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5회. 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루나 마일러스의 계속된 요구에도 엘리오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마물과 ―언제라도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모험가와 용병이 그득한 어비스 내에서 평상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엘리오가 슬쩍 루나 마일러스의 눈치를 살폈다.
굳은 표정을 보니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그러는 것처럼 자신 역시 그녀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이 어비스라서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거 알죠?”
“그러니까 더욱 치료가 필요한 거야.”
“치료는 받을게요.”
순간 루나 마일러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걸 본 엘리오는 더욱 자신의 생각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단,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내가 이성을 잃으면 누님 말대로 할게요.”
“…….”
루나 마일러스는 멈칫했다.
엘리오가 왜 그런 단서를 다는지 알지만 동의하기 어려웠다.
어비스에서는 ‘이성을 잃는 것’만으로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네가 이성을 잃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지.”
“누님, 반신인 내가 그럴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내가 그 정도로 허약한 사람은 아니라고요. 엑시티움에 당했다고 나를 아주 약골로 보시네.”
“하지만…….”
“나도 더 이상은 양보 못 해요. 그러니까 누님도 나를 인정한다면 양보해 줘요.”
잔머리에 능한 엘리오는 ‘나를 인정한다면’이라는 말로 루나 마일러스를 압박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루나 마일러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래. 그렇게 하자.”
그녀가 받아들이자 엘리오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어비스에서 구룡번신을 쓸 수가 없는 지 말해 주세요. 조금 전에 누님이 ‘어비스라서 그럴 거다’라고 했잖아요.”
“네 구룡번신이 막히는 것과 사람들이 쉬이 피로를 느끼고, 쾌감이 고조되는 건 모두 카오스(Chaos) 때문이야.”
“카오스요?”
“마나 프트라스님이 이 세계를 만들기 직전의 상태를 카오스라고 해. 공허한 혼돈의 상태라고나 할까. 그런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한 분이 마나 프트라스님이야. 태초의 혼돈을 정제해서 마나를 만들고, 그것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지.”
“그 카오스가 어비스에 있다고요?”
“맞아. 그 혼돈의 힘에 구룡번신이 막힌 거야. 쉬이 지치고, 쾌락을 얻고, 광포해지는 것 모두 어비스에 충만한 카오스 때문이야. 네가 말한 또 다른 원인.”
“그런데 이 세계의 학자들도 모르는 걸 누님은 어떻게 알아요?”
“머릿속으로 낯선 지식이 떠오르고 있어. 샘에 물이 차오르듯. 아마도 그만큼 샤스트라 파라크티와 합일되었다는 뜻이겠지.”
“…….”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 엘리오는 다른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주화입마에 빠진 탓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아차!’
또다시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얼른 구천여일진경을 외웠다.
죽 끓이듯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이내 가라앉았다.
“누님.”
“응?”
“샤스트라 파라크티로 돌아갈 것 같으면……. 그 전에 꼭 알려 줘요.”
“그럴게.”
루나 마일러스는 속으로 ‘할 수 있으면’이라고 중얼거렸다.
기억이 지금처럼 스며들듯 돌아오면 엘리오가 말한 경계를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
토플라 공국.
최남단 도시 토렌스.
아침부터 산 너머에서 마력포 소리가 요란하더니 한순간 고요해졌다.
평소보다 마력포 소리가 더 많이 나서 도시 주민들은 길거리로 몰려 나왔다.
토렌스 주민들이 피난을 가야 하나 더 두고 봐야 하나 웅성 거릴 때, ‘쿵! 쿵!’ 하고 지축을 흔드는 소리와 함께 강철로 만든 거인들이 도시 앞에 나타났다.
키가 십 미터나 되는 그것은 남부 왕국의 강철 골렘이었다.
갑자기 처음 보는 괴물체가 등장하자 도시는 발칵 뒤집혔다.
경비병들이 급히 성문을 닫아 걸었지만, 강철 골렘의 발길질 한 방에 박살 났다.
성문을 부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강철 골렘들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도시에 주둔하던 제국군이 마력총을 쐈지만 강철 골렘의 외갑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강철 골렘의 눈에서 붉은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지이잉―!
‘죽음의 빛’이라 불리는 빛이 스쳐 지나간 곳마다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죽음의 빛은 사람이든 건물이든 가리지 않았다.
강철 골렘의 공격에 학살당하던 제국군은 결국 도시를 버리고 후퇴했다.
뒤이어 쉐이드, 아드리아, 마스다르, 보스타니아 연합군이 물밀듯 밀려왔다.
남부 왕국 연합군은 토플라를 점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북상했다.
***
론디니움 제국.
수도 페트로폴리스.
클레멘스 궁(황제 궁정) 중앙 홀.
이른 아침.
황제가 업무를 보는 클레멘스 궁에 제국의 고위 관료들이 모여들었다.
“마일스 평원에서의 패배로 토렌스를 남부 왕국군에 빼앗겼습니다.”
“코르보 마법 병단이 큰 피해를 입고 프뉴마까지 후퇴했습니다.”
“소드마스터인 카르멘 후작과 에드몬드 후작이 마일스 평원에서 전사하고, 생존한 소드마스터들과 제국군은 어반으로 후퇴했습니다.”
“마일스 평원에 강철 골렘이 무려 열다섯 기나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다섯 기만 내보인 것은 아군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보좌에 앉아서 대신들의 보고를 듣던 덱스터 프레이저 2세가 눈을 찌푸렸다.
강철 골렘 열다섯 기면 전력이 세 배나 급증한 것이나 다름없다.
전장의 지배자로 알려진 소드마스터들이 전사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코르보 마법 병단은 왜 어반이 아닌 프뉴마까지 올라간 건가?”
프뉴마가 토플라 공국의 수도로 최후방이라면, 어반은 프뉴마와 토렌스 사이에 있는 산업도시다.
황제는 코르보 마법 병단이 왜 어반으로 가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어반은 토플라 공국의 중추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자 군무대신 로이드 코너 백작이 답했다.
“마일스 평원에서 후퇴하는 소드마스터들을 돕던 마법사들에게 마나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합니다.”
마법사들은 자기가 도달한 서클의 마법을 세 번 연속으로 펼치면 마나가 고갈된다.
마나 고갈은 마나석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충전되니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억지로 마나 고갈을 넘어서는 ―혹은 자신의 서클을 초과하는― 마법을 펼치면, 마나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급속도로 약해진 마법사의 마나홀은 마나를 담지 못하고 오히려 모이는 족족 방출하게 되는데, 그것을 마나 역전 현상이라 한다.
마나 역전 현상을 치료하는 데는 마법사가 초과한 마나량에 따라 최소한 한 달에서 길면 몇 년이 걸린다.
일반 마법사들이야 평생 마나 역전 현상을 경험할 일이 없지만, 전투 마법사들에게 마나 역전 현상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황제도 그걸 알기에 마법사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킬리언 헤일 공작은 무사한가?”
“삼 개월간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코르보 마법 병단은 당분간 전선에 투입하기 어렵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가 그렇게 됐다니 황제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허어!”
“코르보 마법 병단이 아니었다면 마일스 평원에서 소드마스터들을 모두 잃었을 것입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그 일로 가장 강력한 부대를 쓸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잖나. 현재 제국에 코르보 마법 병단을 대신할 부대가 있는가?”
“소드마스터인 카르멘 후작과 에드몬드 후작이 마일스 평원에서 전사하고, 생존한 소드마스터들과 제국군은 어반으로 후퇴했습니다.”
“마일스 평원에 강철 골렘이 무려 열다섯 기나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다섯 기만 내보인 것은 아군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보좌에 앉아서 대신들의 보고를 듣던 덱스터 프레이저 2세가 눈을 찌푸렸다.
강철 골렘 열다섯 기면 전력이 세 배나 급증한 것이나 다름없다.
전장의 지배자로 알려진 소드마스터들이 전사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코르보 마법 병단은 왜 어반이 아닌 프뉴마까지 올라간 건가?”
프뉴마가 토플라 공국의 수도로 최후방이라면, 어반은 프뉴마와 토렌스 사이에 있는 산업도시다.
황제는 코르보 마법 병단이 왜 어반으로 가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어반은 토플라 공국의 중추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자 군무대신 로이드 코너 백작이 답했다.
“마일스 평원에서 후퇴하는 소드마스터들을 돕던 마법사들에게 마나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합니다.”
마법사들은 자기가 도달한 서클의 마법을 세 번 연속으로 펼치면 마나가 고갈된다.
마나 고갈은 마나석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충전되니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억지로 마나 고갈을 넘어서는 ―혹은 자신의 서클을 초과하는― 마법을 펼치면, 마나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급속도로 약해진 마법사의 마나홀은 마나를 담지 못하고 오히려 모이는 족족 방출하게 되는데, 그것을 마나 역전 현상이라 한다.
마나 역전 현상을 치료하는 데는 마법사가 초과한 마나량에 따라 최소한 한 달에서 길면 몇 년이 걸린다.
일반 마법사들이야 평생 마나 역전 현상을 경험할 일이 없지만, 전투 마법사들에게 마나 역전 현상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황제도 그걸 알기에 마법사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킬리언 헤일 공작은 무사한가?”
“삼 개월간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코르보 마법 병단은 당분간 전선에 투입하기 어렵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가 그렇게 됐다니 황제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허어!”
“코르보 마법 병단이 아니었다면 마일스 평원에서 소드마스터들을 모두 잃었을 것입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그 일로 가장 강력한 부대를 쓸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잖나. 현재 제국에 코르보 마법 병단을 대신할 부대가 있는가?”
군무대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라도 크나우프 대공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크나우프 대공의 이름이 나오자 대신들은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황태자가 오래전부터 크나우프 대공가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곰곰 생각하던 황제가 대신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대신들은 황태자의 눈 밖에 날까 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묘한 침묵이 중앙 홀을 휩쓸었다.
대신들을 둘러보던 황제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반대도, 동의도 없군.”
군무대신은 자신의 의견을 재차 말하지 않았다.
반대도 동의도 않는 것은 눈앞의 황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크나우프 대공은 자타가 공인하는 ‘제국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그 기둥이 황가에 꼬리를 흔들지 않으니…….’
기사들이야 그런 크나우프 대공의 기개를 높이 사지만, 황실 눈에는 상당히 거슬릴 터였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황제가 군무대신을 돌아보았다.
“군무대신.”
“예, 폐하.”
“제국의 공국들에 다음과 같은 동원령을 내려라. 제국의 모든 공국은 예외 없이 십만의 정병을 파병하되, 소드마스터가 참전할 시 일만의 군사를 감축할 수 있다.”
군무대신이 멈칫하자 황제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하라.”
“……소신도 지금은 동원령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군무대신은 황실과 크나우프 대공 사이에서 결국 황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속으로는 크나우프 대공이 이 전쟁에 참전해 주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회의가 끝나자 대신들이 하나 둘 중앙 홀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황태자 루이스 프레이저 3세가 황제에게 다가갔다.
“폐하.”
“할 말이 남았더냐?”
“동원령만으로는 남부 왕국군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 여우 같은 크나우프 대공에게 총사령관직을 내리자고?”
“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폐하를 대신해 남부 왕국을 정벌하겠습니다.”
“네가?”
황제가 황당한 눈으로 황태자를 보았다.
제국 최강인 코르보 마법 병단도 패퇴한 전쟁에 황태자가 나서겠다니?
“예, 제가 크나우프 대공 없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네 입으로 동원령만으로는 남부 왕국군을 물리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괜히 크나우프 대공가를 의식해 무리할 것 없다. 솔직히 크나우프 대공을 앞세워도 이길지 말지 모를 전쟁이다.”
“머리 숫자만 믿고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느냐?”
“예.”
“크나우프 대공을 앞세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무엇이냐?”
주저하던 황태자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엑시티움과 3세대 골리앗이면 강철 골렘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십 년 전에 폐기한 엑시티움을 부활시켜 보겠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흠, 3세대 골리앗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타불라 마탑에서 제작한 병기로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가진 골렘입니다.”
“그런 골렘이 있다고?”
“예, 최근에 개발이 완료되었습니다.”
“흠! 엑시티움이라…….”
의외로 황제는 3세대 골리앗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비스에서 나온 강철 골렘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하지만 엑시티움은 다르다.
소드마스터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엑시티움이라면 강철 골렘의 외갑이 뚫릴 것도 같았다.
“엑시티움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는 걸 알고 있느냐?”
엑시티움이 대륙에 퍼지면 자칫 기사를 뿌리로 하는 신분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총병들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따로 만들어 특별히 관리하면 됩니다.”
“총병 부대에 지급할 만큼의 엑시티움을 생산하려면 그것도 꽤 시일이 걸릴 것이다.”
“비밀리에 1개 중대를 무장할 만큼의 엑시티움을 생산해 두었습니다. 총병 부대와 3세대 골리앗을 하나로 묶어서 운영할 계획입니다.”
황제는 황태자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조금 무모하지만 그가 남부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더 이상 크나우프 대공가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은 분명했다.