳐서인지 계류장에 배를 매는 선원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마력범선에서 내리는 엘리오 일행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파비안이 놀란 얼굴로 교수대가 놓였던 공터를 가리켰다.
“저거 비공정 아닙니까?”
“그러네. 또 높으신 분이 왔나 본데?”
대수롭지 않은 엘리오와 달리 파비안의 언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에스카토스 왕가 문양입니다! 에스카토스 왕궁에서 누가 왔나 본데요?”
“그래? 누가 왔지?”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할 때 벤젤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쇼. 라고아 백작님. 오늘쯤 오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오가 고개를 까딱이자 벤젤이 계속해서 말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베르나르도 후작님이 방문해 주셨습니다. 벨라누스 백작님이 성으로 모시려 했지만 라고아 백작님부터 만나겠다고 거절하셔서, 바닷바람 태번에 숙소를 잡아 드렸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찾아왔다는 말에 엘리오와 파비안은 반색을 했다.
벤젤은 그 말을 하기 위해 왔던 듯 이내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엘리오 라고아가 제국의 백작이라 이전보다 더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엘리오는 딱히 벤젤을 잡지 않았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도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그녀에게 아무 감정이 없음을 알기에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바닷바람 태번으로 걸어가던 파비안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이젠 바람이 차네요. 물론 히르헤라에 비하면 멀었지만요.”
“그곳에 비하면 봄이다. 그나저나 벌써 일 년이라니, 갑자기 짜증이 나네.”
엘리오는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나 툴툴거렸다.
잠시 후 엘리오 일행은 바닷바람 태번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닷바람 태번을 꽉 채우고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
엘리오와 파비안을 본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 파비안 남작. 오랜만이오.”
의자에 앉아 있던 베르나르도 후작의 호위기사들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엘리오는 환한 미소로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묵례를 했다.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처음 보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태도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조금 놀랐다.
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고개를 숙이다니?
그와 동행한 이래 저런 예의 바른 모습은 처음이었다.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도 알은체를 했다.
“베일럼의 호랑이라 불리시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 반갑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 각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소드마스터가 됐지만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머리를 숙였다.
왕국도 다르고, 검술의 경지도 자신이 높지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예를 표하니 자신도 그런 것이다.
이윽고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은 엘리오 일행을 자신의 자리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베르나르도 후작과 엘리오, 파비안은 히르헤라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한참 동안 옛날이야기를 하던 베르나르도 후작이 생각난 듯 말했다.
“참! 토비아스 푸토코아 백작을 기억하시오?”
“예, 아주 싸가지가 없던 애송이였죠. 왜요? 또 무슨 사고를 쳤습니까?”
뒤끝 긴 엘리오의 입에서 곧바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균열 부근에서 푸토코아 백작군이 마물과 마주쳤는데, 그때 마물과 싸우다가 광포화 상태에 접어들었소. 그 바람에 푸토코아 백작이 흑마법을 익혔다는 게 드러났고, 재판에 넘겨져 작위를 박탈당했소.”
“그놈이 흑마법을 익혔어요? 내가 봤을 때는 멀쩡했는데?”
“암살조직 크레센트에 찰스 맨슨이라는 흑마법사가 있었소. 그자를 통해 강신술을 익혔다가 그만 광포화되고 말았던 거요.”
“아하! 그래서 흑마법사는요?”
“제국에 알려 치안대가 크레센트를 기습했는데……. 흑마법사에 대해 아는 자들이 없었소.”
“아쉽게 됐네요. 그럼 푸토코아 백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토비아스의 동생이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았고, 토비아스는 왕궁 감옥에 갇혀 있소.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니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할 게요.”
“그런 건 사형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푸토코아 백작가가 사방으로 손을 써서 사형은 면하게 됐소.”
“의리의 힘인가요?”
“그건 아니오. 대귀족을 죽이지 않는 게 관행이다 보니 사형이 어려웠던 모양이오.”
“아하! 그래야 자기도 죽을죄를 지었을 때 살 수 있으니까? 대단한 동업자 정신이네요?”
“부끄럽지만 사실이오. 그건 그렇고, 라고아 경은 어쩌다 제국에서 작위를 받게 된 거요? 국왕 전하는 물론 왕국의 대귀족들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