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천구검-1237화 (1,237/1,339)

1237회. 제가 야인 출신이라고 놀리시는 겁니까?

십 년 전.

토플라 공국.

트루먼 솔론 후작가.

그리핀 기사단의 기사 타인록은 기사단 집사장 세인 셔우드 남작의 호출을 받고 달려갔다.

“부르셨습니까? 남작님.”

“그래, 타인록. 자네가 기사단에 온 지도 올해로 삼 년째지?”

“그렇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출신 때문에 다른 기사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았을 거야.”

“아닙니다.”

타인록은 기사단 집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기사단의 인원을 감축한다는 소문도 없고, 자신은 기사단의 소드 비기너 중에서 우수한 편이라 딱히 지적받을 일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뭔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싸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둘째인 하워드 공자가 성인식을 치렀다.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어른이 됐다는 소리지. 따라서 곁에서 그를 경호할 기사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 기사단장님은 비록 하워드 공자가 둘째지만 후작님의 적자니 재능 있는 기사를 보내라고 하시더군. 기사단장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자네 얼굴이 떠올랐다. 개인 장비를 챙겨서 내성의 호위대로 가라.”

“기사단에서 나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자네처럼 재능 있는 기사를 그렇게 방치하면 안 되지. 하워드 공자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 적당한 기사와 교체해 주겠다. 일 년만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타인록은 기사단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자리를 떠났다.

그날 정오.

호위대로 재배치된 타인록은 이 공자인 하워드 솔론을 찾아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로 하워드 경의 호위를 맡게 된 타인록입니다.”

하워드 솔론이 신기한 눈으로 거구의 기사를 보았다.

“타인록? 이름이 특이하네. 고향이 어디지?”

“너클스 산맥입니다.”

“공국 동부에 있는 미개척지?”

“그렇습니다.”

“설마 야인이야?”

“예.”

“정말 스몰 기가스라고?”

토플라 공국 동부 끝의 미개척지에 사는 야인은 체구가 커서 ‘스몰 기가스’로 불렸다.

거인이라는 뜻의 기가스에 스몰을 붙였으니 조롱에 가까운 별칭이었다.

“맞습니다.”

타인록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눈으로 하워드 솔론을 응시했다.

둘째인 그는 작위를 잇지 못하니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눈빛을 보니 내 호위가 된 게 마음에 들지 않나 봐? 내가 둘째라서 그런 거지?”

“…….”

타인록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스몰 기가스’라고 조롱한 사람의 비위를 맞출 마음은 없었다.

후작가에서 쫓겨나면 용병이 될 생각이다.

“야인이라 그런지 속마음을 숨기지 않네.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칼을 가는 사람들보다야 낫지. 알았어. 잘 지내 보자고.”

타인록의 다소 불량스러운 태도에도 하워드 솔론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내심 안도하는 타인록의 귓가로 하워드 솔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거 알아? 당신은 형님을 따르는 귀족들이 나에게 보낸 메시지야. 우린 둘다 좆 된 거라고.”

‘아뇨. 둘째인 당신만 좆 된 겁니다.’

타인록은 세인 셔우드 남작의 약속을 믿었다.

아니 검사로서 자신의 재능을 믿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자신처럼 뛰어난 검사를 세인 셔우드 남작이 포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타인록은 하워드 솔론의 곁에서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약속한 일 년이 지나도 세인 셔우드 남작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삼 년쯤 지나서야 타인록은 자신이 기사단에서 완전히 방출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솔론 후작가의 얼굴인 그리핀 기사단에 야인은 ‘옥에 티’였던 것이다.

***

현재.

타인록이 자리에 앉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그를 힐끔 보았다.

표정은 여느 때처럼 무덤덤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위라는 신분으로 있는 듯 없는 듯 했지만 지금은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기세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그가 자신의 경지를 감추고 있었음을 알았다.

저 정도 기세면 야인식 소드 익스퍼트 끝자락이다.

마나 유저라고 해도 소드 비기너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할 터였다.

‘아깝군.’

만약 그가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면 진정한 소드마스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인 소드마스터는 마나 유저로 치면 소드 비기너보다 나은 정도에 불과하다.

평범한 소드 비기너들보다는 뛰어나겠지만 그래 봐야 소드 익스퍼트의 아래다.

소드마스터부터는 초인이다.

타인록이 아무리 날고 기는 검사라 해도 ―영기 수련자인 이상― 초인의 반열에 들기 어려울 것이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규칙에서 벗어난 거다.

그때 모험가의 시선을 느낀 타인록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십쇼.”

“감추고 있던 기세를 드러낸 걸 보니 솔론 남작과는 결별할 모양이지?”

순간 타인록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릴 정도의 검사라니?

어쩌면 상대는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기사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관계가 아닌 건 사실입니다.”

타인록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오늘 일로 하워드 솔론 남작의 호위라는 딱지도 자연히 떨어져 나갔다.

십삼 년이라는 세월을 솔론 후작가에 헌신했는데 성공은커녕 척살 대상이 되고 말았다.

기사단에서 부르지 않을 때 솔론 후작가와 결별할 날이 올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 마차가 출발했다.

“강도 흉내를 내던 용병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그냥 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솔론 후작가에 죄를 물을 수도 없고, 치안대에 넘겨 봐야 솔론 남작의 처지만 광고하는 꼴이라.”

뒷자리(삼등석)에서 듣던 파비안이 옆에 있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속삭였다.

“힘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당당하다니까요.”

“어쩔 수 없잖아.”

이번의 경우 작위 승계와 관계되었으니 내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전에서 암살은 성공이냐, 실패냐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뒷자리 모험가들이 솔론 후작가를 거론하자, 하워드 솔론 남작이 살짝 소리 높여 말했다.

“폐를 끼쳐 미안하게 됐습니다만, 대귀족에 대해 멋대로 떠드는 것은 죄가 됩니다. 그러니 치안대 구경하고 싶지 않다면 그 입들 다물어 주십쇼.”

그러자 엘리오가 파비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야, 조용히 해. 나 치안대에 또 가면 안 돼.”

“예, 예.”

모험가들의 반응에 하워드 솔론 남작이 주먹을 말아 쥐자 크레아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전세 마차는 힘들겠죠?”

얼마 전 하워드 솔론 남작은 토플라 공국에서 전세 마차를 태워 주겠다고 했었다.

모두 솔론 후작가의 지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솔론 후작가가 그의 목숨을 노리니 피해 다녀야 할 상황.

이전처럼 돈 걱정 없이 대수림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를 악물고 있던 하워드 솔론 남작이 짐짓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돈도 빠듯하지만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도 나와 동행할 생각이냐? 나는 네가 토플라 공국에서 다른 동료를 찾았으면 하는데. 치안대에 들락거리는 모험가들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모험가들로.”

하워드 솔론 남작은 은근슬쩍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설마 솔론 후작가에서 또 그러겠어요? 남작님이 거리를 두면 알아서 사그라들 거예요.”

“사그라들지 않으면 다음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우리는 뭐 손 놓고 있어요? 이번처럼 또 극복해 낼 수 있을 거예요.”

“전세 마차도 어렵다. 대수림까지 짐마차를 이용해야 할 거다.”

“괜찮아요. 검문소 통과는 짐마차가 더 빠르잖아요.”

크레아는 그와 결별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자 하워드 솔론 남작도 더는 밀어내지 않았다.

정이 든 것도 있지만 대수림에 혼자 간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인 까닭이다.

크레아는 뒷자리(이등석)를 힐끔 돌아보았다.

때마침 정면을 보던 타인록과 크레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 말할 것처럼 머뭇거리던 크레아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렸다.

타인록이 함께 가 준다면 든든하겠지만 그건 그가 선택할 문제였다.

용병들의 습격이 있은 뒤로 타인록은 솔론 남작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함께 다니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림자처럼 솔론 남작을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 대신 옆자리의 늙은 모험가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소드마스터 진입을 목전에 둔 그는 본능적으로 늙은 모험가에게 끌렸다.

마차가 잠시 쉬어 갈 때면 늙은 모험가의 주위를 맴돌았다.

***

열흘쯤 지나, 마차는 마침내 토플라 공국의 국경을 넘었다.

국경에서 공국 수도인 프뉴마까지 이틀 거리니 목적지에 거의 다 온 셈이다.

오후 3시쯤.

지친 말들을 쉬게 하기 위해 마차가 길가에 잠시 멈춰 섰다.

아침부터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타인록이 늙은 모험가 일행을 찾아갔다.

“모험가님.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그가 아니라 엘리오 라고아 남작을 보았다.

엘리오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결국 직접 만나서 듣는 수밖에 없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타인록의 뒤를 따라갔다.

타인록은 도로에서 벗어나 울창한 숲 안으로 깊게 들어갔다.

남부 왕국 접경지인 토플라 공국의 날씨는 여름과도 같아 초록이 무성했다.

숲 한가운데서 넓은 공터를 찾아낸 타인록이 천천히 돌아섰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타인록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들어서 아시겠지만 야인 출신의 기사입니다. 검술의 한계에 봉착한 지 여러 해 됐습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계기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설명이 길어지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말을 끊었다.

“나와의 대련을 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례하다 생각하지 마시고 후배 모험가에게 한 수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상대가 야인 출신이라고 무시할까 봐 자신이 모험가임을 강조했다.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왜 나인가?”

“그야 어르신께서 가장 강하니까요. 비록 제가 야인이지만 저의 검술은 소드 익스퍼트에 육박합니다.”

“알고 있네. 못해도 소드 익스퍼트 초급은 되어 보이더군.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면 솔론 후작가에서 자네를 버리지도 않았겠지.”

“솔론 후작가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한 수 지도해 주시겠습니까?”

“훗! 안목이 부족하군.”

늙은 모험가의 말에 타인록이 얼굴을 찌푸렸다.

가장 강한 사람에게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안목이 부족하단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가장 강해 보였다니 하는 말일세.”

“역마차 승객들 중에 어르신보다 더 강한 검사가 있습니까?”

“있네.”

“그럴 리가요. 우리가 탄 마차 외에 검술을 연마한 승객은 없습니다.”

“그 말은 맞네.”

“삼등석에 있는 두 청년은 어르신보다 약합니다.”

“그러니 안목이 부족하다고 하는 걸세. 나는 그중 한 사람의 일검도 받아 내지 못하거든.”

“제가 야인 출신이라고 놀리시는 겁니까?”

희롱당했다고 생각한 타인록이 늙은 모험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